교통·공해 지옥 ‘구세주’는 자전거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5.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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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신설·확장 때 전용도로 건설 의무화 안전·편리 시설도 보강…시민 참여 유도가 숙제

시민 교통 생활의 뒷전으로 밀려난 자전거가 복권되고 있다. 한때 자전거는 민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영화를 누린 시절이 있다. 일제 강점기, 국운이 내리막길로 치달을 무렵이었다. 1910년대 초반 조선 반도에는 국민적 영웅이 두 사람 출현했다.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이다. 그 중 엄복동은 자전거 한 대로 일본인의 콧대를 꺽었다. 나라 잃은 겨레는 엄복동의 활약에 환호했고, 자전거는 겨레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보배가 됐다. 하지만 그 뒤로 자전거는 자동차에 밀려 차츰 역사의 뒤안으로 퇴장하기 시작했다. 그 사연 많은 자전거가 최근 옛 영화를 회복할 조짐을 보인다.

 94년 12월 12·12 주역에 대한 기소 여부를 둘러싸고 여야 공방이 절정에 오를 무렵, 여당은 국회에 상정된 법안을 무더기로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 가운데에는 비록 여당 단독으로 처리되기는 했어도, 여야는 물론 국민 모두에게 환영받을 법안들이 끼여 있었다. ‘자전거 이용 활성화법’(활성화법)이 그 중 하나이다. 내무부가 오랜 준비 작업 끝에 최종안을 작성하여 국회에 제출한 이 법안의 취지는 ‘최근 심각해지는 교통·환경 문제에 대처하고 국민의 건강 증진과 근검 절약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한다’는 것이었다.

 법 조항에는 취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명문화해 놓았다. 먼저 앞으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자전거 이용 시설을 정비하고 자전거 이용자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새 법 제12조에서는, 도로를 개설·확장·재정비하거나 택지 개발 또는 공업·관광 단지를 조성할 때에는 자전거 전용 도로를 설치해야 한다고 정했다. 새 길을 낼 때에는 자전거 도로를 의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자전거를 보관·관리할 공간까지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새 법에 따르면, 시장이나 군수가 설치하는 주차장에는 일정 비율 이상으로 자전거 주차장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 또 시장·군수 등은 일반 주택 사업자가 시설물을 건축 또는 설치하고자 할 때 그 시설물 안에 자전거 주차장을 설치하도록 권장할 수 있다. 민간인 업자가 짓는 건축물에 대해서는 정부가 주차장을 설치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활성화법은 자전거 이용자의 안전 문제에 대해서도 배려하고 있다. 즉 자동차나 오토바이 따위는 자전거 도로를 함부로 통행할 수 없도록 규정해 놓은 것이다. 자전거와 자동차 겸용으로 지정된 도로에서 자전거 전용 구간을 침범하는 자동차 운전자, 기타 자전거 통행에 방해가 될 물건을 자전거 도로에 방치한 사람은 법으로 처벌받는다. 관련 조항을 어긴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백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자전거 6백만대 보급…52%가 레저용
 내무부가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해 구체 방안을 마련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때는 지난해 봄부터이다. 교통량은 자동차의 경우 연간 27%씩 증가하는 데 비해, 도로 증가율은 연 1.62%에 그쳐 교통 대책이 이미 한계에 부딪히고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내무부의 기본 발상은 자전거 이용을 대폭 늘리면 도시 교통난을 완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에너지 절약, 환경오염 방지, 주차난 해결 같은 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데서 비롯했다.

 실제로 자전거 이용이 대중화했을 때 얻는 효과는 크다. 서울 시내의 경우 자가용 승용차 이용자 10%가 자전거를 이용하면, 자동차의 평균 주행 속도가 현재의 시속 22.6㎞에서 26.65㎞로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자동차 1대가 차지하는 공간에 자전거 15~20대를 주차할 수 있으므로 주차난을 해소할 길도 열린다. 그밖에도 액수로는 환산하기 어렵지만 자전거가 이용자의 건강 증진에 이바지하는 몫도 적지 않다. 내무부 지역개발과 박성득 과장은 “서울시에서 자가용 이용자의 10%가 자전거를 타면 약 4조원을 절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자전거에는 다른 교통 수단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 여럿 있다. 가장 큰 장점은 교통 혼잡에 제약받지 않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동차보다 느리기는 하지만 평균 시속 12~15㎞ 정도는 유지한다는 것이다. 또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움직여지기 때문에 공해를 일으키는 오염 물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버스·지하철 등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할 때는 요금을 내야 하지만 자전거는 그렇지 않다.

 현재 국내 자전거 수는 자동차 수와 맞먹는 총 6백만대다. 하지만 자전거가 가진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주말 레저용 정도로만 쓰이는 실정이다. 내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체 자전거의 52% 정도는 레저용으로 쓰인다. 생활용이 47%, 스포츠용이 1%이다.

 내무부는 그 이유를 안전사고 위험이 높고 이용 시설이 태부족하다는 데에서 찾았다. 실제로 현행 도로교통법상 자전거는 차도에서 타야 한다. 이는 시민들이 교통사고 위험 때문에 자전거 이용을 기피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또 자전거는 대기 오염이나 소음에 노출되게 마련이고, 자동차에 견주어 안전성이 크게 떨어지며, 자연 환경을 극복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다. 게다가 자전거 이용자를 위한 공간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내무부 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자전거 도로는 일반 도로의 0.1%에 불과하다(표 참조). 결국 교통·환경·에너지 부문에서 1석3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하려면, 먼저 자전거를 안심하고 탈 수 있는 시설부터 설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셈이다.

 이같은 고민 끝에 나온 대안이 활성화법이다. 내무부는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올해부터 서울을 비롯한 15개 도시를 시범 지역으로 선정해 총 24개 자전거 전용 노선을 건설하기로 하고, 세부 계획을 다듬는 작업에 들어갔다. 세부 계획에 따르면, 시범 사업을 가장 먼저 적용할 지역은 경주시와 제주시이다.

 이번에 마련된 활성화법은 시민의 요구가 있기 전에 정부가 앞장서서 문제점을 찾아내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는다. 하지만 정부가 활성화법을 논의하기 훨씬 전부터 ‘녹색교통’ ‘시민교통환경연구소’ 등 몇몇 교통문제 전문 시민단체가 ‘환경친화적 교통’을 내세우며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하자고 여러 차례 문제를 제기했다.

“활성화법만으로는 부족”
 교통 관련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도 자전거 활성화 논의에 불을 붙인 요인이다. 지난해 10월 시민교통환경연구소가 주최한 ‘자전거 이용 활성화 방안을 위한 토론회’에서 시정개발연구원 이광훈 책임연구원은 “교통 정책은 시설 공급 위주에서 교통 수요 관리 위주로 바뀌고 있다. 자전거 활성화 논의는 승용차를 억제하고 대중 교통을 활성화하려는 정책과 맥락이 닿는다”라고 말했다. 결국 자전거 이용을 활성화하려는 움직임은 시대 변화에 따른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이다.

 활성화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자동차에 밀려난 자전거의 지위는 전기를 맞았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일부에서는 벌써 활성화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가장 큰 근거는 시민 참여를 담보할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건설기술연구원 백남철 연구원은 “독일·네덜란드 등 자전거 생활화에 성공한 나라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정부와 시민의 협조가 잘 이뤄지도록 체계가 잡혔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 법을 살펴 보면, 시민 참여를 유도할 방안이 미흡하다. 시민 참여가 없이는 모처럼 마련한 좋은 법안도 제 구실을 못하고 사장될 수 있다”라고 걱정한다.

 자전거 활성화를 위한 길은 훤히 뚫렸다. 남은 문제는 출발하기 앞서 코스를 결정하는 일이다. 정부가 독주하는 쪽이냐, 정부와 시민이 함께 어울려 달리는 쪽이냐. 시민의 참여 없이 출발만 서두르면 모처럼 길에 나온 자전거가 비탈에서 굴러떨어질 위험도 있다.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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