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강주영양 유괴살해 사건
  • 부산 ·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5.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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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표결 2대1의 진실

‘무죄’라는 말이 재판장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부산 고법 103호 법정 방청석에서 ‘와’하는 환성이 터져나왔다. 재판관들은 선고와 함께 신속히 퇴정하고 법정 안팎은 환희에 가득 찬 피고인측 방청인들로 술렁거렸다.

 2월24일 열린 강주영양 유괴살해 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제14차 선고 공판에서 부산지방법원 제3 형사부 박태범 부장판사는 이○○ 피고인(20)에게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죄(미성년자 약취 유인 · 살인 등)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으나, 나머지 피고인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같은 판결은 1월23일 10차 공판에서 ‘주범’ 원종성 피고인(24)에게 사형, 공범인 나머지 세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던 검찰의 형량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특히 박태범 부장판사는 “이 사건은 그를 ‘언니, 언니’라고 좋아하며 따르던 나이 어린 사촌동생을 유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서 너무나 인륜에 반하는 소행으로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할 수 없다”라고 판결문을 낭독하면서 이씨에게 법정 최고형을 선고했다. 박부장판사가 지난 1년 동안 구형량보다 높게 선고한 사건 수는 20건에 달했다. 그는 특히 패륜이나 성추행범 등 반인륜 사범에게는 검찰의 구형량을 뛰어넘는 중형을 선고해 왔고 이피고인에 대한 사형 선고도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형’ 구형과 ‘무죄’ 선고의 거리

 그러나 재판의 뒷맛이 개운치만은 않았다. 박부장 판사가 선고에 앞서 이례적으로 “이번 선고는 재판부 3인의 일치된 견해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맡은 제3 형사부의 오른쪽 배석 판사이자 주심판사인 황규훈 판사는 피고인 전원이 유죄라는 의견을 일관되게 밝혔고, 결국 표결을 해 2대 1로 결정했다는 설명이었다. 또 검찰은 선고 전날인 2월23일 도착한 서울대 법의학 교실의 머리카락 유전자 추가 감정서와 피고인측 증인인 김○○ 군(19)의 번복 진술을 들어 재판부에 변론 재개를 신청했으나, 황판사만 이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해 역시 2대 1의 표결로 검찰의 요구가 기각됐다. 검찰은 재판부의 선고에 불복해 공판이 끝난 뒤 바로 부산고등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박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원종성 · 옥영민(27) · 남○○ (여 · 20) 피고인이 경찰과 검찰에서 자백한 진술은 본인들이 법정에서 그 내용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그는 또 이 사건 관계자들의 진술과, 법원이 행한 원씨와 옥씨 두 피고인들에 대한 신체 검증 등을 종합해 볼 때, 피고인들이 경찰에서 진술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수사관들에게 가혹 행위를 당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그 조서의 신빙성도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박부장판사는 50명이 넘는 증인이 피고인들의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를 뒷받침하는 점이나, 원종성 피고인의 알리바이 증거로 제출된 사진 및 비디오 테이프 등을 고려할 때 자백 진술의 신빙성 역시 크게 의심스럽다고 했다. 서울대 법의학 교실의 머리카락 감정결과도 그것만으로는 동일인이라고 단정하기 불가능하고, 또 그것만으로 피고인들이 범행 차량에 타고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강주영양 유괴살해 사건은 주심판사인 황판사가 피고인 전원이 진범이라는 정반대의 판단을 내릴 정도로 속단을 불허하는 각종 증거나 증언이 대립해 왔다. 재판을 마친 뒤 박부장판사는 밝힌 바에 따르면, 황판사는 원종성씨의 변호인측이 알리바이 증거로 제시한 통화 기록이나 사진 등이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피고인들 간의, 또 피고인들과 증인들간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고 있으므로 알리바이에 신빙성이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검찰측이 내세운 이정빈 교수(서울대 법의학 교실)가 13차 공판에서 제시했던, 범행 차량으로 추정되는 프라이드 승용차에서 채집한 강주영양의 머리카락 6올에 대한 유전자 감정에 대해서도 황판사는 증거 능력을 인정했다. 자유심증주의를 규정한 형사소송법 309조에 따르면, 증거 채택 여부는 법관 고유의 판단에 속한다.

 

“수사 과정의 공정성이 ‘증거 능력’ 좌우”

 그러나 박부장판사는 유전자 감정에 대한 증거 능력여부 이전에 모발 수거 과정에서부터 결함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 사건을 수사한 부산 북부경찰서 수사관들은 지난해 10월13일 출입기자 4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프라이드 승용차에서 머리카락 60올을 수거했다. 박부장판사는 이 때 피고인측 가족이나 변호인이 입회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보관에도 문제가 있었다. 수거한 머리카락을 법원에 신청해 보관해야 하는데 이번 사건의 경우 형사계 사무실 안에 두었을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머리카락 샘플이 뒤바뀌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 머리카락 수거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유전자 감정의 증거 능력이 향상되더라도 여전히 문제로 남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공정성이라는 수사 과정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중시했다.

 이처럼 재판부 내부의 견해 차이만 보더라도 2심인 항소심에서도 역시 논쟁의 불씨는 그대로 살아 남을 확률이 크다. 더구나 이○○ 피고인의 범죄 사실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문에는 “이 피고인은 ‘성명 불상자(남 · 20세 전후)’와 공모하여 ‘장소 불상지’에서 피해자를 ‘불상의 방법’으로 목졸라 숨지게 했다”고 돼 있을 뿐 공범과 범행 장소 등을 특정해 놓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의 경우 이씨만이 유일하게 범행을 시인해 왔기 때문에, 이씨의 자백과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에만 근거해 범죄 사실을 구성하다 보니, 재판부는 이씨에 대한 범죄 사실조차 명료하게 밝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박부장판사는 증거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 기준은 ‘건전한 상식’에 기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검찰의 공소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검찰이 완전히 해명하지 못하는 변호인측 증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는 “검찰과 변호인 양측의 증거가 팽팽히 대립하는 상황에서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기는 어렵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이익이 되도록 판결하라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에 따랐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 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법조인이 많다. 이진록 변호사(법학박사·형사소송법 전공)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 이익이 원칙인데도 지금까지 법원의 선고 풍토는 오히려 검찰의 공소 유지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만 치우쳐 왔다”고 말하며, 이런 점에서 박부장판사의 판결에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법조계가 지적하는 이번 판결의 또 다른 의의는 가혹 행위 같은 잘못된 수사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이 사건은 재판 초기부터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 수사 의혹이 문제가 됐고, 이는 검찰측에 시종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러한 경찰의 고문 사실을 인정했다. 박부장판사는 “진범을 체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사할 때 피고인들의 인권이나 적법한 절차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적법한 구속 절차에 의해 영장을 제시해야 하며, 특히 야간에 잠도 안재우고 조사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신문 시간이나 방법도 개선해야 한다. 피고인이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한다. 수사 초기에 경찰에 소환돼 밤샘 조사를 받은 참고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을 맡은 안춘호 검사도 “피고인들이 모두 유죄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번 사건은 많은 교훈을 주었다. 우선 강압적인 참고인 소환 조사는 자충수를 두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다”라고 말해 수사 과정에서 문제점이 있었음을 일부 시인했다.

 

박부장판사, 현장 재검증 등 사건에 적극 개입

 잘못된 수사 관행에 대한 제동은 이미 이례적인 신체 검증에서부터 예고된 것이다. 박부장판사는 지난해 11월23일 고문수사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원종성 · 옥영민 두 피고인을 재판장 직권으로 자기 집무실로 불러 신체 검증을 한 바 있다. 검증을 마친 뒤 그는 피고인들의 신체 곳곳에 남아 있는 상흔에 대해 “고문에 의한 흔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재판 과정에 참고는 하겠다”고 여운 있는 감평을 남긴 바 있다(<시사저널> 제272호 참조). 이에 대해 그는 선고 공판을 마친 뒤 “고문한 흔적으로 판단했다. 단지 신체 검증만으로 내린 판단은 아니었다. 피고인이나 참고인들의 주장을 참고했고, 뒤에 나온 목격자들의 진술을 고려해서 그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됐다”라고 밝혔다.

 재판장 직권으로 시행했던 이례적 조처로서 현장 재검증도 빼놓을 수 없다. 1월12일 박부장판사를 비롯한 재판부 일동은 범행 현장 세 곳을 돌아보았다. 경찰의 현장 검증이 범행 사실을 재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재판부의 현장 재검증은 범행 현장이 공소 사실에 적힌 대로 행동할 만한 곳인지 확인해 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박부장판사는, 신체 검증은 처음 해보았지만 현장 재검증은 전에도 해본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확한 판단을 위해 재판부는 어떤 요청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박부장판사의 재판 방식은, 판사가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독일식 직권주의에 가깝다. 영 · 미식 당사자주의에서는 판사가 제3자 입장에 서서 쌍방의 주장을 조용하고 냉정하게 들을 뿐 적극 나서지 않는다. 독일식 직권주의는 판사가 자칫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사리를 판단할 소지가 있다. 반면, 영 · 미식 당사자주의는 사실 판단은 배심원에게 맡기는 대신 뛰어난 변호사를 만나야만 피고인이 유리해진다는 약점이 있다.

 차용석 교수(한양대 ·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오늘날엔 영 · 미식 당사자주의가 더 우세하다. 영 · 미식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검찰 구형량보다 무거운 형량을 내리지 않는다. 또 판사는 특이하거나 새로운 문제를 섣불리 제기해서도 안된다. 이런 관점에서 박부장판사의 재판 방식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한 법조계 인사는 “얼마전 대법원에서 이틀간 열린 양형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했더니 과거에 형량이 약했다고 자성하는 판사가 많았다. 그러나 일벌백계 운운하는 것은 경찰이나 검찰이 할 일이다. 판사들이 앞질러서 사회 기강을 확립하려고 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라고 빗대어 말했다.

 그렇지만 박태범 부장판사의 판결이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법부가 그동안 등한히 해온 ‘증거주의 원칙’을 재확인 해준 데 있을 것이다. 이는 또 검찰과 변호인 양측의 증거가 팽팽하게 맞설 경우, 또는 그 증거가 적법하지 못한 수사 절차나 가혹 행위에 의한 것일 경우, 재판부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를 보여준 것이다.

 물론 이번 판결로 유 · 무죄 공방이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항소심으로 갈수록 더 치열한 공방을 벌일지도 모른다. 또 재판부도 인정했듯이 단독 범행이 아니라면 공범은 누구이며, ‘주범’ 이씨는 왜 ‘무고한’ 세 사람을 끌고 들어갔는지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같은 의문을 푸는 것은 기본적으로 검찰의 몫이다. 이번 판결은 그런 점에서, 피의자의 범행 사실에 대한 검찰의 증거 책임과, 증거에 입각한 법관의 유 · 무죄 결정이라는 ‘상식’을 새삼 일깨워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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