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잠 못이룬 새벽별 뜨는 시각
  • 김지하 (시인ㆍ본지칼럼니스트) ()
  • 승인 1990.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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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 조영래씨가 돌아갔다. 1990년 12월12일 새벽별 뜨는 시각에 그는 파란 많은 젊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 시각에 나는 깨어 있었다. 까닭모를 무서움과 깊은 번뇌와 함께 낯선 깨달음들이 새파란 별 생겨나듯 온몸에 돋아나 밤새 잠 못이루고 전전반측, 그 시각에 일어나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그가 가려고 그랬던 걸까? 아침에 부음을 듣고 긴 心告를 마친 뒤부터 하염없는 회한에 시달렸다.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던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맨먼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70년 11월13일 밤이다. 명동 성모병원 앞길 건너 자그마한 이층 찻집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날은 전태일씨가 분신자결 한 날이었고 성모병원에 안치된 시신을 두고 전씨의 친구들과 경찰이 옥신각신 몸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장례식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서울대 법대 마당에서 식을 치른 뒤 영구를 메고 평화시장으로 가 노동자들과 합쳐 종로와 광화문을 거쳐 청와대로 간다는 계획이었다.

 고인은 고시공부를 중단하고 바로 이 사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고인이 내게 조시 작성과 낭독을 부탁했다. 여럿이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 나는 ‘오적’ 사건이 반공법을 위반했다 하여 수감됐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직후여서, 그 일에 “개입하면 프롤레타리아 시인으로 영영 낙인찍혀 꼼짝 못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반대 이유였다. 고인은 막무가내였다. 희생되더라도 내가 나서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반대가 중론이어서 결국 나는 빠지기로 하고 ‘불’이라는 제목의 구상메모만 법대 이종률씨에게 건네주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71년 가을,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불붙기 시작한 부패정권 규탄운동의 작은 불씨가 서울과 전국의 대학가, 종교계, 평화시장 노동자, 일반사회단체, 야당과 언론계 전체에 순식간에 무서운 불길로 확산된 것은 오로지 고인의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조직력 때문이었다. 71년은 학생 지식인 노동자 농민 시민 종교계가 연대하는 새로운 민중적 민주화운동의 기점이었고 특히 종교계의 사회참여는 이때가 시발점이었다.

 고인의 신조는 철저한 ‘功遂身退’였다. 천주교 원주교구청의 한 방에서 그 무렵 이런 대화가 있었다.

 “조형. 참 대단하오. 훌륭해!”

 “안듣겠습니다.”

 “어찌어찌 일을 해나갔는지 말해주시오.”

 “모르십시요.”

 모르십시요라? 묘한 말인데 그 뒤부터 나는 이 말을 입속으로 뇌이며 혼자 웃는 버릇이 생겼다. 오른손과 왼손 사이의 관계. 고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72년 그가 살던 역촌동 뒷산 기슭 풀언덕이 생각난다. 고시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다니면서 고인은 전국학생연맹을 조직했다. 노동자와 학생 및 시민의 연대가 공식 논의되고, 윤필용이네 탱크가 고대에 난입하여 여학생을 구타하고, 위수령이 선포되고 고인은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가고, 나는 강원도 탄광으로 피신했던 해다.

 감옥에서 1년6월, 법관의 꿈도 깨져버렸다. 73년 가을, 출옥직후 몸도 성치 않은 고인에게 다시 위험한 일을 맡긴 것은 나였다. 민청학련 자금책. 고인이 체포되지는 않았으나 그 때문에 6년 세월을 내내 아내와 어린아이와 함께 골방에 숨어 살아야만 했다. 감옥 안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뒤 나 역시 그 세월 내내 가슴 찢기는 회한 속에 지내야 했다. 그 뒤 고인은 복권이 되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출옥 후에 만난 고인의 사상은 놀랍도록 성숙하고 크고 넓어져 있었다.

 “기존 이념 따위로는 안됩니다. 새롭고 넓은 세계관을 찾아야 합니다.”

 넓은 길을 찾던 나는 道伴을 얻었다. 그 뒤 고인의 활동은 한마디로 눈부신 것이었다. 하는 일마다 내게는 새롭고 의미심장한 영감의 촉매였다. 생명운동 환경운동에 대한 고인의 전폭적인 동의와 지지는 그 무렵 외로웠던 나에게 있어 태산 같은 반석이었다. 고인이 앓아누운 뒤 대학병원에서, 연희동 집에서 만날 때마다 거듭 확인하게 된 것이 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아니 죽음에서마저도 가장 완전한 중생해방의 진리, 광활한 세계관의 한 끄트머리나마 발견하고자 하는 뜨겁고 밝은 마음. 이것이 험난한 삶속에서도 굽힘없이, 끊임없이 눈부신 활동을 하도록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것. 그 마음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되어 크게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민족이 나아가야 할 새 길을 비춰주리라는 것.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삶과 죽음을 넘어 그의 마음을 크나큰 안식에 들도록 하리라는 것.

 그런 그가 간다. 새 시대의 새벽별인 그가 간다. 우리는 이 시대의 큰 정신 하나를 잃었다. 고인의 명복을 함께 빌며 우리 모두 생각을 크게 열어야 할 시각. 새벽별 뜨는 이 시각에 깨어 앉아 눈물을 삼키며 이 글을 쓴다.

 1990년12월13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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