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사회’의 그늘
  • 박순철 (편집부국장) ()
  • 승인 1990.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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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70년대 후반에 ‘한국인들이 몰려온다’는 특집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이 기사는 “세계에서 제일 부지런한 국민은 일본인으로 돼 있지만 한국인에 비하면 일본인마저 게을러 보인다”고 평했다. 한국인의 근면성에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경제의 힘을 본 것이다.

 사실 지난 한세대에 걸친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노동과 땀의 결정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 동안의 성장요인으로 기술향상보다는 생산요소투입의 증가가, 그 중에서도 자본보다 노동의 증가가 더 크게 기여했다는 계량분석도 있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으로 싼 값의 수출상품을 만들고, 군인처럼 규율을 지키며, 중동 사막의 야간작업도 마다 않는 ‘일벌레’의 근면함이 경쟁력을 뒷받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낡은 얘기다. 얼마 전에 한국 노동연구원은 전국의 근로자 2천여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최근들어 근로의욕이 감퇴되고 있다고 대답했다. 또 요즘 불량품 생산 비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이같은 현상이 근로자세의 태만이나 기강해이 등 근로자들 자신의 작업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응답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밖에 모르고 달려온 근로자에게 일할 맛이 안나는 사태가 왜 벌어지고 있는가. ‘선진국병’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 경제연구센터의 이사장인 가나모리 히사오(金森久雄)씨는 이 병의 첫 번째 원인으로 ‘근로정신의 해이’를 들고 있다(宋丙洛, <한국경제론>241면 참조). 경제성장으로 생활수준이 올라가 일단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근로자는 노동보다 여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근로정신이 해이해진다는 것이다. 가나모리씨는 이밖의 원인으로 기업가정신의 쇠퇴, 노사관계의 악화, 정부지출의 팽창, 저축률의 저하, 문제해결 의욕의 감퇴 등을 들었다. 최근 우리 경제가 1인당 국민소득 5천달러 수준에서 조로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 선진국병의 6가지 원인들은 조목조목 우리 경제의 현재를 되새겨보게 한다.

 

근로의욕 감퇴 근본원인은 ‘무력감’

 정말 근로자들이 ‘배가 불러’ 근로의욕을 잃고 있는 것일까. 한국 노동연구원의 여론조사에서는 다른 대답이 나왔다. 응답자의 62%가 근로의욕 감퇴의 중요한 원인으로 물가불안과 투기심리의 만연에 따른 무력감을 들었다. 55%가 “열심히 저축해도 내 집 마련을 할 수 없다”라고 대답한 데서 확인되듯이 근로의욕 감퇴의 근본 원인은 ‘포만감’보다는 ‘무력감’이다.

 손에 잡히는 꿈이 있을 때 인간은 힘을 내게 마련이다. 그러나 뛰는 집값 앞에 ‘내 집 마련의 꿈’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것이 돼버렸다. 그러면 그들에게 어떤 다른 꿈이 있는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은 있는가. 여기 집값 문제 못지 않게 캄캄한 또 하나의 절망이 있다. 대학을 갈 수 없었던 많은 생산직 근로자에게는 직장에서의 승진 기회마저 거의 막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졸사원이 고졸사원에 비해 2배의 봉급을 받고, 생산직 근로자의 승진기회가 거의 없을 때 앞날에 희망을 걸고 신명나게 일할 기분이 날 것인가.

 우리나라처럼 역동적인 사회, 교육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사회도 드물다. 그러나 일단 학력이 운명처럼 정해지면 이에 의해 철저한 차별대우의 장벽에 갇히게 된다. ‘知面’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學緣은 새로운 자산이 되고 요로에 동창생들이 많이 자리잡은 명문대학의 졸업장은 인맥사회의 프리미엄을 추가로 갖는 것이다.

 

학력 불문하고 노동의 대가 공정하게 지불해야

 우리 국민의 맹렬한 교육열과 성취동기는 우리 경제를 밀고온 추진력이었다. 또 이렇게 축적된 거대한 ‘인간자본’은 우리 경제의 앞날을 기약하는 잠재력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학력에 대해서 과도하게 보상하면 너도나도 학력 쌓기에만 바쁠 것이다. 반면 노동과 노력에 대해 정당하게 보상하면 시장의 원리에 따라 ‘근면’의 공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과거처럼 노동집약적인 상품의 대량생산에 의존하던 때와는 달리 이제부터는 기술?기능 집약적인 상품생산으로 산업구조를 바꿔야 한다. 여기에는 공정기술의 향상이 필수적이고 따라서 생산현장의 기능공이 숙련도를 높이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근로자들이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기업도 경제도 발전할 수 있는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구밀도는 1㎢당 4백31명으로 세계에서 두번째이다. 산지면적이 국토의 3분의 2쯤 되니까 생활공간만 따지면 세계에서 가장 비좁게 몰려 사는 셈이다. 서울의 인구밀도 역시 1만7천3백79명으로 세계 2위이다. 좁은 공간에서는 한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이익 또는 불이익을 끼치는 외부경제 또는 외부불경제의 문제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차별의 장벽’으로 우리 사회를 칸칸이 나누어서는 ‘무력감’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갈 수밖에 없다.

 경제활동인구의 87%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경제의 활력이 되살아날 수 있을까. 학벌의 담을 과감하게 헐어낼 때이다. 90년대의 경제 번영도, 사회 안정도 여기에 크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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