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도화선에 용기의 불꽃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1.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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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사태와 方勵之 교수/미국 대사관 도피 경위는 분명치 않아

 ‘파티에 오지 못한 남자’. 89년 3월13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중국의 반체제 물리학자 方勵之교수(55)를 다룬 커버스토리에 이같은 제목을 붙였다. 그는 중국을 방문중이던 부시 미대통령이 그 전 주 그를 만찬에 초대했으나 중국정부의 제지로 끝내 참석할 수 없었다.

 당시 방려지의 파티 참석 문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떠들썩한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그것은 그로부터 세달 후 그이 미대사관 피난으로 또 한차례 격돌을 해야 했던 양국관계의 ‘전주곡’ 같은 것이었다.

 파티소동이 있었던 89년 2월26일경은 중국정국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우선 89년이라는 해 자체가 심상치 않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 해는 신중국 건설 40주년, 중국 민주화운동의 효시라는 5?4운동 70주년, 프랑스혁명 2백주년이 되는 해였다. 따라서 이미 86년의 학생 시위에서 한차례 좌절을 겪었던 중국의 반체제 세력들에게는 89년은 중국 민주화운동의 전환기로 인식될 만한 해였다.

 

문화계 저명인사 33명이 지지성명 발표

 그러나 그 해의 출발은 그리 낙관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뭔가 불길한 느낌마저 가지면서 그 해를 맞이해야 했다. 바로 그 전해인 88년말부터 강경보수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78년부터 시작돼 10여년째 진행돼온 개혁개방정책이 인플레와 부정부패의 만연, 사회기강 이완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88년말부터 사회전반에 대한 통제강화를 주장하는 보수파들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88년 9월에 열렸던 당13기 3中全會에서 경제운용권이 개혁파 趙紫陽 총서기로부터 姚依林 부총리에게 사실상 넘어가게 된 것은 보수파의 득세를 알리는 명확한 신호였다.

 따라서 89년은 점차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려는 중국권력층의 움직임과 ‘민주화운동’의 전환기로 삼으려는 민주화운동세력의 움직임이 서로를 향해 서서히 다가가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긴장된 침묵. 이 침묵을 깨고 중국정국에 일파만파의 파란을 몰고올 최초의 ‘돌’을 던진 사람이 바로 당시 북경천문대 연구원이었던 방려지 교수였다. 89년1월6일 그는 중국군사위 주석 鄧小平 앞으로 한 장의 서한을 보낸다. 이 ‘역사적인 해’를 맞이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魏京生 등 양심수들을 석방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특히 그가 여기서 이름까지 거론하며 석방을 요구한 위경생이라는 인물은 79년 북경 ‘민주의 벽’에 등소평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다가 15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된 당시 29세의 청년노동자로, 그후의 반체제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평소같으면 심상하게 넘어갔을 그이 ‘투서사건’은 예의 ‘파티소동’이 일어나기 10일 전인 2월16일 북경문화계의 저명인사 33명이 그의 서한에 지지를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확대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어 ‘파티소동’ 당일인 2월26일에는 63명의 자연과학자들이 제2의 공개서한을 발표했고 3월14일에는 학생 언론인 지식인 등 43명의 연서 서한이 등장했다.

 한편 해외의 중국 지식인들도 국내의 지식인 운동에 호응,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민주촉진연락조’라는 조직이 2월17일 미국에서 결성돼 방려지가 그 특별조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결국 그의 투서 한 장은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국민주화운동에 불을 붙인 격이 된 것이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주요 요구 사항은 신문?잡지에 대한 검열제 폐지 등 언론자유, 공산당과는 별도의 사회단체와 정당을 조직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 직접보통선거를 통한 정부 각 조직의 책임자 선출, 정치범 석방과 사사의 자유보장, 공산당과 정부조직의 분리 등이었다.

 89년초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지식인 중심의 민주화 운동은 이어 호요방 전총서기의 죽음을 계기로 거리로 진출하기 시작한 학생운동과 합류하여 5월 민주화시위의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美 대사관행 결정하면서 인간적 갈등

 이런 일련의 사태 발전에서 최초의 원인 제공자였던 방려지 교수는 그러나 5월의 학생시위와는 조직적 연계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본인 스스로 증언한 적이 있다. 따라서 그는 6월4일의 무력진압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거취에 대해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4 사태 이틀 전인 6월2일 그는 미국의 AP통신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여기서 앞으로 자신이 체포될 가능성이 50대 50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6월3일 밤부터 6월4일 새벽에 걸쳐 계엄군이 무력진압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가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게 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6월4일 당일부터 그를 줄곧 수행하며 그의 대사관행에 도움을 준 사람은 당시 미?중학술교류위원회의 북경사무소장이었던 페리 링크(Perry Link, 중국 이름으로는 林培瑞)라는 미국인이었다. 그는 6월4일 방려지와 부인 리슈산 여사, 북경대 재학중이던 차남 방철 등 일가를 일단 미국 CBS 방송국이 사용하고 있는 북경 시내의 샨데그라호텔로 피신시켰다. 다음날인 6월5일 방려지 일가 3인은 링크의 안내를 받아 북경주재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게 된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90年代>라는 잡지 89년7월호에는 당시 방려지가 미대사관 직원들과 나눈 대화가 소개돼 있다. 당시의 정황을 더욱 정확하게 살펴보기 위해 이 대화내용을 요약해보자.

 직원 : 왜 미국대사관에 들어오게 되었나.

 방 : 며칠 전에 李鵬 총리를 지지하는 관제데모가 있었는데 거기서 나에 대한 화형식이 있었다. 또 당국이 작성한 수배자 명단에 나와 나의 처가 1,2위로 올라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국에는 비밀로 하고 대사관에 며칠 동안만 묵을 수 없겠나. 분위기가 가라않으면 밖으로 나가겠다.

 직원 : 비밀 유지가 어렵다. 대사관 직원의 상당수가 중국인들이고 도청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또 일단 여기에 머무르게 되면 언제 나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방 : 그렇지 않아도 중국당국은 이번 민주화시위를 외국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는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민주화운동에 커다란 누를 끼치게 된다. 다시 밖으로 나가겠다(실제로 방려지 일가는 그날 미대사관을 나와 근처의 建國飯店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가 6월8일 다시 미대사관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최종적으로 대사관행을 결심하기까지 상당히 갚은 인간적인 갈등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방려지의 미대사관 체류로 미국과 중국은 또 한차례 맞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국제법 위반’을 지적하는 중국측의 주장과 인권보호를 내세우는 미국측의 주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러다가 미대사관 체류 3백85일만인 90년 6월25일 중국정부는 “제3국으로 갈 것, 정치활동을 하지 말 것”등의 조건을 달고 그의 해외망명을 허락했다. 그는 지난해까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방문교수자격으로 연구활동을 계속하다가 91년 1월에 미국 프린스턴대학으로 거처를 옮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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