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과 눈뜸의 원초적 기록
  • 김인환(고려대 교수 · 국문학) ()
  • 승인 1994.1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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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소설은 최인훈의 〈화두〉/인간의 심연에 도전한 ‘광장의 변주곡 ’

최인훈의 〈화두〉는 세계 이해와 자기 분석에 관련하여 가장 뿌리 깊고 오래된 층위, 다시 말하면 말하기와 글쓰기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보지 못한 층위까지 침투하려는 모험과 편력의 기록이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 막연하게나마 의식에 떠올려질 수 있었던 원초적 시간에서부터 시작하여 내적 시간관념 전체를 포착해 보려는, 어찌보면 가망 없는 시도가 〈화두〉를 형성하는 근원적 욕망이다.

 아낙네들의 무릎에도 차지 않는 키로 자기 또래의 여자 아이에게 말을 걸려던 시기는 여자 아이와 춤추기 싫어 유치원 입학식에 참가하지 않는 시기로 바뀌고, 주사를 맞으러 갔다가 만난 간호사가 작은 엄마가 되는 시기로 변화한다.  그 작은 엄마에게 만화를 읽어 달라고 조르는 장면은 평생토록 따라다니는 운명적 인연을 미리 보여준다.

 국민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 1학년까지를 보낸 H읍과 W시에서, 그리고 대학 시절과 군대 시절을 보낸 서울과 대구에서 그 운명은 책읽기와 글쓰기와 현실의 엇갈림으로 확대된다.  국민학교 때 〈쿠오바디스〉를 읽은 아이는 마흔의 나이가 되어서도 새 책을 찾아 헤맨다.  마흔 넘은 나이에 미국에서 〈화두〉의 주인공은〈자본론〉의 첫 권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셋째권을 영어로 읽는다.  〈화두〉는 어떤 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실험이 드러낸 영광과 비참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해를 표명한 기록이며, 동시에 프루스트의 소설처럼 글을 쓰려는 결의로 종결함으로써 마무리가 곧바로 들머리가 되는 기록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W시의 고등학교 1학년 때 조명희의 소설〈낙동강〉을 읽은 감상을 한편의 소설처럼 읽어내서 국어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는다.  공동체적 감정, 공명의 폭을 지닌 감정을 체험한 환희는 이 책의 주인공에게 작가의 길을 가리켜 준다.

감상문을 소설로 얽어짠다는 것은 의미를 밝혀내는 행위가 아니라 의미에 개입하는 행위이다.  텍스트의 의미 작용을 또 하나의 다른 텍스트로 변형하는 대항적 글 읽기야말로 의미나 해석보다 기록된 것 자체를 중시하는 창작 행위이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미국에서도 소련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책 속으로 들어간다.  도서관은 한 권의 큰 책이고 세상은 하나의 큰 도서관이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생겨난 현실과 책읽기와 글쓰기 사이를 잇는 실핏줄은 기억의 가장 심층에 있는 리얼리즘이며 새 책을 세상의 도서관에 첨가하게 하는 창조의 아기집이다.

 〈화두〉는 〈낙동강〉에서 시작하여 〈낙동강〉의 인용으로 끝나며, 조명희의 편력에 감추어진 의미를 탐색하는 도정이 바로 〈화두〉의 구성이 된다.  조명희뿐 아니라 그는 이용악과 박태원과 임 화를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기술한다.  그들의 몸부림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이 땅의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하려는 듯이다.  이용악의 〈오랭캐꽃〉과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임 화의 〈근대 문학사 에세이〉를 그는 우리가 20세기 전반기에 성취한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한다.  그와 그들의 사이에는 실핏줄이 통하고 있다.  〈낙동강〉의 인물들인 박성운과 로자 또한 늘 그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화두〉에는 또 하나의 원초적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처음부터 냉혹하고 가차 없는 논리를 따라 진행된다.  그것은 중학교 2학년에 겪은 자아비판회 사건이다.  그 자리에서 〈화두〉의 주인공은 변호인 없이 지도원 선생과 친구들에게 추궁된다.  학교의 첫인상이 어수선했다는 사소한 기록을 구실 삼아 그를 학교 신문 주필에서 몰아내려는 짓이었다.  ‘기록은 자아비판을 강요 당한다 ’는 악몽이 평생토록 그의 뇌리 속에서 그를 고문한다.  완강하게 버텨야 한다는 것, 최후의 순간까지 자기를 검증하고 실수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그 후로 그의 집념이 되었다.

 〈화두〉의 모든 기록에는 스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입증하되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흔적으로서만 자신을 입증하는 원초적 기록이 있다.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논리들도 그 단초적 사건에 부딪치면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가 아무리 주체의 자기동일성을 지키려 해도 그 원초적 장면이 의미를 왜곡하고 굴절함으로써 〈화두〉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 자기 영혼의 독백을 완전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 사건 이후로 그에게는 신이라든가 이데아라든가 자연 상태라든가 하는, ‘변질되지 않은 있음 ’의 상태가 소멸하였다.  자명하다고 느껴졌던 논리가 그 논리와 맞지 않는 어떤 다른 것의 흔적 속에서 파괴된다.

 자아비판회는 한 때는 현재였던 과거를 넘어서 비자기반성적인 절대적 타자성으로, 그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원초적 장면의 습격은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취하고 언제나 새로운 길을 밟는다.  미국과 소련에서 낯익은 것들과 낯선 것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조명희에 비추어 자기를 반성한다.  자연 구성체와 사회 구성체와 생명 구성체를 구분함으로써,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해설하는 부분은 이 소설의 가장 정채 있는 대목이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후 1주일 만에 그는 〈화두〉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러시아의 실험을 이해하고 그 실험의 실패를 안타까워하는 데 이르는 일종의 눈뜸은 육십에 이르도록 버텨온 지도원 선생님과의 갈등이 상호 인정과 사호 승인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광장〉과 〈화두〉의 주제는 동일하지 않으나 그것들의 효과는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인환(고려대 교수 ·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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