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총회’의 두 얼굴 한국
  • 제네바· 이성훈 (인권운동 사랑방 국제연대실장) ()
  • 승인 1995.02.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엔 인권위 참관기 / 정신대 여론화 성공, ‘불법 구금’ 오명

해마다 1월 말이 되면 인구가 30만이 채 안되는 제네바 마을(Ville de Geneve)에 상주하는 외교관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1월 말부터 6주간 일정으로 유엔 인권위원회(UNCHR)가 열리기 때문이다. 유엔 창립 직후인 46년 만들어진 인권위의 회원국 수는 처음 18개국에서 시작하여 현재 53개국에 이르렀다. ‘축소판 유엔 총회’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인권위는 인권에 관한, 또는 인권과 연관지을 수 있는 전세계의 모든 문제를 다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문제를 다룬다. 바쁘기는 유엔에서 NGO라고 불리는 민간 인권 단체들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민간 단체들은 자국 또는 특정 인권문제를 인권위에서 어떻게 제기해야 할지 준비하느라, 각국 정부는 자국의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방어’할 전략을 마련하느라 바삐 움직인다.

지난 1월30일 51차 인권위가 막을 올렸다. 첫 주에 다루어진 팔레스타인 인권문제와 자결권에 대한 토론에서, 일부 국가들은 인권 피해자의 인권 보호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 증진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옹호하기에 급급했다.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의 ‘설전’, 동티모르 문제를 둘러싼 인도네시아와 포르투갈의 상호 비방, 타밀 문제에 대한 스리랑카 정부의 입장 그리고 티베트 문제 관련 중국의 일부 인권단체에 대한 비난 등은 과연 이번 회의가 인권 회의인지 아니면 인권을 명분으로 한 일부 국가의 외교 전투장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인권위에 대한 관심 점차 높아져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여 일부 사람들은 인권위를 ‘인권 정치포럼’또는 ‘인권 주식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제정치적 상황에 따라 어떤 나라에 대한 논란거리가 ‘상한가’를 기록하는가 하면, 일부 국가와 지역의 인권 침해가 매우 심각한데도 ‘장외’로 사라지기도 한다. 80년대 말 이전, 즉 냉전 시대에 동서로 나뉘었던 세계가 유일하게 한 목소리로 비난할 수 있었던 인권 침해 문제는 남아공의 인종 차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이란-이라크 전쟁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에 이 세 가지만이 유일한 인권침해 사례는 결코 아니었다. 이밖의 인권 문제들은 동서의 이념대결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90년대 들어와 냉전이 끝나면서 과거의 ‘동서’ 대결 구도는 ‘남북’ 대결 구도로 대체되었다. 표면상 집단적이며 경제적 권리를 중시하는 남과, 개인적이며 정치적 권리를 중시하는 북의 갈등이 그것이다. 남은 북, 즉 서방 국가들이 주장하는 인권의 보편성이 서구적 가치인 유대 그리스도교 문명의 가치에 불과할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 이를 다른 나라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인권의 이름을 빌린 또 다른 제국주의라고 크게 반발한다.

이유와 동기가 서로 다르지만 정부와 민간 단체 모두 최근 유엔의 인권기구, 특히 인권위원회에 점점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다수 정부가 탈냉전 시대에 급속하게 진행되는 세계화 추세 속에서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무시하고서는 국제 사회에서 제 구실을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인권이 한 국가의 정치적 이익과 밀접하게 관련됨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 · 중국 등 강대국들은 3년 임기에도 불구하고 거의 반영구적으로 회원국 자리를 차지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91년 유엔에 가입한 직후인 92년 회원국에 피선된 한국은 올해 임기가 끝나지만 재선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권위에 대한 이러한 관심을 곧바로 인권 자체에 대한 순수한 관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민간 인권단체에게 인권은 지고한 보편적 가치이지만, 외교관에게는 단지 정치와 외교의 한 변수이자 일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이 정치에 오염되어 가는 것을 우려하는 민간 단체들은 유엔 인권기구의 역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결국 각 나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유엔이, 막대한 비용을 써가면서 세계의 인권 보호와 증진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것이 거의 없다는 혹독한 평가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권위가 전혀 쓸모가 없으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나마 인권위라도 없으면 전세계의 많은 인권 문제를 책임있게 논의할 장이 아예 없어지기 때문이다.

비록 투표권은 없지만 국제사면위원회(AI)나 국제법률가위원회(ICJ) 등 국제적인 인권단체 대표의 발언은 인권위에서 상당항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런 단체들은 국익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인권 피해자를 대변하여 때로 특정 국가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이들이 지닌 도덕적 권위 때문에 대부분의 정부들은 이들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황석영씨 등 3명 보고서 명단에 올라

유엔 인권위가 다루는 문제는 해마다 증가해 왔다. 새로운 인권 침해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의제가 추가되고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다루어진 문제는 팔레스타인과 남아공의 인종 차별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가장 많은 결의안과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남아공에 만델라 흑인 정부가 들어서고 팔레스타인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이에 대한 관심사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옛날 같으면 앞을 다투어 발언하려는 정부와 민간단체의 명단이 가득했었는데 올해는 발언자가 없어 예정된 회의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졌고, 심지어 두 항목을 내년에는 의제에서 제외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한국 정부는 셋째 날 제네바에 주재하는 허 승 유엔대사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 해결노력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인권위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 인권위에서 한국과 관련해서는 정신대 문제가 가장 큰 논란거리이다. 92년 8월 인권소위에 처음 공식 제기된 정신대 문제는, 이제 인권위에서 널리 알려져 단기간에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전개한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인권위에 제출된 ‘여성폭력에 관한 특별보고관’의 1차 보고서는 정신대 문제를 ‘국가에 의한 폭력’ 사례로 크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불명예스럽게 자의적(불법) 구금 실무분과의 보고서에 또 등장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자의적 구금은 고문과 함께 한 나라의 시민정치적 인권 수준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척도이다. 작년에는 홍근수 목사와 장의균· 황대권· 김성만 4명이 실렸는데, 올해의 보고서에는 황석영· 이근희· 최진섭씨 3명의 명단이 올라 있다. 회의 일정에 따르면 정신대 문제는 2월 20~21일 항목 11에서, 자의적 구금은 14~16일 항목 10에서 다루어진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인권과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펴기로 공언한 바 있다. 최근에는 세계화를 내세우며 유엔 안보리, 세계무역기구 등 국제 기구에 적극 진출하려고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른바 한국의 ‘인권 외교’가 일본처럼 서방의 등에 기대어 ‘돈 내고 이름만 빌려주는’ 수준을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다.

- 제네바· 이성훈 (인권운동 사랑방 국제연대실장)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