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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일본인의 과거 반성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

<시사저널> 초청 오에 겐자부로 강연 요지

정리· 김현숙 차장대우 ㅣ 승인 1995.02.16(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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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는 지난 2월4일 교보빌딩 10층에서 <시사저널>과 교보문고 독자를 상대로 공개 강연회를 가졌다. 그는 강연 후에도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 등에 대한 방청객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해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강연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편집자>

방금 사회자가 저를 소개하면서 제 아들 얘기를 하셨습니다. 제 아들 히카리는 태어날 때부터 치명적인 장애가 있었습니다. 머리에 혹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의사는 이것을 떼어내지 않으면 살 수 없으며, 식물 인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젊은 아버지였던 저는 이런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거기에는 저의 에고이즘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재기하느냐, 저는 이 문제를 소설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후일 그것 역시 저의 에고이즘이요 잔혹성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저 개인의 에고이즘일 뿐 아니라 일본인의 에고이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가 태어난 것은 저에게 큰 경험이었지요.

떠나온 날 아들이 사물놀이 리듬 들려줘

제 아들은 이미 서른두 살이 되었습니다. 언어 능력은 서너 살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대신 음악을 만들고 있습니다. 음악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능력은 대단합니다. 음악을 통해 지난 일을 모두 회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제가 한국에 올 때 자기를 데려가지 않는다고 무척 화를 내더군요. 스톡홀름에 가라 때는 동행했었거든요. 어찌나 화가 났는지 제 얼굴만 보면 고개를 돌릴 정도였습니다(웃음).

그런데 떠나오는 날 아침이었습니다. 제가 6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있는데 히카리가 벌써 일어나 식당 옆 피아노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아이는 원래 10시쯤 일어나는데 그 날은 그렇게 일찍 일어나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잘 잤느냐고 물었더니 대답 없이 짧은 곡을 치기 시작하더군요. 무척 특이한 리듬을 가진 곡이었어요.

그 때는 히카리가 무슨 생각으로 그 곡을 쳤는지 미처 알지 못했으나, 한국에 와서 며칠 지나자 그 곡이 무슨 곡인지, 왜 그 곡을 들려주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 피아노곡은 바로 사물놀이의 타악기 리듬과 새소리를 이용해 만든 곡이었습니다. 일본에는 없는 리듬이지요.

20년 전 저희집에 한국 손님이 한 분 오신 일이 있습니다. 신문기자이자 작가인 선우휘씨였는데 제 아들이 장애자라는것을 알고 귀국한 후 판소리 레코드판을 하나 보내 주었습니다. 한국의 여자 명창이 연주한 <춘향가>와 <새타령>이 담긴 레코드였습니다. 조금 후에 말씀드리겠지만 새소리는 우리 아이에게 매우 중요한 소리입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아버지와 한국에 동행하고 싶었으나 말로는 못하니까 화를 낸 것인데, 그 날 아침 화낸 것을 뉘우치고 곡을 하나 만들어 아비를 격려한 것입니다. 어제 히카리가 골든 디스크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전화했더니 “히카리가 화낸 이유를 알겠느냐”고 아내가 묻더군요.

히카리가 다섯 살 때 한국 요리를 자주 먹으러 다닌 일이 있습니다. 장애자가 다 그렇듯이 우리 아들도 음식점에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는데 주인들은 으레 훼방꾼이 왔다고 거부하고 차별합니다. 그런데 그 한국 음식점 주인은 우리에게 정말 친절했어요. 그 때 이미 나이 60이 넘은 노인이었으니, 일본이라는 나라 때문에 쓰라린 일을 겪기도 했을 텐데도 말입니다. 애들이란 마음에서 우러난 친절인지 겉으로만 친절한 것인지 금방 아는 법이지요. 저는 매주 토요일이면 히카리를 자전거에 태우고 그 집에 족발을 먹으러 갔습니다. 우리는 늘 족발 하나를 접시 두개에 나눠 먹었는데 히카리가 한 접시를 다 먹으려면 한 시간도 넘게 걸렸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늘 웃는 얼굴로 대해 주었습니다.

히카리의 귀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어느 해 함께 산에 올라간 일이 있는데 새소리가 들렸습니다. 히카리는 새소리를 아주 좋아합니다. 집에서도 새소리 레코드를 즐겨 들었지요. 새소리를 들려준 후 ‘이것은 무슨 무슨 새소리입니다’하고 가르쳐 주는 레코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날 산에 올라 어떤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던 히카리가 무심결에 “구이나데스(구이나 새소리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아들이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라다 보니까 지금 공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다시 한번 그 말을 한다면 공상이 아니겠지 하고 기다렸습니다. 아들도 약간 긴장한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 우리 아들이 다시 한번 “구이나데스” 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그 최초의 “구이나데스” 그리고 두 번째의 “구이나데스”는 제 마음 속에 어떤 충격을 던져 주었습니다. 저의 기원, 내 아들에게 구이나데스를 다시 한번 발성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희망하는 것, 이것은 바로 제가 소설을 쓰는 일과 똑같습니다.

저는 전쟁중에 태어났습니다. 패전 때까지 곡 10년을 살았지요. 그리고 전후의 가난한 생활과 고도 경제성장도 모두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제 문학도 처음에는 아이들이 어떤 고통과 기쁨을 겪는가에 관한 것이었고, 그 후에는 미군 점령하의 청년들이 어떤 고통과 희망을 가졌는가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원래 프랑스 소설과 영· 미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참된 일본인의 생활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닌가’하는 자각이 생겼습니다. 영· 미 시의 이미지와 느낌으로 프랑스 소설을 모방한다는 벽에 부딪혔던 것이지요. 그 때 바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저와 아내는 그 어두운 운명에서 도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와 함께 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개인적 체험을 통해 소설가로서 저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이 성장하면서 문제가 자꾸 생긴 것입니다. 혼자 놔두면 위험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곤란을 이기면서 조금씩 제 소설이 바뀌어 갔습니다.

4백 년간 제 조상이 살아온 고향에서 도쿄로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만큼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는 곳이지요. 고향 마을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들려 주시던 전설과 신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키나와와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쿄 중심의 가치 체계와 사고 방식은 그들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특히 오키나와와 한국 문화는 매우 민중적이고 기품이 있습니다. 도쿄 중심의 가치관을 갖고 있던 제게 특히 김지하의 글은 하나의 광명이었습니다.

“나같은 일본인 있다는 것 알리고 싶어 왔다”

인간의 육체와 새 생명 창조, 민중 축제의 건강한 웃음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저는 새로운 작가로 변신했습니다. 동시에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일본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자로서, 아시아에서 일본이 참다운 아시아인으로서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가, 전쟁 때 저지른 과오를 되풀이하려는 것은 아닌가를 검증하고 싶었습니다.

5년 전 NHK와 함께 <세계는 히로시마를 기억하고 있는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처음 한국에 왔습니다. 전쟁의 책임이 일본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원폭 희생자로서의 공감과 연대는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당시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지요. 김지하씨는 그런 저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당신네의 그 프로그램 제목부터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세계는 남경대학살· 정신대· 강제징용 그리고 피폭자의 순으로 기억하는가’ 하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일본은 무엇보다 과거를 청산하고 도덕적 순결성을 회복해야만 세계인으로서 그리고 아시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서울의 한 온돌방에서 김지하씨와 대담하면서 저의 고개는 점점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생각하는 일본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일본 총리는 최근 “일본은 전쟁에 졌지만 아시아에 뭔가 공헌했다”는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모두 반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일본 소수파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는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저지른 과오의 죄과는 아직 보상되지 않고 있다. 흉한 일본인, 잔혹한 일본인, 자기중심적인 일본인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본인으로서 다시 태어나려 하지도 않고 있다’고. 이 모든 변화가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보상금처럼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풀리겠지요. 그러나 일본인이 근본적으로 과오를 청산하고 한국인으로부터 경멸과 미움을 받지 않는 인간으로 재생할 수 있는가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제 인생에서도 가장 큰 문제입니다.

침략자가 아니라 친구로서, 한국· 중국· 북한과 함께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일본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 문제를 잘 알고 있다면 손을 잡고 나아갈 희망이 있지 않을까, 이 말씀을 드리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아직까지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지만 ‘너희들 마음은 이해하겠다’ ‘청산하겠다는 말을 믿겠다’는 말이 한국에서 들려온다면 정말 큰 격려가 되겠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후 왜 한국을 첫 방문지로 택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습니다. 일본인들도 묻고 한국인들도 물었습니다. 이제 제 마음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 정리· 金賢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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