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科搜 끼면 무죄도 유죄된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2.03.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허위감정 때문에 패가망신” 피해 호소 급증…‘고소사태’ 벌어질 듯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문서 허위감정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아마도 세월이 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모양이다. 검찰은 지난달 16일 “김형영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이 돈은 받았지만 허위감정한 사실은 없다”고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수사결과만을 발표하고는 사실상 수사에서 손을 뗀 상태이다. 그런가 하면 국과수의 입장은 느긋해보이기까지 한다. 국과수의 한 중견간부는 국과수의 사후 대책을 묻자 “다른 일도 많을텐데 이미 다 끝난 사건에 대해 뭘 자꾸 관심을 갖는가. 국과수의 공신력이 더이상 실추되면 사법질서는 엉망이 된다. 언론도 이제부터는 국과수의 공신력을 회복시키는 쪽으로 보도의 방향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라고 점잖게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이나 국과수가 바라는 대로 여론은 쉽사리 잠잠해질 것 같지는 않다. 특히 국과수의 감정 때문에 재판에서 패소한 사람들은 잇따라 국과수 관계자들을 허위감정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허위감정피해자대책협의회(가칭)를 구성해 집단행동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 의료분쟁사건에 있어서 국과수의 감정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온 의료사고가족협의회도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태세를 보이고 있어 국과수에 대한 비판은 문서분야뿐 아니라 각 분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28~29쪽 기사 참조).

 국과수나 사설감정원의 허위감정으로 인한 피해를 조사하고 있는 소비자운동본부 박미원 본부장은 “법조계에 비리가 만연해 있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이번 국과수 사건으로 인해 그것은 명백한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국과수 사건이 터지면서 소비자운동본부에는 억울한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쇄도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우리 같은 비전문인이 보기에도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당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많다”고 예기했다.

 현재 국과수나 사설감정원의 허위감정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소비자운동본부에 신고해온 사람은 모두 1백여명에 달한다. 하루 5~6건씩은 접수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피해신고 사례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물론 개중에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 패소한 송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뒤집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대부분은 “무얼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있기는 너무나 억울하고 복장이 터져서” 찾아오는 사람들이다.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듣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저 촌지만 받았다는 것 아닙니까. 검찰이 국과수의 허위감정으로 인해 힘없는 한 개인이 얼마나 철저하게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가를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감히 그런 발표를 하지 못햇을 겁니다.” 지난 86년 청소대행업 회사를 경영하다 동업자들이 자신의 인감이 위조되지 않았다는 감정을 하는 바람에 패소한 ㅇ씨(50·서울 도봉구)의 말이다.

소송 제기했다 무고죄 뒤집어쓰기도
 ㅇ씨는 “제가 의뢰한 몇 군데의 사설감정원에서는 모두 인망이 위조됐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어느 곳이 어떻게 틀리기 때문에 진짜 인감이 아닌 것 같다는 소견을 곁들여서 말입니다. 그런데 유독 국과수만이 같은 인감이란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것도 납득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도 곁들이지 않고 말입니다. 국과수의 감정은 근무태만의 결과가 아니면 허위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ㅇ씨는 몇년 동안의 송사끝에 집마저 날리고 아내까지 가출하는 바람에 현재는 6남매를 데리고 드림랜드 뒷산에서 천막을 치고 어려운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소비자운동본부에 피해를 호소해온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대부분 전재산을 날리고 직장을 잃었으며 가정마저 파탄나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미친사람처럼 송사에 몇년씩 매달리다 보니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법원이나 경찰 등으로부터는 이른바 ‘고소꾼’으로 찍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기도 한다. 실제 이들 중에는 대법원장·검찰총장 등 20여명을 마구잡이로 고소한 사람도 있다.

 소비자운동본부 박미원 본부장은 “그들을 처음 접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정신나간 사람들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심신이 황폐해져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차분히 그들과 접촉하고 나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과오가 있고 그 사실이 국과수에 의해 밝혀진 것이라면 그들은 그 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결백을 믿기 때문에 미칠 지경이 돼버린 것입니다”라고 얘기했다.

 허위감정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 중에는 소송을 제기했다가 무고혐의로 옥살이를 한 사람도 많다. 84년 당시 서울 ㅅ전문대 교수로 있던 ㅎ씨는 13세 난 아들이 집앞에서 차에 치여식물인간이 된 불행을 당했다. ㅎ씨의 주장에 따르면 ㅎ씨의 아들을 친 사람은 정부 모 부처장의 비서실장으로 부처장을 태우고 골프를 치러 가던 길이었다.

 처음에는 아들이 깨어날 줄 알고 적은 액수로 합의를 했는데 아들이 깨어나지 않아 다시 2천만원을 받기로 합의하고 무인을 곁들인 각서를 받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증인까지 내세워 무인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합의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자 ㅎ씨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는데 국과수에서 ‘감정불능’ 판단을 내리는 바람에 패소하고 말았다. ㅎ씨는 민사에서 패소한 뒤 증인들을 위증죄로 고소했다가 무고죄로 9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저는 소비자운동본부에 와서 저와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국과수의 감정은 재판의 방향을 교묘하게 변질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민사소송에서 형사소송으로 변하고 끝내는 피해자가 무고죄에 걸려 가해자로 둔갑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상대방은 대부분 꾼들이거나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순진한 피해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미리 다 짐작하고 손을 써서 피해자가 다시는 어쩌지 못하도록 치명타를 가하는 것입니다.” ㅎ씨의 말이다.

 실제로 허위감정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상대방 가운데는 상습적으로 송사를 일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ㅎ씨처럼 송사를 벌였다가 무고죄로 형을 산 ㄱ씨는 “이번에 구속된 이세용씨처럼 법원 주변에는 밥먹듯 송사를 벌여 선량한 시민을 울리는 꾼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판사나 검사와 송사를 벌여도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그같은 전문위조단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고 말았지요. 그러고는 언론에 국과수의 비리를 제보한 조병길씨를 엉뚱한 혐의로 구속하지 않았습니까.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리는 전형적인 수법이지요.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왜 국과수 감정결과만 증거로 채택하는가
 국과수의 감정결과만을 가장 믿을 만한 증거로 채택하는 법원과 검찰의 태도도 이들에게는 큰 불만이다.

 82년부터 토지관련 소송을 벌이고 있는 ㅇ씨(경기도 파주군)는 “법원에서는 국과수의 감정 외에 다른 정황은 도무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의 경우 7년의 송사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기 직전이었는데 상대방에서 내가 자필로 제출했다는 소취하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승소를 목전에 두고 소를 취하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법원은 그런 사정을 무시하고 국과수에서 ‘감정불능’ 판정을 내리자 그것만을 근거로 상대방을 무혐의 처리했다. 그래서 국과수만 끼면 살인죄도 면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라고 분개했다.

 실제로 허위감정 피해 신고사례 중에는 도대체 당사자가 왜 그렇게 상대방과 불리한 계약을 맺었는지, 또 왜 그렇게 헐값에 땅을 팔아넘겼는지 다져보지 않고 국과수의 감정결과만 가지고 판결을 내린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유서대필 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강기훈씨측에서도 3월5일경으로 예정돼 있는 항소심에서 국과수의 공신력 문제를 집중 거론해 검찰에 반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나달 27일 발족된 ‘강기훈끼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김형영씨를 허위 감정혐의로 고발하는 것을 검토, 준비하는 한편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검찰의 검은 기도에 맞서나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허위감정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별로 많은 것 같지 않다. 박성민 변호사는 “재심을 청구하려면 감정인을 고소해 허위감정을 했다는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현재 검찰의 태도로 봐서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현재 법조계에서는 구제받아야 할 사람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고 얘기했다.

 결국 검찰이 내부의 비리를 파헤치고 개선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피해자들은 “한강 다리 난간 위에 올라가 자살소동이나 벌이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얘기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