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 결산 좌담
  • 정리·문정우·박성준·허광준 기자 ()
  • 승인 1992.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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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지역감정 해결이 과제”



“문민정치 시대 개막”…“관료사회 개혁·국민 대화합 도모해야”

孫鶴圭(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사회) : 말도 많았던 대통령 선거가 막을 내렸습니다. 김영삼 후보가 42%라는, 예상보다 훨씬 웃도는 득표를 해 당선자로 확정됐습니다. 선거전은 처음에는 3자대결, 나중에는 양김대결로 압축됐다가 결국 김영삼 후보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이제는 지난 선거를 차분히 돌아보고 새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와 한국 정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朴贊郁(서울대 교수·정치학) : 김영삼씨가 3파전에서 42%를 얻었다는 것은 낙승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김대중씨가 34%를 얻은 것도 선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상과 많이 어긋난 것은 정주영씨가 저조했다는 점입니다. 선거운동 기간 초반에 정주영씨에 대한 지지는 급격히 상승했으나 중반 이후 정체했습니다. 이른바 ‘정주영 변수’는 결과적으로 근거가 있었던 셈입니다. 김영삼씨가 낙승한 데에는 정주영씨가 16%밖에 얻지 못한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번 선거결과 나타난 특징 중에서 지역주의 투표행태가 부각되었다는 점을 제일 먼저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산과 경남이 김영삼씨를, 광주와 전남북이 김대중씨를 열렬히 지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후보자가 없어 분산되리라 여겨졌던 대구·경북 표가 결국 김영삼씨로 돌아선 것은 지역주의의 단적인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지역주의의 실체는 기본적으로 호남 대 비호남 구도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역감정 유발이 자제되었는데도 지역주의가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안정지향의 보수주의적 투표 성향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인 민주당까지도 ‘뉴 DJ 전략’을 시도할 정도로 선거 분위기가 안정 지향으로 흘렀습니다. 이 점은 구시대적이고 소모적인 ‘색깔론’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서울 강남지역에서 김영삼씨 지지도가 높았다는 것은 중산층의 보수화 경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전통적인 여촌야도 경향이 많이 약화됐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호남을 제외하면 여당인 민자당 후보에 대한 지지가 도시·농촌과 관계없이 높았습니다.

李三悅(숭실대 교수·철학) : 큰 흐름에 비춰본다면 14대 대선의 진정한 의미는 양김씨 가운데 누가 이겼느냐 하는 점보다는 국민 모두가 ‘양김씨 민주화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인 듯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양김씨가 얻은 지지율을 합치면 76%가 되고 기타 후보들의 표를 포함하면 80%를 상회합니다. 이것은 국민이 더 이상 군사정부나 독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지난 60년의 4·19 이래 줄곧 지향해 왔던 ‘문민정치 시대’의 막이 열린 셈입니다. 이번 대선의 또 한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한국 정치사엔 비약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선거 분위기도 차분해 비교적 흑색선전이나 중상모략이 통하지 않았고 금권선거 논란도 있긴 했지만 결국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번 선거는 국민의 의식수준이 한걸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책대결엔 실패, 정당정치 가능성 보인 선거”

손학규 : 김영삼씨가 김대중씨나 정주영씨와 다른 점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을 보는 것이 이번 선거를 평가하는 데 중요합니다. 김영삼씨는 결국 기득권세력을 등에 업고, 혹은 등에 업혀 집권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번 선거는 객관적으로 볼 때 지역주의가 판가름했지만 그렇게 된 저변에는 기존 체제의 유지를 바라는 유권자들의 심리가 깔려 있었다고 봅니다. 투표율만 보더라도 지난 대선에 비해 현저히 낮지 않았습니까. 변혁을 추구하는 젊은 계층이 선거에 관심을 잃은 결과라고 봅니다. 김영삼씨나 김대중씨나 모두 급격한 체제의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존체제의 유지를 바라는 사람들 눈에는 김영삼씨의 노선이 적당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삼렬 : 김영삼씨가 총선에서보다 높은 지지율을 확보하면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념이나 색깔 때문이라기보다는 ‘지역성’이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념이나 색깔을 중시했다면 가령 강원도에서 김대중씨 표가 더 많이 나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부권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정책대결에는 실패한 선거가 됐지요. 서울 지역을 자세히 살펴봐도 강남을 비롯한 중산층 거주지역에서는 김영삼씨가 앞섰지만 변두리에서는 김대중씨가 앞섰습니다. 이것을 계층의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변두리 지역엔 아무래도 호남출신들이 많이 몰려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서울에서도 계층 선호도보다도 지역 선호도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느낌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후보들 간의 차별화 기준은 역시 민주화투쟁 경력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주영씨를 버리고 양김씨를 택했다는 점이 그것을 반증합니다. 두번째가 바로 지역을 중시했다는 점입니다.

박찬욱 : 반양김 정서는 분명히 있었으나 투표 결과는 결국 양김에 대한 선택으로 귀결됐습니다. 국민당은 이러한 반양김 정서에 편승하려 했으나 유권자들에게 대안으로 인식되지 못했습니다. 이번 선거는 문민정권 탄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야당 대표였던 김영삼씨가 군부가 주도하는 정당에 들어간 데 도덕적 명분은 없으나 정치적으로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3대 선거에서 김영삼씨를 지지한 것은 화이트칼라 중심의 교육받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번에 김영삼씨는 노태우 대통령의 지지표를 절반 이상 장악했는데 이 지지표의 특징은 나이는 많고 교육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김영삼 지지표도 있었으니 득표율이 40% 이상이라는 것은 3당합당으로 지지기반이 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대구·경북 표가 김영삼씨에게 갔다는 것은 TK 세력이 여전히 지배세력으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김영삼씨가 민주화를 추진해 나가는 데 구조적인 제약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투표율 82%는 낮은 것이 아닙니다. 투표율이 높았더라도 민주당에게 유리했으리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기권한 사람은 반김 정서를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김대중씨는 얻을 만큼 얻은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후보자를 결정하는 데 기준이 될 만한 쟁점이 이번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민자당의 정국안정, 민주당의 정권교체, 국민당의 경제도약 같은 상징적인 것이 전부였습니다.

손학규 : 이번 선거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한걸음 더 진전했다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이번에도 지역주의가 여전함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김영삼씨와 김대중씨가 근본적으로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출신지역이 다르다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호남·영남을 중심으로한 지역주의는 앞으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꼭 뛰어넘어야 할 장벽입니다.

이삼렬 : 동감입니다. 13대 대선 때보다 긴박감이 훨씬 덜 하긴 했지만 투표율 82%는 대단한 수치입니다. 과거에 관권을 동원해 투표율을 끌어 올리는 등 투표율이 국민의 정치참여 수준을 정직하게 반영하지 못했던 점에 비춰본다면 결코 낮은 참여도가 아니지요. 이번 대선에서 부산·광주·경남·전남의 투표율이 오히려 올라간 것이 그것을 반증합니다.

박찬욱 : 경찰이나 일선 행정기구의 선거 관여는 많이 줄었다고 할 수 있지만 언론보도, 현대 비자금 수사 등 좀더 구조적인 부분에서는 정보기관 등의 영향이 전혀 없었는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영향력은 세련되게 행사되므로 일반 국민은 알기가 쉽지 않죠. 그러나 이들은 정치 흐름의 방향을 다르게 만들 만큼 큰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중립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임기말에 관료조직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다는 점도 있습니다. 직업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형식상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중립내각은 김영삼씨를 크게 도와준 셈입니다. 대통령의 탈당과 중립내각의 출범으로 김영삼씨는 손쉽게 차별성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김영삼씨는 민자당의 실정과 분리되어 야당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죠. 선거는 기존 여당의 정책 수행에 대한 평가의 의미가 있는데 중립내각 덕분에 실질적 여당인 김영삼씨도 야당처럼 되어 책임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이삼렬 : 역시 과거보다는 공정한 선거가 이뤄졌습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관권개입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등 선거절차 또는 선거문화가 발전했다는 점도 인정됩니다. 그러나 엄정한 의미에서 “공정했다”고 판단하기에는 의문이 있습니다. 후보들이 저마다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판단할 정도로 비대해진 언론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지요. 그런 점에서 일부 언론이 특정 후보에 대해 편파적이었다는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관권개입 문제도 행정조직을 동원한 노골적인 형태는 사라졌으나 현 정부의 의지를 은근히 관철시킨 흔적이 보입니다. 가령 민자당의 경우만 하더라도 김영삼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제2, 제3의 후보들을 차단하는 등 중립의지와 배치되는 현상들이 나타났지요. 개정된 선거법도 될 수 있는 대로 선거운동을 제약하고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선거운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고서도 의혹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점도 국민들의 의식을 흐리게 했습니다. 앞으로 개선해야 할 문제입니다.

 

“관권 줄었지만 권위시대 관성 여전”

손학규 : 이번 선거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관권의 개입이 적었다고는 하지만 권위주의 시대의 관성은 여전히 남아 선거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부산기관장회의, 현대에 대한 편파수사 등이 그 실례이지요. 중립성이 공직자들의 몸에 배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또 노태우 대통령도 엄정한 중립을 지켰는지 의문입니다. 투표라는 것은 현 정권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한데 노대통령은 탈당을 함으로써 6공화국의 경제실책과 김영삼 후보를 단절시켰거든요. 노대통령의 탈당은 그 의도가 어떻든 민자당이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됐지 손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이삼렬 : 야당 후보들로서는 선거정국 전반에 흐르고 있는 보수적 성향, 국민들의 불안심리 등을 얼마나 극복하느냐가 이번 대선의 초점이었습니다. 사실 안정을 주장한 김영삼씨 우세론은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공식화됐던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김대중씨의 경우 유세나 텔레비전 연설 등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점을 강조했지만 전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주장을 밝힐 기회를 얻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정치전략이나 선거전에서는 근거없는 소문 한마디가 실제 상황만큼 효과를 거두는 법입니다.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면서도 그 진위를 공명정대하게 가리지 않은 점은 매우 유감스런 일입니다. 차기정권은 언론문제와 더불어 바로 이 부분을 개선하는 데 주안점을 둬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찬욱 : 텔레비전 토론은 선거법상 해당 조항이 애매하지만 방송사가 적극 추진했더라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일 민주·국민당 양당만의 토론이라도 추진했더라면 민자당이 따라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방송사의 속성이 큰 문제였지만 결국 문제의 책임은 텔레비전 토론을 꺼린 민자당이 져야 할 것입니다. 민자당 입장으로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서 앞선 것으로 나오는 터에 굳이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선거운동은 민주당이 상대적으로 깨끗하게 진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자당에서 민주당과 전국연합의 정책연합을 문제삼은 것은 득표에는 도움이 됐는지 모르나 올바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보세력이 선거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대승적으로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국민당은 경제적 이슈가 희석되자 민자당 비방이라는 부정적 캠페인에 치중했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국민당에 비판적이지 않던 유권자도 비난의 소리를 높이는 정주영씨를 보며 등을 돌렸던 것이죠. 민자당의 민주산악회나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나사본), 국민당의 현대그룹 등 사조직도 두드러진 선거 혼탁 요인이 되었습니다. 언론에서 각 후보자간 정책의 차별성을 제대로 밝혀 부각시키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새 정권, 중도좌파 규합이냐 극우 볼모냐”

이삼렬 : 덧붙이자면 관훈클럽 토론회의 경우, 지난 13대 때는 공개됐지만 이번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가 분명히 있었으나 정책 차이의 희석화에 기여했다는 인상이 듭니다. 텔레비전 연설회도 각 후보의 연설이 겹치도록 만들어 객관적 평가를 내릴 기회를 주지 않았지요. 경실련을 비롯한 시민운동 단체들이 저마다 전문가들을 동원해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 평가했으나 결국 국민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손학규 : 한국의 정치가 아직도 냉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도 큰 문제점으로 남았습니다. 거기에는 간첩단사건 색깔론 등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한 언론도 책임이 있습니다. 정책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도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3당 모두 경제·통일·인권 등 중요 분야에서 분명한 정책적인 차이점이 있었는데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물론 애초에 선거를 정책대결로 몰아가지 않으려고 한 민자당과 이를 도와준 언론 책임이지만 야당에게도 책임은 있습니다. 민감한 현안이 쟁점이 돼 감표요인이 될까봐 정면적인 정책대결을 회피한 인상이 짙습니다.

이삼렬 : 14대 대선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의 중요성은 이번 대선이 전체 민주화 과정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됩니다.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공약의 실현여부, 정책상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어떤 정치세력이 주도권을 잡을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일단 기존 지배권력의 기반에 변화가 있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배적인 정치세력은 변화의 과정에 들어섰습니다. 이번 대선을 통해 노태우씨 지지표의 14~15%는 이미 차기정권 담당자인 김영삼씨에게 돌아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낙관적인 추측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기정권에서는 정치적 민주화가 좀더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극우세력의 견제와 압력을 뒤따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3당 공히 공약으로 내걸었던 금융실명제, 땅투기 근절 등의 경제개혁안이 정치적 안정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점은 관심을 끄는 대목입니다. 보수세력은 현재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난국을 빌미로 좀더 극우적으로 국면을 전환하고자 시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추진 속의 경제문제 해결, 이것이 바로 차기정권의 최대 과제입니다.

박찬욱 : 김대중씨가 주장한 대화합은 이제 김영삼씨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당선자는 패자를 희생물로 삼지 말아야 하며 현재의 3당 구조를 인위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는 없어야 합니다. 뿌리깊은 지역주의는 이미 인사나 개발정책에서 그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이념적으로는 전국연합 등 진보세력을 소외·배척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경제를 회복하고 개혁하려면 관료사회부터 개혁해야 합니다. 관료사회에 고착된 부패 부조리 비능률 권위주의 등의 타성을 극복하는 것과 정치로부터 관료의 중립성을 지켜주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과제로 보이지만 성공적으로 추진해야 할 핵심과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김영삼 당선자는 정권과 자본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도 정리해야 합니다. 이번 선거로 현대라는 개별 자본력은 패퇴시켰으나 재벌이 정권에 도전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국민당의 경우 어쨌든 당과 현대와의 연결고리는 청산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42%를 득표한 김영삼씨는 노태우 대통령에 비하면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민간정부이며 지지율도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은 정통성 확보에 유리한 조건이죠.

손학규 : 텔레비전 토론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방송사들이 적극 나서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김영삼 후보가 회피한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영삼 후보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뻔히 불리한 줄 알면서 무엇하러 나서겠습니까. 대선에서 텔레비전 토론이 꼭 필요하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으면 후보들이 회피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겠습니다.

이삼렬 :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정국 전개양상은 깊은 관심의 대상입니다. 핵심이 되는 것은 김영삼 정부와 민자당 아이덴티티가 어떤 식으로 자리잡을 것인가 하는 점이지요. 지금까지 역대정권은 대구·경북 극우세력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기정권은 중도우파적 성격입니다. 김영삼씨는 극우세력의 일부를 자기 편으로 끌어 안았습니다. 이제 문제는 중도우파와 극우보수세력의 연합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김영삼씨로서는 원래의 입장보다 더 우편에 서서 강경세력을 흡인하거나 또는 중도좌파를 규합해 안정세력을 구축할 두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강경세력을 흡인한다면 김영삼씨는 극우세력의 볼모가 될 가능성이 있으며 진보세력의 일부를 흡수한다면 더 나은 진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극단적인 좌성향 세력을 배제한다면 한국의 정치는 서유럽의 정치가 지나온 경로를 따라 좀더 정상적인 자유 민주주의를 구가할 수있을 것입니다.

박찬욱 : 분단이 지속되는 현실에서 혁신세력이 설 수 있는 정치지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이번 선거를 통해서도 드러났습니다. 앞으로 보수세력은 우파나 중도파 등으로 다양하게 분리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민주당의 경우 중도·진보 정도의 성격으로 경쟁구도를 잡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당 사이의 견제뿐 아니라 당내 견제도 있을 것입니다. 민자당에 모여 있는 다양한 세력이 분열이 아닌 당권 분리라는 경향으로 나갈 때 오히려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시련은 정주영씨가 많이 겪을 듯합니다. 김대중씨는 정계를 은퇴해도 당선자와 정치 맞수이므로 그 영향력이 급격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주영씨가 지금과 같은 당 장악 능력과 카리스마를 유지하더라도 당내 이질요소와의 갈등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정당 간이든 당내이든 경쟁구조를 갖추어 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내각제는 선거 과정에서 국민당이 민정·공화계를 유인하여 정치적 지분을 넓히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김영삼씨의 당선으로 그 위력이 사라졌다고 봅니다.

 

“대통령, 국민과 고통 나눌 자세 가져야”

손학규 : 김영삼 정부의 당면과제는 경제건설과 정치개혁입니다. 문제는 김영삼씨의 구호인 안정과 개혁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자본 노동 관료 등의 자율화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세질 것입니다. 과거의 군부정권 같으면 힘으로 억누르겠지만 김영삼 정부는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됩니다. 또한 냉전질서의 종식과 함께 경제전쟁 시대로 돌입한 국제정세도 새 정부를 괴롭힐 것입니다. 이런 내외의 도전을 이겨내기는 대통령선거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19일 당선이 확정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부산기관장회의 사건을 공작정치로 매도하고 도청 관련자들을 처벌하겠다는 듯한 발언을 했는데 그같은 태도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이제는 야당 지도자 스타일의 깜짝쇼 같은 결단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삼렬 : 김대중씨나 정주영씨가 정계에서 은퇴할 것이라는 손교수의 전망에 대체로 공감합니다. 국민당의 경우 적어도 간판은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치 지도자로서 정씨의 역할은 끝날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비해 국민당은 오히려 더욱 강력한 우파의 결집체로 변모해 민자당 또는 김영삼 정권을 견제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민주당의 경우 이기택씨가 당권을 맡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양당구도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저의 개인적 견해이긴 하지만 민자·민주당의 양당구도는 어려울 듯합니다. 민주당 내부의 중도보수노선과 진보그룹의 조화가 힘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군국화, 민족주의 부활 움직임 등 국제사회의 변화를 빌미로 극우적인 음모에 의한 정치세력의 출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현재의 정국은 4당구도로 분화될 것입니다.

손학규 : 이번 선거는 우리나라에도 정당정치가 뿌리내릴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있어왔던 집권 여당은 언제나 실력자가 정권을 잡은 뒤에 급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자당이 김영삼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거든요. 김영삼씨가 기득권세력의 등을 업었든 탔든 정당정치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문제는 야당인데 제 견해로는 김대중 대표가 은퇴한 뒤 이기택 대표는 민주당을 무리없이 이끌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조직력이나 자금력이나 아직은 그만한 능력이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김대중씨가 이제 해야 할 일은 민주당이 정책정당, 국민정당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 내의 두 계파인 중도우파와 진보세력은 서로 갈라서면 둘 다 정치적 기반을 잃고 맙니다. 진보세력은 뛰쳐나가면 백기완씨의 경우를 봐서 알 수 있듯이 대중정치가로서 발붙이기 힘들고, 중도우파는 진보세력과 헤어지면 현정치권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집단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두 계파가 서로 화합한다면 민주당도 국민정당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민당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해체가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더이상 정주영씨의 리더십 아래 안존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극우 보수세력이 총결집해 새로운 당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삼렬 : 차기정권은 중도우파의 안정된 지지기반 위에서 이미 내놓은 경제 정책·공약을 실현해야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패배는 했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김대중씨도 선전했다고 봅니다. 대선 지지율 34%는 이데올로기 문제, 색깔론 시비를 어느 정도 극복한 성과로 보입니다. 이미 김씨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만을 환영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범야 세력을 결집한 대중정당의 출현에 후견인 역할을 하는 등 중도·혁신 세력의 정신적인 리더로서 성숙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길 기대합니다.

박찬욱 : 이번 선거로 정당 간의 정권교체는 이루지 못했으나 선거를 통해 문민정부가 창출됐다는 것은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정치가 신뢰받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손학규 : 정권교체에 실패해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제는 정치적 입장을 떠나 새 정부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는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게 고통을 분담해달라고 요구했는데 만약 대통령이 국민과 고통을 함께 나눌 자세가 돼 있다는 확신이 서면 고통을 함께하기를 주저할 국민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관권개입, 사조직의 공공연한 활용, 기업자금의 정치자금 유용 등 모든 문제는 다음 선거에서는 사라지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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