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서도 무너지나 “한국, 그 환상의 나라”
  • 부다페스트 · 김성진 통신원 ()
  • 승인 199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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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첫 수교 3년…俓協 소홀 · 이미지 추락

 오전 11시48분. 부다페스트 켈레드역. 파리에서 밤새 달려온 오리엔트 익스프레스가 7번 선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환영객들 가운데 몇몇은 커다란 표지판을 들고 동양인만 보면 달려가 흔들어 보인다. “한국인 환영! 싼 방 있음. 떠나는 날 차량 무료제공” 선명한 한글간판은 먼나라 헝가리를 처음 찾는 한국인들을 무척 설레게 한다. 그들 중에는 한국학생과 함께 나와 호객하는 헝가리인도 있다.

배낭족 문란 · 유학 사기에 투자단은 관광만
 철의 장막에 가려 우리에게는 갈 수 없는 아득한 곳으로만 여겨졌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수료 3주년을 맞는 2월의 부다페스트는 더 이상 한국인에게 먼 나라가 아니다. 다뉴브강 유람선에서는 어느덧 한국어 안내방송이 영어 독일어 일본어 등과 동등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내의 중요한 입간판과 전차 · 시내버스는 삼성 금성 등 한국기업이 광고로 도배질하다시피 해버렸다. 시내를 질주하는 현대의 엑셀승용차, 쇼윈도에 화려하게 전시된 한국산 가전제품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헝가리인들의 한국이미지는 88올림픽이 극대화시킨 “한국, 그 환상의 나라”라는 연장선상에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한국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그 환상은 물거품이 되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배낭족들이 대거 들어왔던 켈레드역 구내에는 헝가리어 이외의 외국어로서는 유일하게 조그만 한글간판이 낯뜨겁게 붙어있었다. “이곳에 휴지 버리지 마시오!”

 한국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수교 이후 동구권을 뻔질나게 드나든 ‘투자 사절단’이었다. 이들은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권 여행이 아직 규제되어 있던 때 투자사절단을 조직해 동유럽을 돌았지만 대부분은 홍보용 사진촬영과 관광이 목적이었다. 지난 90년 ○○지방 상공회의소 주최로 부다페스트에 온 한 투자사절단은 헝가리상공회의소에서 투자현황을 청취하던 중 설명내용을 자료로 대신하고 이 시간에 시내관광을 하자고 요구하는 창피스런 일을 벌였다. 이같은 사건이 계속되자 헝가리측은 투자사절단에 대한 설명자를 하급직원으로 교체했고 강연료를 받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 상공회의소의 한 직원은 “수많은 투자사절단이 헝가리를 방문했지만 실제로 투자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국측을 겨냥해 우회적인 표현을 썼다.

 이런 와중에서도 양국관계는 양적으로는 엄청난 팽창을 해왔다. 양국간 무역규모는 수교 첫해인 89년 수출 4천9백만달러, 수입1천9백만달러이던 것이 지난해엔 수출8천2백만달러, 수입 3천6백만달러로 2배 이상 늘어났다. 주요 대기업의 지사가 설치되었고 삼성은 컬러 텔레비전 공장을, 대우는 은행을 현지 법인으로 운영하고 있다.

성급한 북방정책, 동유럽에 불신감도
 북방회교 붐은 이곳에 존재했던 북한 코뮤니티를 뿌리째 뽑아버렸으며 그 자리를 남쪽사람들이 서서히 그것도 다양한 모양새로 채워나갔다. 북한 코뮤니티는 일부 공관원과 한때 2백명에 달하던 유학생 사회로 단세포 조직을 꾸며놓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쪽사회는 대기업 상사를 선두주자로 그 뒤를 대사관이 따르고 개인 사업가 및 유학생이 마지막으로 합류하여 이루어졌다. 그 숫자는 이제 3백명을 웃돈다.

 한국인이 동유럽에 속속 들어오자 북한은 유학생 소환과 공관 축소로 대응해왔다. 지난 88년 10월 한국과 헝가리 간의 상주대표부 설치는 북한의 동유럽외교에 치명적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북한은 동유럽외교의 간판이었던 김평일 주헝가리 대사(김정일의 이복동생, 현 불가리아대사)를 소환하면서 공관도 대사대리(참사관)로 격하시켰다. 이듬해 7월부터 모든 동유럽권 유학생들의 철수가 단행되었다.

 헝가리의 북한 유학생들은 대부분 대입 전단계인 국제예비학교(NEI)에 재학중이었다. 당시 북한학생을 맡은 선생은 가보르 오스바트씨(현 무역대학 강사). 그는 샨도르 에트레 주한 헝가리 대사 등과 함께 김일성대학에서 2년간 한국어를 공부한 적이 있어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를 꽤 잘 구사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학생이 귀국에 대한 사전통보를 받지 못한 채 일정한 장소에 소집되었다. 이때 부다페스트공항에는 ‘조선민항’ 특별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소집장소에서 확인해 본 결과 학생 1명이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북한측은 이 학생이 지방으로 도피했다는 사실을 밝혀내 헝가리측에 인도해 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나머지 학생들을 귀국조치했다. 헝가리측의 정치적 망명 허용으로 헝가리에 잔류한 이 학생은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헝가리 여자와 결혼해 현재 한국계열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와 긴밀한 접촉을 가지고 있는 한 관계자는 “아직도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신변안전을 염려해 언론과의 접촉을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부다페스트를 비롯한 동유럽권 북한공관들이 주재국과 빈번한 외교접축을 재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이들의 외교활동은 크게 남북합의서와 김정일 후계체제의 정당성 홍보에 집중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대사관의 한 소식통도 “이미 한국정부가 북한과의 교섭창구로 뉴욕, 제네바 그리고 빈을 제의해 놓은 만큼 동유럽권에서의 남북접촉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하고 “그러나 최근 북한측이 주재국을 상대로 남북합의서와 김정일 후계체제 확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다른 한 관계자는 “북한은 이미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외교정책의 중점을 미 · 일과의 관계개선으로 전환했다”면서 “북한공관의 움직임은 통상적인 외교활동의 회복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남북합의서가 김정일 후계체제에 대한 남한의 지지에 의해 도출되었다는 가설의 진위를 떠나 적어도 동유럽권에서는 양자가 긴밀한 연관을 지어 북한외교의 새로운 돌파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수교 3년, 교민 3백여명 뿌리내리기 한창
 교민사회의 조직체로는 한인교회가 89년 최초로 성립되어 현재 등록 신도수가 1백30명에 육박한다. 한 학생은 “교민사회의 모든 정보는 교회를 통해 흐른다”고 말한다. 매주 토요일엔 한글학교가 열려 교민자녀들을 위한 국어, 수학 등의 수업이 진행된다. 한국식당과 한국식품점 2곳도 각각 개업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三星가전제품 대리점도 있으며 르까프신발 총판도 생겼다.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舊유고연방 등 다른 동유럽권에 비해 헝가리 교민사회는 이름에 걸맞는 코뮤니티로 자리잡았다.

 헝가리 교민사회가 서유럽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북방외교라는 외풍에 힘입어 형성되었으며 그 기반마저 변혁기의 부다페스트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주를 목적으로 이곳에 온 몇몇 교포를 제외하고는 한건만 올리고 떠나버리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교민사회에 팽배해 있다. 변혁기의 사회에서는 법보다 뇌물이 더 잘 통한다. 한 교민은 “헝가리 사회야말로 한국인 체질에 맞는 곳”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이같은 한건주의는 근본적으로 6공이 내세운 북방외교가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 헝기리 외교전문가는 “당시 한국정부는 경제원조를 앞세워 공산당 정부와 협상했지만 그것이 선계가 되어 다른 동유럽권 및 구소련과의 수교협상에 경제원조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헝가리에 대한 한국의 차관은 수교 전인 88년 12월에 1억2천5백만달러가 제공된 이후 지금까지 모두 2억5천만달러가 공여되었다.

 헝가리에 교두보를 확보하자마자 한국의 외교력은 소련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헝가리 이외의 다른 동유럽 수교국공관들은 극심한 곤란을 겪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문제에 정통한 한 한국소식통은 이같이 설명했다. “헝가리는 북방외교의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현지 공관에 제한없는 정부지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안다. 그러나 다른 동유럽권 지역의 공관들은 본부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의 외교력이 소련으로 집중되는 시기였다. 일부 대사관은 임대료까지 걱정해야 될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외교에서 마저 ‘냄비근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같은 문제점은 유학생사회에서 조직적이고도 복합적으로 극명히 드러난다. 지난 90년 프랑크푸르트의 한 교포가 서울의 4대일간지에 광고해 모집해온 10여명의 의과대학 진학희망자는 그 첫번째 문제를 던져주었다. 광고만을 믿고 모든 수수료와 입학금까지 내고 이곳에 왔지만 그들이 입학할 의과대학은 헝가리에 없었다. 대입 낙방생부터 가게종업원까지 망라된 의과대 지망생들의 자질도 자질이려니와 헝가리 학생들조차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도 20% 내에 들지 않으면 4년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이곳에서 그들의 대학진학길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같은 현상은 그후 헝가리 전문 유학상담소인 서울의 K社에 의해서도 반복되었다. 이회사의 주선으로 90년 가을학기부터 국제예비학교(NEI)를 다녔던 10여명의 학생은 공공연히 학교측으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이미 서울에서부터 지불하고 온 등록금을 학교측이 전혀 받지 못했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K사가 NEI측에 90년말까지도 등록금을 송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학생들은 K사에 강력히 항의한 끝에 간신히 등록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K사는 학교가 아닌 개인별로 송금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이들 가운데 2명만이 등록을 한 뒤 공부를 마쳤다. 나머지 학생들은 송금받은 돈을 자기가 써버렸다. 졸지에 수업료마저 못받게 된 학교측은 경찰측에 한국학생들에 대한 특별관리를 요청했다. 심지어 거주허가를 내주지 못하겠다는 경찰관에게 항의하는 한 학생을 추방하는 사례까지 발생했다.

 이제 부다페스트 교민사회는 가족과 함께 정주를 목적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일시적인 바람에 휩쓸려 이곳에 온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수교 3주년을 맞는 부다페스트의 교민사회는 확고한 뿌리를 내리기 위한 제2의 도약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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