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교육 실현한 ‘좁쌀교장’ 신봉조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2006.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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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5천여 제자 기른 ‘마지막 선생님’



 
   지난 92년 12월27일 만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辛鳳祚 이화학원·이화예술학원 명예이사장은 이 땅에 여성교육과 예술교육의 밀알을 틔워 풍요한 열매를 거둔 참교육자이다. 일제하 조선여성을 깨우기 위해 스무살 때 야학교사로 출발하여 이화여고의 첫 한국인 교장으로 취임한 그는 1953년 최초의 예술전문학교인 서울예고를 설립하였고 70년 가까운 교직 생활 동안 6만5천여명에 이르는 제자를 길러냈다.

   그의 주위는 늘 젊은 가능성으로 화사하였으나 그의 일상은 수도자의 그것처럼 한소하였따. 흰머리 성성한 제자들이 종국에는 “선생님이나 그렇게 사십시오, 저희는 싫습니다”하고 반격한 것은 그가 보인 삶의 모범이 그들을 위압하였기 때문이다.

   빈손으로 넘겨받은 이화재단을 한국에서 가장 튼실한 재단으로 가꾸어 놓았으나 재단 이사장 신봉조의 거소는 50년간 한결같이 신교동 18평짜리 낡은 한옥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구공탄을 때며 6남매를 낳아 길렀다.

   그의 장남 융선시는 10년 전에 부친으로부터 받은, “내가 죽으면 일절 알리지 말고 한달 후에 꼭 알려야 할 사람에게만 알리라”는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

   이 시대 마지막 스승이요, 예술의 후원자였던 신봉조는 1900년8월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다. 탄광업을 하던 부친이 일찍 작고해 생활이 곤궁해진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우편국에서 일해 모든 돈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늘 고달픈 고학생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연전 재학중에 그는 처음으로 조선여성의 비참한 처지에 눈을 뜨게 되었고 차메리사와 함께 근화여학교(덕성여고의 전신)의 기틀을 잡는 일에 몰두했다. <조선일보>의 최은희 기자는 당시 신봉조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근화여학교는 1919년 9월 종로예배당 종각을 빌려 칠판을 걸었다. 학생에게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으니 교사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 것은 두말 할 필요없다. 이 야학사업에 제일 열심인 사람은 연전에 재학중인 신봉조씨였다. 기독교 신자인 이 청년은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이 나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예배당 종각집을 빌렸기 때문에 학생들이 오기 전에 걸상을 날라다 놓아야 했고 예배날이면 다시 제자리에 옮겨 두어야만 했으나 이 청년은 혼자 그 일을 다 맡아했다.”

   1924년 3월 연전을 졸업하고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조선어문법과 영어 담당교사로 취직해 본격적으로 직업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전체주의적 교육방법을 최상으로 여기던 당시에 매를 들지 않는 교사로 유명하였다. 배재의 사나운 학동들도 “나는 네가 그런 학생인 줄 몰랐더니 네가 그런 사람이었더냐”하는 훈도를 받으면 오히려 그를 두려워하였다.

 

 애국청년이 친일파로 몰린 사연

   배재학교 재직중에 그는 선교사들 사이에서 ‘악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제자 중 한사람이었던 崔栢淳(대한수산주식회사 사장)는 “배재가 학교 옆에 있던 선교사 사택을 허물고 강당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신선생님 덕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당신들이 한국에 온 것은 교육을 위해서라고 하지 않느냐, 우리가 그 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교육을 위해서이다”라고 끈질기게 설득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강자였던 선교사그룹을 이긴 것이다.

   그와 선교사들 사이의 대결은 이후 정동 예원학교 운동장부지를 놓고 또 벌어졌는데 이때도 선교사들은 기숙사를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5척 단구의 신봉조는 선교사들 사이에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그가 이화여고의 첫 한국인 교장으로 추대된 것은 그런 배경을 갖고 있다. 물론 일본이 미션스쿨의 학교운영권을 선교사로부터 빼앗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주긴 했지만, 무엇보다 이화재단 주인인 미국 감리교 부인선교회의 ‘조선청년 신봉조라면 맡길 수 있다’는 믿음이 큰 힘이 되었다.

   1938년 미스 처치 후임으로 이화의 교장으로 취임하여 그가 누린 명예는 그러나 이후 50여년간 그가 짊어진 멍에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었다. 그는 이화에 입성한 이후 곧 친일파라는 주홍글씨를 달게 되었다. 배재학교 졸업반 때 만세사건으로 6개월간 징역을 살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애국청년이 매국적 친일파로 분류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사연은 이렇다.

   조선총독부는 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조선의 모든 선교회학교를 적산으로 간주했고, 특히 반일감정이 강하고 대표적인 미션스쿨이던 이화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鄭熒謨 이화학원 사무처장은 “일본형사가 교장실 앞에 의자를 갖다놓고 주야로 앉아 있었습니다. 일종의 시위였지요. 게다가 이화 교정 안으로 도로를 뚫는다는 소문이 무성하더니만 어느날 정말로 측량대가 들어와 작업을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의 교장선생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회고한다.

   신봉조는 결국 뜻을 굽혀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권하고 방공훈련을 실시하는 등 일본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했다. 후에 애국청년들이 친일목록에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제자들마저 그를 꺼렸으나 정작 그 자신은 눈을 감을 때까지 한번도 변명하지 않았다. 정씨는 “당시 신선생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화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잘라말한다.

   그와 함께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에고를 열었던 임원식씨(지휘자·서울예고 2대 교장)는 “우리는 줄리어드 수준의 음악학교로 발전시키고 싶었으나 재정형편은 늘 나빴다. 그가 5년간 최원영 현 이사장을 관찰한 후 아무 조건없이 학교를 넘겨준 것은 학교와 인간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주변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는 신봉조 교장에게 전적인 신뢰를 받았다”거 믿는다. 임원식이 그랬고 최원영이 그랬고 정트리오 삼남매가 그랬다. 그것은 “그분은 내가 최선을 다해줄 것을 바라셨다”는 부채감과 통한다.

 

 청렴·강직 몸으로 실현

   그러나 그의 평생의 반려였던 한희숙 여사(83)만큼 많은 신뢰를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매가 불기 없는 방에서 떨던 어느 겨울 학교 기숙사에서 보낸 장작 한짐을 그대로 돌려보내는 남편을 보고 그는 “내가 정신차려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그는 출가할 때 가져온 피아노 한 대를 가지고 동네 꼬마들에게 레슨을 하며 6남매를 교육시켰다.

   54년 졸업생인 김옥경씨(58)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선생님 댁에 들렀다가 우연히 둥근 나무걸상에 못질하고 계시는 걸 봤다. 요즘 그런 낡은 의자를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교장선생님이 김 한톳도 선물받지 않았던 것은 유명한 얘기”라고 했다. 편지지를 모아 뒷면을 메모지로 쓰고 명예이사장으로 물러앉자마자 한사코 자동차를 내놓는 그 성품 때문에 ‘스몰 라이스’(좁쌀)라고 불린 신봉조는 그 좁쌀처럼 작은 밀알을 묻고 간 셈이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저명한 작곡가도, 문필가도 여럿 있으나 그들은 결국 스승을 위해 단 한줄도 적지 못했다. ‘중지해라, 내가 원하는 건 그런게 아니다’라는 꾸지람이 그것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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