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찾은 ‘진품’ 포스트모더니즘
  • 성우제 기자 ()
  • 승인 2006.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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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두 거장 원전 국내 첫 번역 출간, 실체적 논의 새 장 열어


 

 지난 2~3년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유행시대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옷을 덧입은 문학 예술이 범람했으며, 이와 관련한 논의가 뜨거워지고 그 이론을 소개하는 책자가 잇따라 출간됐다.

 그간의 논의는 외형적 크기에 비해 내부적으로는 ‘말이 말을 무는’식의 피상적인 것으로 일관되어 생산성이 없었다. 논의가 확대될수록 실체는 희미해지고 오해와 과잉반응이 쌓여 논의 자체가 난조에 빠졌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포스트 모더니즘을 가려버리는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비판론자인 都正一교수(경희대ㆍ영문학)는 이런 현실이 “원전에 대한 이해 부족과 번역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이전 논의, 2차적 자료 의존

 우리의 지적 풍토는 지난 50년간 서구 지식인들이 벌여온 토론의 내용에 생경할 뿐 아니라 그 토론에서 생산된 주요 문헌도 거의 번역해 소개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2차적 자료에 의존해 논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 민음사에서 출간된 두권의 번역서는 “국내의 열악한 지적 풍토를 부분적이나마 돌파해보자는 데” 뜻을 두고 있다. 프랑스 포스트 모더니즘의 두 거장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와 장 보드리야르의 ≪포스트 모던의 조건≫(유정환 이삼출 민승기 옮김)과 ≪시뮬라시옹≫(하태환 옮김)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고전에 해당하는 저작들이다. 두 이론가의 중요성은 겉모습만으로도 확인된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관한 모든 논의는 두사람을 둘러싸고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이 두 이론가를 빼놓고는 논의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국내에서의 논의는 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문학ㆍ예술 차원에 치중해 그 기반을 이루는 사회적 현실의 변화 양상에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철학ㆍ사회학 분야의 논의를 불러일으켰던 두 이론가는 그동안 편역서를 통해 부분적으로 소개되었으나 핵심적 이론은 정면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리오타르와 보드리야르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론가이다. 1924년 프랑스 베르사이유 태생인 리오타르(파리8 대학 명예교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그룹인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회원으로 15년간 활동했으며, 6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적 설명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철학ㆍ언어학ㆍ예술 분야에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79년 캐나다 퀘벡 정부의 위촉을 받고 저술한 그의 ≪포스트 모던의 조건≫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미학선언’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프랑스 철학자가 쓴 최초의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서론이었다.

 리오타르ㆍ프레드릭 제임슨 등과 더불어 80년대 중반 이후 철학적 또는 이론적 포스트 모더니스트로 널리 알려진 보드리야르(1929년생ㆍ파리10대학 교수)는 국내에 비교적 많이 소개된 앙리 르페브르의 제자이다. 르페브르는 현대의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확대시킨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보드리야르가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을 시도한 것은 73년 출간된 ≪생산의 거울≫에서이다. 그는 기존의 고전적 사회인식론, 즉 상부ㆍ하부 구조 논리는 후기 산업사회 ? 정보사회를 해석하기에 이미 낡은 것이라 보고 이제는 상품의 정치경제학이 아니라 기호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는 사회이론을 내놓았다.

 리오타르와 보드리야르가 각각 ≪포스트 모던의 조건≫≪시뮬라시옹≫에서 제시한 이론은 변화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하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적 거대 서사(큰 이야기)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서 출발한다”고 말함으로써 포스트 모더니즘의 발생론적 동기를 가장 잘 요약하는 한편, 철학ㆍ예술ㆍ역사ㆍ사회론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제도와 방법론의 특성이 어디 있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가 ‘거대 서사’라고 부르는 것은 헤겔철학ㆍ마르크스주의 등 ‘총체성’을 주로 가치범주로 삼고 있는 근대의 지적 체계들을 말한다. 리오타르는 “이제는 지식의 조건이 바뀌었다.”면서 모더니티의 지배적 가치인 이성ㆍ주체ㆍ진보로서의 역사를 배척한다. 리오타르는 거대 서사들의 총체성 추구 성향이 억압ㆍ강제ㆍ공포의 전체주의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거대 서사에 대한 리오타르의 탈근대적 대안은 그가 ‘소 서사’(작은 이야기)라고 부르는 담론 양식들과 그것이 생산하는 서사적 지식이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탈근대의 사회결속은 언어적 문제이며, 언어적 문제며, 언어게임 이론이 새로운 사회결속 이론이 된다. 따라서 전체를 하나로 묶는 총체성에서 벗어나 모든 언어게임의 영역에서 배증(背證)과 반리(反理 ? paralogy)를 추구하는 것이 탈근대이다. 역사 ? 인간해방의 좌절ㆍ환경위기 등 근대 지배이념의 역작용이 나타나므로 거대 서사에서 소 서사의 틀로 인식ㆍ사유를 전환하자는 것이 리오타르의 주장이다.

 

“한국 상황 분석에 자극제 될 것”

 리오타르가 역사철학적 태도를 부정한다면,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 자체가 변했다고 본다. 보드리야르의 이론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특성은 모든 것이 ‘기호’의 형태와 성격으로 존재하는 ‘기호화 사회’라는 데 있다. 근대가 실물의 시대라면 탈근대는 기호의 시대인 것이다. 모든 실물은 기호이고, 따라서 기호가 지시하는 것은 다른 기호일 뿐 실물대상이 아니다. 기호를 가지고 기호(정보 이미지 영상모조)를 생산하는 것이 탈근대의 새로운 생산양식, 곧 시뮬라시옹(위장)의 양식이다. 근대가 심층과 표층의 엄격한 분리구도(마르크스의 현상/ 현실, 프로이트의 의식/무의식)로 사회와 역사, 인간을 설명한 시대인 반면 탈근대 사회는 기호가 곧 현실인 세계이므로 기호는 이미 표층이 아니라 현실의 전부이고 기호의 재현 대상은 기호밖에 없다.

 또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탈근대 사회에서는 기술발전이 완벽한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새로운 일의 가능성은 고갈되고 없다. 따라서 기술의 완벽성이 모든 것을 완성한 이상 역사는 종언 지점에 이르렀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미래는 ‘미래가 없는 미래’이다.

 한편 ≪포스트 모더니즘과 비판 사회과학≫(문학과지성사)의 저자인 소장 사회학자 김성기씨(서울 시립대 강사)는 “우리의 철학 ? 사회학의 포스트 모더니즘을 아직 다루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시대상황을 분석하고 우리의 닫힌 사유방식을 여는데 리오타르와 보드리야르의 이론이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원전 번역의 의미는 크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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