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바코를 달라”목멘 분노의 절규
  • 자카르타 · 김진화 편집위원 ()
  • 승인 1998.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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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 재집권한 인도네시아, 살얼음판 정국 현장 리포트

대통령선거 기간내내 국영 인도네시아 TV는 하루 종일 국민협의회(MPR)에서 벌어지는 정치 토론장면을 방영했다. 한국의 국회 격인 국민협의회의 육중한 건물은 3월1일부터 열흘동안,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연설을 듣고 있는 의원 수백명의 체온으로 후덥지근하게 달아올랐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연설에 짜증난 외신 기자들에게 3월7일 특별회견이 마련되었다. 집권 골카르 당 외무위 소속 테오삼부가 의원은 기자들에게 불평하기 시작했다.“모든 외신이 인도네시아 상황을 부정적으로 부풀려 보도하고 있다. 편파보도를 중지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하기 바란다. 인도네시아 금융사정은 외신이 망쳐놓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외환위기 때 듣던 것과 비슷한 불평을 여기서도 듣는다고 일본 기자가 싱긋 웃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삼시유딘 의원이 말을 돌렸다.“점심준비가 인되어서 미안합니다.”그러자 한 기자가 말을 받았다.“경제위기 때문이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열흘 만에 취재 기자들은 모처럼 웃고 헤어졌다.

 오랜만에 웃은 것은 외신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일곱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수하르토 대통령. 백발을 뒤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도 검은 모자를 정중히 벗어 의원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특유의 잔잔하고 인자해 보이는 웃음을 거대한 의사당에 모인 수천 인사들에게 보냈다. 수하르토를 다시 한번 대통령에 추대한 국민협의회의 요식 행위는 이렇게 끝났다. 의원 천여 명은 회의경비 5백만달러와 경비병력 2만5천명을 수도 자카르타에 남긴 채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자카르타 중심지‘웰컴 기념비’를 둘러싼 로터리에 자리한 그랜드하얏트 호텔. 쌍용ㄱ너설이 수하르토 대통령 아들의 주문으로 지은 이 초특급 호텔 2층 넓은 홀은 항상 손님으로 만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홀은 거의 텅 비어있다. 이탈리아식당과 일본식당에 가득찬 국내외 손님들이 생음악에 맞추어 1인당 80달러짜리 뷔페를 들던 7개월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하얏트호텔 맞은편 만다린호텔. 5개월전 비즈니스맨과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던 이 특급호텔 역시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현관홀에서 손님을 맞는 3인조 실내악단 연주자들과 눈을 마주치기가 미안할 정도이다.

 자카르타 교외 공업단지 탕게랑과 메락지구. 공업용 펌프를 생산하는 이 공장(종업원70명)은 조업을 중단한 채 몇 명만이 남아 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대표적인 노동 집약 산업인 방직공장과 구두공장들은 염료 · 원단 · 피혁이 없어 문을 닫고 있었다.

 지난 일곱 달 사이에 무려 75%나 폭락한 루피아화는 3월 초 닷새 동안에 달러당 7천6백~만루피아 사이를 오가며 하루에도 몇 번씩 널을 뛰었다. 지난 2월 한달에 생필품값은 평균32%가 올랐다. 인플레를 넘어 하이퍼플레이션(초고속인플레)에 접근한 것이다.

 여성 변호사 아니타 라흐만은 인도네시아 경제를 기름 떨어진 자동차에 비유했다. 그는 은행 대출중단, 공장과 상점의 재고 고갈, 생필품값 폭등 등 무엇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다고 불평했다. 지난달 기록한 32%인플레마저 정부 발표일뿐 체감 물가는 훨씬 높으며, 시골에서는 아예 물가를 가늠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식용유값 비싸 살 엄두도 못낸다”
 자카르타 동쪽95km. 치캄펙 시 시장에서 만난 주부 이브 마리얀티(42)씨. 구두공장에서 실직해 일거리를 찾아 시장에 나왔다는 그는 닷새째 식용유를 못 샀다고 푸념했다. 생필품값이 50~3백%나 뛰어올라 살 엄두를 못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1년 동안 극심한 흉작을 맞았다. 엘니뇨로 인해 사상 최악의 가뭄을 겪은 데다, 산불이 나고 그 연무로 인해 질병이 만연했다. 여기에 실업사태까지 겹쳤다. 한 노동자는“마치 온갖 재앙이 인도네시아에만 들이닥친 느낌이다”라고 한숨 쉬었다. 올해 말쯤에는 2억에 이르는 인구의 10%인 2천만명이 직장을 잃을 전망이다.

‘셈바코를 건드리지마라’. 이곳 관리들이 수군거리는 말이다. 셈바코란 인도네시아인들의 주식인 쌀을 비롯해 밀가루 · 식용유등 아홉가지 생활필수품을 뜻하는 말이다. 가난한 서민들 입에서 이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국가에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셈바코폭동은‘배(腹)의 반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악화되어 가는 상황에 놀란 정부는 최근 들어 쌀 수입을 정부가 보상하기로 결정했다. 정부 보상은 국제통화기금과 맺은 협정을 어기는 것이지만, 쌀에 관한 한 양측이 양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

 자카르타 남쪽 25km 지점에 자리잡은 국립 인도네시아대학 데폭 캠퍼스.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쯤에 해당하는 이곳에는 인도네시아 대학의 13개단과 대학 중 10개 대학이 몰려 있다. 서울대 아크로폴리스광장격인 가제보광장에는 요즘 매일 학생들의 항의 집회가 열린다.

“우리나라 인구 증가율은 2%에달한다. 해마다 태어나는 4백만 아기에게 먹일 우유마저 떨어진 이 사태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한 주부가 광장에 모인 3백여 학생을 향해 외쳤다. 지난주 우유부족에 항의해 도심에서 시위하다가 체포되었던 주부 카르미나 렉삼(43)씨의 항의에 학생들은 손뼉을 치며 함성을 보냈다.

 항의 집회가 계속되는 동안 가제보광장 옆 학생회관에서는 단과대학 대표들이 회의를 열었다. 교복인 노란 재킷을 입은 대표들은 학생들에게 적극 참여하라고 호소하면서 수하르토정권을 규탄했다. 교수들이 찬조연설을 할 때 학생들은 더욱 열광했다. 그러나 격렬한 한국학생들의 시위에 낯익은 때문일까. 학생들의 집회는 어딘가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2만여 명을 수용하는 캠퍼스의 집회에 3백여 명이 참석했다는 사실부터 그렇다. 시위에 참가한 목적을 뚜렷이 밝히지 못하는 학생도 많고, 학교 밖 시위는 위험하다는 주장을 펴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22쪽 인터뷰 참고).

 시위장을 빠져나가는 여학생 5명에게 물어보았다.“수카르노 전 대통령은 깨끗한 사람인가?”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여학생이 반문했다.“수하르토 대통령은 깨끗한 사람인가?”역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30분 동안 헛도는 대화를 나눈 끝에 얻은‘대답’은‘그가 깨끗한 사람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없으니 결국 깨끗하지 않다는 뜻이다’라는 해석이었다. 학생들은 두려워하며 말을 극도로 삼갔다.

"이번 학생 시위는 옛날과 다르다”
 학생시위가 극히 소극적인 것 같다는 의견에 대해 인도네시아 대학사파리나 사들티교수(여 · 경제학)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고 지적했다.“인도네시아 학생운동은 역사적 전환점을 넘어서고 있다. 65년 수카르노 전 대통령을 축출한 이래 처음으로 학생운동은 중요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것은 △지방에서 시작된 항의시위가 수도로 확산되고 있고 △교수들의 참여가 급증하고 있고, 학장 · 부학장등 보직교수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으며 △국가원수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고 △65년과 달리 외부의 압력 없이 독자적으로 판단해 항의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 등이다.”

 3월 초 자카르타의 저명한 대학교수 네 사람은 수하르토에게 즉각 사임하라고 요구하는 성명서를 배포했다. 퇴역 해군 소장출신인 압둘라 치토프라비로 박사, 마슈리 교수, 하르디 교수, 우세프라노위자자 교수 등은 성명서에서, 지배자의 탐욕이 권력과 부의 탐욕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군부에게 국민 외에는 누구도 섬기지 말라고 요구했다.

 32년간 이 나라를 지배해 온 수하르토에 대해 국민들은 복합적인 감정으로 갖고 있다. 컴퓨터 엔지니어 타르토 수디로(51)씨는“그를 비난하지만, 수하르토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동남아 강국으로 만들고 개방과 성장으로 이끈 것은 사실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수마트라 섬 파당대학교에 다니는 숙세스코 반둥(24 · 영문학)양은“그의 공적을 인정하지만 당장‘셈바코’를 해결해야 할 국민들의 사정은 너무 절박하다”라고 말했다.

 수하르토는 과연 이 절박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는 루피아 환율이 안정되지 않으면 물가를 잡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금융전문가들은,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통화위원회(CBS)를 통해 고정환율제를 도입하되 다소 융통성있게 유지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라고 분석한다. 고집세고 자존심 강한 수하르토는 결국 국제통화기금과 미국의 압력에 맞서 국제통화기금과 이미 체결한 50개협약을 일부 조정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 대학 경제학 교수겸 개발 기획장관 특별고문 스와소노박사는“처음부터 IMF와 체결한 협약이 잘못되었다. 협약은 우리에게 치욕적이다 지난3개월간 협약을 지켜보았으나 경제는 계속 나빠질 뿐이다. 우리에게 급한 것은 단기처방이지 장기치유책이 아니다. 협약의 20%는 보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자신을 반체제로 분류해도 좋다는 스와소노 박사는 수하르토의 위기 대처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수하르토에게 뚜렷한 전망이 있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비비부통령을 선택하면서 대통령은 이미 위기를 극복할 기회를 잃었다. 국민의 생활고와 열망에 대한 현실감각도 잃었다. 국민의 신뢰없이 근본직인 개혁은 어렵다”라고 진단했다.

 앞으로 2억인구으 80%이상이 절대 빈곤 상태에 바지고, 실업자 2천만명이 전국을 헤맨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혼돈과 무정부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일가? 수하르토의 측근들은 그가 앞으로 2~3개월 안에 최소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정치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하르토의 이복동생 프로보수테조는 전화인터뷰에서“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과 합의해 환율을 적정선에 안정시켜 식량문제를 우선 해결할 것이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수하르토가 안고 있는 문제는‘밥’뿐만이 아니다. 국민들은 오늘의 경제문제가 정치에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했다. 섬유노조위원장 아리 수나리야티 여사는“우유값 폭등에 항의해 시위한 주부들은 우유값을 통해 정치를 규탄하고 있다. 정치의식은 느린속도로나마 노동자 · 농민에서 시골 주부에까지 서서히 전파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수나리야티 위원장은 만일 학생들과 실업자들이 거리고 뛰쳐나올 경우 노조가 집단으로 이에 응할 능력이 없음은 인정한다.

 시민들은 소요가 확산될 경우 인도네시아 군부는 즉각 사태 진압에 나서리라고 믿는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국민협의회에 대통령 비상대권을 요청해 두었다. 비상대권은‘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사태에 대비해’국민협의회를 해산하고 누구든 영장없이 체포할 권한을 포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주 자카르타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D&R>의 표지는 트럼프카드에 나오는 스페이드킹이 달러를 움켜쥐고 있는 컴퓨터합성사진을 실었다. 수하르토를 돌려도 돌려도 계속 나타나는 킹에 비유한 이 잡지는 판매 금지되고 편집장은 구속되었다. 언론인협회는 그의 회원자격을 정지 처분했다. <D&R>사건은 경제상황이 악화할수록 정부가 국민을 더욱 옥죌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낙관론자들은 인도네시아의‘노회한 노인네’가 후계자를 준비하고 있으며, 최악의 식량위기를 넘기면 정치 · 경제를 개혁하는데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개혁의 범위와 깊이를 예측하는 사람은 없다.

 수하르토는 일곱 번째 대통령임기가 끝나는 2002년 만81세가 된다. 수하르토는 이번 대통령에 취임하기전에 새 내각의 규모를 크게 줄였다. 또 경제재무개발 · 생산분배 · 정무치안 · 복지를 관장하는 4개 장관직을 없애고, 이 업무를 부통령 직속으로 귀속시켰다. 정가에서는 이같은 조처를 하비비부통령에게 점차 권력을 넘기려는 준비단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헌법상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 직을 자동 승계하는 부통령은 6개월안에 국민협의회(MPR)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 군구입김이 세게 작용하는 국민협의회가 하비비를 대통령으로 옹립할지는 의심스럽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수하르토 후계자 놓고 쑥덕공론… 비란토 장군 1순위 
 그렇다면 누가‘수하르토이후’에 등장할 것인가? 민간으로서는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딸 메가와티 여사, 인도네시아 최대의 회교 그룹인 모하메디야의 총수 아민 라이스, 지식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이번 선거에서 부통령에 추천되었던 전 환경장관 에밀 살렘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에밀살렘의 친형이며 이집트대사를 지낸 페르디 살림은 기자에게 이렇게 예언했다.“결국 이 나라는 또다시 군부가 장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간 정치 지도자중에는 수하르토의 카리스마와 지도력, 군부를 휘어잡는 정치력과 호용력을 가진 지도자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군부에서 떠오른 별들은 최근 군총사령관에 임명된 비란토장군, 수하르토의 사위이며 전략군(KOSIRAI)사령관인 수비안토중장, 수비안토의 강력한 라이벌인 밤방등이다. 이 중 가장 강력한 후보자는 비란토 군총사령관이다. 만일 그가 대통령직에 나서지 못할 경우 최대의 킹메이커가 되리라는 관측이다.

 인도네시아 정국을 내다보기란 혼란한 이 나라 경제를 예측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인도네시아 역사는 과거 여러 차례 외부 세계의 상식과 예측을 비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0대 초반인 인도네시아 영관급 장교 이브라힘(가명)은 단호하게 말했다.“인도네시아 군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이번에 근본적인 정치 · 경제 개혁으로 나라를 구하지 못한다면 우리 젊은이들은 그 오만함을 쏘아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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