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장사다운 장사 해보자”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8.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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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 중소 대북 교역업체, ‘한민족 물자 교류협회’창립

새 정부가 정경 분리 원칙에 입각해 적극적인 대북 경제 협력 활성화 방안을 내놓자 국내 중견 대북 교역업체 19개가  ‘한민족 물자 교류협회’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그동안 자신들이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일구어 온 대북 경협 노하우를 전파하는가 하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는 중소기업들로 하여금 북한에서 살길을 찾도록 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포부이다.

 그 동안 각개 약진 식으로 대북 교역을 해오던 이들이 협회를 결성하게 된 것은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기도하다. 그만큼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할말이 많다.

 협회 회장을 맡은 효원물산 김영일 사장은 “그동안 정권들이 대기업 위주로만 남북 경협을 밀고 간 것은 실익을 위해서라기보다 정치적 동기가 크게 작용했다. 북한의 실정을 감안할 때 경수로 사업을 제외하면 대기업 위주의 대규모 투자는 시기상조다. 남북한에 꼭 들어맞는 투자는 중소기업형이다”라고 말한다. 사회간접자본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북한 실정을 놓고 볼 때 정부의 남북경협 관리 방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할 분담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기업은 건설 부문 등 사회간접자본 구축 또는 공장설립을 통한 직접 투자에 치중하고, 중소기업은 기존 공장을 이용한 임가공과 국내 사양 설비를 옮겨가는 방식으로 정부가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항변은 그동안 자기들이 턱없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도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패잔병’신세로 내몰렸다는 억울한 심정에서 나온다. 90년부터 정보의 경협정책에 따라 대북교역에 뛰어들었으나 역대 정권이 이를 정치에 이용해 대부분이 족박을 차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순수한 경협업자들이 잠수함 침투 · 황장엽 망명 · 북풍 등 북한과 관련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치논리에 휘둘리거나 심지어 첩보원으로 오해받아 사업에 큰 타격을 입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교역이 이루어지는 북한 물품도 품목 별로 교통정리가 됮 않아 북한에 이용만 당하는 일이 흔했다. 협회 사무총장인 씨피코국제교역 노정호 사장은 “대기업이 중소기업 영역을 침범해 북한 거래선에 경쟁적으로‘뒷돈’을 주며 사업을 성사시키다보니, 그동안의 남북 교역은 말이 경협이지 진정한 장사라고 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새 정부의 경협정책은 이런 문제를 뜯어고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지금까지 살아남은 중소대북 교역 업체들에게 자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지난 10년간 남북한 간에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김영삼 정부가 남북 대화조차 못하는 상화에서도 자기들을 희생하면서까지 남북 관계의 끈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통일부에 축적된 대북 경제 정책 노하우는 바로 이들이 실패를 거듭하며 뚫어낸 남북경협의 보고서들을 모아 이룩한 측면이 강하다.

 이런 이유로 중견업자들은 과거 정부의 대북경협 정책에 한이 맺혀 있다. 이 대목에서 이들은 새 정부에 대해서도 섭섭함과 우려를 버리지 못한다. 정부의 귀가 여전히 닫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영일 회장의 말을 들어보자.

 “지난 10년 동안 대북교역업자들이 15억달러에 이르는 교역 업무를 해 왔지만 청와대는 물론 통일부장 · 차관조차 그동안 중견 대북 교역업자 말을 듣고자 하지 않았다. 만나자고 한 적도 없다. 그 결과 북한에조차 대기업이 중소기업 영역에 문어발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조장 · 방치하고 말았다.”

 새 정부가 적극적인 경협활성화 조처를 내놓고 있지만, 중견대북 교역 업자들은 우려를 거두지 못한다. 현재 방식으로 나가다가는 국내에서 IMF체제를 불러들인 대기업의 폐해가 북한에 그대로 이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새 정부에 내는 목소리는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진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품목별 교통정리이다. 이들은 그 간의 경험으로 보아, 대북교역 제한을 무조건 해제한다면 대기업의 문어발식 진출과 중소업체간의 출혈 경쟁으로 이해 결과적으로 북한에 이용당하게 될 것으로 내다본다.

남북 경협의 거품 뺄 계기마련
 두 번째 주장은, 정부가 조성한 남북교류협력기금을 대북교역 업체들에게 장기 저리로 지원해야한다는 것이다. 과거 정부의 잘못된 경협정책 때문에 수십억원씩 투자하고도 실적은 없이 ‘교역경험’만 쌓았을 뿐더러, 새 정부의 정경분리 방침에 따라 이제 막 기운을 차리려는 순간에 IMF체제라는 된서리를 맞아 기력을 잃고 그 간의 노하우마저 날릴 상황에 처한 업계의 딱한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금 지원요구는 멀리 내다볼 때 경협업체들이 북한의 경제를 일으킴으로써 통일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명분도 담고 있다.

 최근들어 대북 교역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갑자기 밀어닥친 IMF체제 탓이 크다. 높은 환율과 극심한 자금난에 빠져 북한에 달러 결제를 하기 어렵거나 공급할 원자재 마련에 애로를 격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북한측도 이런 사정을 이해해 결제일을 연기해 주기도 하고 임가공비를 낮추어 받는 등 어떻게든 거래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상황이라고 한다.

 역설적이지만 한편으로 대북 교역업체들은 IMF체제가 남북경협에서 그간의 거품을 배고 남북이 공동 이익을 추구할 실속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본다. 중소 교역업체들이 한민족 물자 교류협회를 결성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들은 IMF한파로 속속 공장문을 닫은 국내 중소기업들의 설비를 북한으로 이전해 살 길을 찾아 주겠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그간 쌓은 북한인맥과 신뢰, 숱한 시행착오 과정에서 얻은 대북경협 감각 등을 무기로하여 북한에 진출하기를 원하는 국내 중소기업의 북한정착을 돕겠다는 것이다. 협회 회원사들은 이미 북한의 자체공장을 이용하고 있거나 나진 · 선봉 등지에 공장을 설립하기로 계약을 맺는 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김영일 회장은 “현재 정부는 쓰러지는 중소기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디어가 없다. 기계 설비는 있지만 문을 닫은 중소기업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대북 경협 노하우를 쌓은 우리가 나서서 북한에 진출해 활로를 찾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이 문제로 우리 협회가 북한 대외경제 협력 추진 위원회측과 접촉했더니 그쪽도 적극 수용의사를 밝혔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정부가 나서서 북한에 공단 조성을 지원하면 현재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살아나고, 이는 결국 남북 공동의 이익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협회측은 북한에 진출해 성공할 만한 업체들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북한에서 원자재가 생산되는 농림수산물 가공업, 아연 · 철강 등을 원료로 하는 공업, 중국산 원부자재 위주로 운영하는 공업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피복 · 장갑 · 양말 등 소규모 섬유 · 의류 업종도 유망한 진출 품목으로 꼽고 있다.

 협회는 정부의 경협활성화 조처에 자기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해 IMF 체제를 극복하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4월 중순 중소기업인과 이산가족을 상대로 대규모 남북경협촉진설명회를 열기로 하고 장소를 물색하고 이다. 수 년동안 대북 교역업체들이 겪은 북한투자경험과 노하우를 설명하고 실질적인 대북진출방안을 공유하겠다는 목적에서다. 이 자리에서는 북한진출을 희망하는 중소기업인에 대한 상담도하고, 이미 확보된 북한쪽 사업파트너들을 연결해 주기위해 북한주민접촉 신청서를 받아 통일부에 제출해 줄 계획이다. 이와 함께 국내에 유통되는 북한상품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는 ‘북한 물산전’도 준비하고 있다.

 이미 혹독한 수업료를 지불하고 대북투자와 교역경험을 쌓은 이들 중소대북경협업자들이 벌이는 ‘작은반란’에 새 정부가 어떻게 화답할지 궁금하다.            
丁壹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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