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네”
  • 정리ㆍ김 당 기자 ()
  • 승인 1998.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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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공개 아자 방북팀 금강산 답사기 / 한국 사진작가 최초로 ‘1만2천본’ 촬영

이른바 흑금성 공작원 파문으로 유명해진 (주)아자 커뮤니케이션(아자)은 지난해 8월 금강산ㆍ백두산ㆍ묘향산 등 북한의 명산을 12일 동안 답사했다. 북한에서 최초로 상업 광고를 찍기 위한 사전 방문이었다. 답사팀은 박기영 대표(41)와 박채서 전무(44) 그리고 사진작가 변승우씨(38)였다. 변씨는 한국 사진작가로서는 최초로 방북해 12일 동안 무려 3백여통의 필름에 북한의 풍광을 담아 왔다.

아자는 올 4월 광고주인 삼성전자 관계자와 광고 모델 안성기씨 등과 함께 방북해 첫 상업 광고를 제작한 이후에 이 사진들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난 3월 안기부 공작 문건인 이른바 이대성 파일이 일부 언론에 공개되고 문건 속의 흑금성 공작원이 박채서 전무라는 사실이 폭로됨으로써 북풍(北風) 파문에 휩싸인 광고 사업팀의 방북이 연기되었다.

<시사저널>은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북한 당국과 합의한 금강산 관강 및 개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박기영 대표의 구슬을 정리한 금강산 답사기와 함께 그동안 공개를 미루어 온 필름 중에서 금강산의 비경을 담은 사진을 단독 입수해 공개한다. <편집자>

한국전쟁 48주년 기념일인 6월 25일 저녁에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 일행의 북한 체류 일정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방송으로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북한에서 최초로 상업 광고를 찍기 위해 금강산을 답사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라니, 그동안 한국에서는 50년 만에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정주영 회장이 거둔 방북 성과의 밑거름은 바로 수평적 정권 교체였다. 김대중정부의 햇볕론과 정경 분리 원칙이 있었기에 정회장의 방북이 가능했고, 북한측이 찍어 보낸 비디오 테이프를 신속히 공개하는 일도 가능했던 것이다. 대기업 총수인 정회장 방북과 이른바 금강산 프로젝트로 큰 사건이지만, 비디오 테이프가 공개된 것도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북한측이 그의 체류 일정을 비디오로 찍어 준 것 자체가 정중하고 성대한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정권에서라면 둘 다 꿈도 꾸지 못할일이다. 92년 대선에서 떨어진 정회장은 평생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고향 방문을 위해 그토록 애썼건만 김영삼 정부는 끝내 이를 외면했다.

아자는 지난해 8월19~30일(11박 12일) 북한을 방문해 평양ㆍ개성ㆍ남포ㆍ금강산ㆍ백두산ㆍ묘향산을 둘러보았다. 아마도 교류 협력 사업 차원의 민간 방북팀으로서는 최장 체류 일정이었을 이 기간에 우리는 북한의 아름다운 풍광을 비디오와 카메라에 가득 담아 왔다. 북한측은 그때도 정회장 일행에게 한 것처럼 아자 방북팀의 체류 일정을 카메라에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북한측이 찍어 준 영상물은 물론이고 우리가 찍어 온 영상물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조차 막았다. 통일원 실무진의 협조만으로는 권력 눈치 보기에 급급한 고위층을 설득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대선 뒤에 보자’던 실무진의 말은, 대선이 끝나자 ‘새 정부 출범 후에 보자’로 바뀌었다. 박전무와 나는 이왕 늦었으니 민간인 교류 협력 사업으로서는 최초로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통과해가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러나 우리는 남북한 당국을 모두 설득해 판문점 통과 날짜를 잡는 과정에서 이대성 파일이라는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판문점을 통과한 ‘소몰이 방북’으로 노익장을 과시한 정회장의 자랑스런 모습과 금강산의 풍경을 방송으로 보니, 우리가 비디오와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은 금강산 1만2천봉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우리 팀이 금강산을 찾은 것은 방북 9일째인 97년 8월27일이었다. 우리는 북한의 사업 파트너인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방종삼 총사장 등과 함께 평양 순안공항에서 12인승 헬기를 탔다. 북한에서 직승기(直昇機)라고 불리는 이 ‘잠자리 비행기’는 1시간 만에 마식령을 넘고 원산시 상공을 통과해 해안선을 따라 내려와 고성군 온정리에 착륙했다. 헬기가 금강산 상공을 한 번 선회한 뒤 착륙하자 온정리 주민 2백명쯤이 구경을 나왔다. 온정리는 금강산 입구여서 관광객의 왕래가 잦지만 헬기를 타고 온 관광객은 우리가 처음인 듯한 눈빛이었다.

우리는 곧바로 미니 버시를 타고 금강산호텔로 가 짐을 풀고 근처의 금강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50년대에 지은 이 12층짜리 호텔 내부 시설은 백두산 베개봉호텔과 비슷했다. 호비에는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인민들을 현지 지도하는 모습을 그린 큼지막한 유화가 걸려 있었다. 동해에서 갓 잡아올린 싱싱한 해물로 점심을 든든히 먹은 우리는 오후 2시부터 만물상(萬物相)이 내려다보이는 천선대(天仙臺) 등정 길에 올랐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만상정(萬相亭)턱밑까지 난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20분쯤 미니 버시를 타고 갔는데, 동행한 금강산 안내원 김연실씨(25)는 얼굴도 고왔지만 말품새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금강산은 계절에 따라 자기 이름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봄(금강산) 여름(봉래산) 가을(풍악산) 겨울(개골산)을 다 봐야 ‘다’ 자(字)를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들은 세 번은 더 오셔야 ‘다 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간 재치 있는 말재간이 아니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 서울 촌놈들아 어디 가서 금강산 봤다고 깝죽대지 말라’는 말일 수도 있겠는데, 실제로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금강산은 크게 외금강ㆍ내금강ㆍ해금강으로 나뉘는데 이 중 외금강ㆍ해금강은 주로 고성군에, 내금강은 금강군에, 그리고 해금강은 일부인 총석정은 통천군에 속했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 가서 본 것은 여름 금강산(봉래산)의 외금강과 해금강 일부에 불과했다.

김씨는 자신을 주로 귀한 손님(VIP)들을 접대하는 ‘안내 강사’라고 소개했는데, 안내 일로 하루 평균 두 번 금강산에 오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등산과 입담으로 단련된 김씨는 안내 해설을 한 뒤에 날랜 암사슴처럼 총총걸음으로 앞서가 다음 안내 해설이 필요한 장소에서 처진 ‘서울 촌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김씨는 등산 도중에 금강산의 식생에서부터 전설에 이르기까지 온갖 재미난 것을 들려 주었는데, 그중에서도 귀가 번쩍 뜨인 것은 금강산 호랑이 목격담이었다.

북한 여성 안내원 광고 모델로 쓰기로 다짐
“금강산에는 식물이 1천2백여 종 살고 있고 범ㆍ곰ㆍ노루 등 짐승이 68종 가량 살고 있습니다.…”

내가 말을 끊고 금강산에도 호랑이가 사느냐고 묻자, 그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호랑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새끼밖에 못보았답니다. 새끼가 어찌나 깜찍한지…. 그런데 범은 꼭 멀리서 새끼를 감시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어미가) 무서워서 가까이는 가지 못했지만 제가 2년 전에 개만한 새끼 두 마리를 직접 봤습니다.”

나는 다음번에 금강산에 광고 촬영하러 올 때는 혹시 금강산 호랑이를 ‘운 좋게’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때는 화장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안내 강사’를 광고 모델로 픽업할 작정이었다.

고개를 들어 골짜기 왼쪽을 보니 상관음봉(1천 1백32m) 절벽 아래에 만물상을 지키는 무사바위가 첫눈에 들어왔다. 투구를 쓴 장수 형상이 영락없이 만물상을 지키는 초병(哨兵)이었다. 이어 길을 틀어 만물상 입구에 드니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는 삼선암(三仙岩)과 험악한 귀신 얼굴을 한 귀면암(鬼面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삼선암 맞은편에는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독선암이 있다.

옛날 옛적에 네 신선이 금강산에 내려와 장기를 두었는데 그중 한 신선이 유난히 훈수 두기를 밝히는 바람에 미움을 받고 밀려나 혼자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돌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지만, 신선들도 장기 훈수만큼은 못참았던 모양이다 머리에 둥근 바위를 얹어 괴상 망측한 귀면암인지 귀두암인지를 지나니 계곡 양켠에 7층 석탑처럼 생긴 칠총암과 도끼로 찍어낸 듯 흠이 팬 절부암(折斧岩)이 서 있다. <선녀와 나무꾼> 설화에 나오는 노총각 나무꾼이 산 위의 선녀를 만나기 위해 도끼로 바위를 찍으면서 올라갔다는 전설이 얽힌 바위이다. 전설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이 나무꾼은 콕 클라이밍(암벽 타기)의 원조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찍으라는 나무는 안 찍고 애꿏은 바위를 찍었으니 사랑 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호색한은 아니었을까.

쓸데없는 상념 탓인지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다행히 지금까지 힘들여 올라온 사람들이 마음놓고 구경할 수 있다 하여 안심대(安心臺)라고 부르는 쉬어 가는 길목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숨을 고르고 ‘하늘문’이라고도 부르는 돌문(천일문)을 통과하니 천태만상이 조각된 만물상 전경이 보이고, 목적지인 천선대(9백36m)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금강산 경치가 하도 좋아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너럭바위 언덕이다. 만물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이 전망 좋은 바위에서 본 만물상은 그 생김생김이 마치 세상 만물을 한곳에 모아 놓은 것 같은 ‘바위 백화점’인데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자연 ‘통바위’라니 믿기지 않았다.

이 다음에 또 온다고 하지만 이 대목에서 기념 사진을 안 찍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박전무와 나는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 216호’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는 천선대에서 우리 회사 깃발을 펼치고 아자 광고사업의 성공과 민족의 화해협력을 기원하는 기념 사진을 찍었다. 우리 일행의 작업(비디오 및 사진 촬영)과 관광 활동을 찍어 주기 위해 금강산총회사의 마음씨 좋은 장선생이 메고 온 무거운 베타캠(ENG 카메라)도 바삐 움직였다. 우리를 안내한 김연실씨도 우리의 경탄에 신이 난 듯 경관 자랑이 대단하다.

“만물상은 날씨 따라 시각 따라 자기 모습이 다르답니다. 그 천태 만상이 천선대에서 봐야 다 보입니다. 그래서 천선대에 앉으면 누구나 경치를 두고 떠나지 못해 자연히 돌부처가 된답니다.”

“안개구름이 이슬 되고, 이슬이 모여 폭포 이룬다.”
멀리 서남쪽으로 관음연봉ㆍ집선봉ㆍ체하봉ㆍ장군봉ㆍ월출봉ㆍ비로봉ㆍ옥녀봉ㆍ영량봉ㆍ상등봉에 안개구름이 갰다가 흐렸다가 하는 품이 마치 안개 바다에 섬이 떴다가 잠겼다가 하는 것 같았다. 눈치 빠른 안내 강사는 이내 “금강산에서는 안개구름이 이슬이 되고 이 이슬이 모여 폭포를 이룬답니다”하고 말했다. 어느덧 동쪽으로는 짙푸른 동해가 걸려 있었다. 한나절 산행으로 벌써 살갑게 가까워진 남쪽의 ‘선생님’들과 북쪽의 ‘안내원 동무’들은 버스 안에서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과 금강산 백도라지가 원조라는 <도라지 타령>을 함께 부르면서 호텔로 돌아와 라돈 온천에서 여독을 풀었다.

다음날 등반은 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원조인 팔담(八潭)까지의 지형이 험한 구룡연(九龍淵) 코스를 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했다. 전날처럼 구룡연 코스 입구인 목란각 정자 아래 주차장까지 15분쯤 미니 버스로 이동한 뒤 등반을 시작했다.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돌문인 금강문을 지나니 옥류동(玉流洞)이 나타났다. 옥처럼 맑은 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린다는 옥류동은 금강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짜기로 꼽히는 곳이었다. 경관 때문인지 아니면 마침 당일이 북한의 공휴일인 청년절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전날에 비해 많은 학생과 군인(3백여 명)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말을 걸면 피하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또 군데군데 모여 앉아 음식을 먹거나 춤을 추는 모습이 우리와 같았다.

옥류동 골짜기를 오르니 연주담과 비봉(飛鳳)ㆍ무봉(舞鳳) 폭포가 차례로 나타났다. 금강산에서 가장 높다는 비봉폭포(1백39m)를 타고 오르니 이내 또 폭포가 눈에 들어왔다.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한국 3대 폭포의 하나인 구룡폭포이다. 높이(74m)는 비봉만 못하지만 폭포 절벽과 바닥이 거대한 한덩이의 화강암으로 된 세계에서 보기 드문 폭포라고 한다. 이 폭포 밑이 깊이 13m 구룡연이고, 그 위에는 크고 작은 깊고 푸른 빛 소(沼) 8개가 층층로 잇달아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팔 선녀의 목욕터로 유명한 팔담인데, 그중에서 세 번째 소가 가장 깊고(11m) 푸르렀다. 혹시 선녀 가문에서도 셋째딸을 최고로 치는 것은 아닐까. 아래 주차장에서 팔담까지의 거리는 이정표 상으로 3천8백60m인데, 17개나 있는 70~80도 경사의 가파른 길이어서 무려 40분이나 걸렸다. 무릇 귀한 것을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자연의 섭리였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선녀와 나무꾼 전설이 서려 있는 상팔담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촬영할 데모 테이프를 머리 속으로 구상해 보았다. 일부러 안내 강사에게 요청해 남한 주민들에게 들려 주고 싶은 소감도 비디오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다소 멋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루빨리 조국이 통일되어 조국의 모든 인민들이 이 아름다운 금강산에 오셔서 제가 안내하게 되길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금강산 개발은 민족 전체의 사업
팔담을 한바퀴 돌도 내려오니 구룡연에 휴가 나온 군인들이 보였다. 우리가 테스트용으로 가져간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주자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북한에 ‘1분계 필름’이라고 부르는 즉석 사진기(일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주민한테는 귀한 물건으로 보였다. 우리는 길을 되짚어 내려와 목란각 근처 계곡에서 금강원 식당 주방장이 준비한 해물 요리 점심을 먹었다. 한국에서도 유행하는 조개구이와 오징어구이였는데, 땅바닥에 쇠그물을 깔고 그 위에 조개의 아가리가 밑으로 가게 눕히고 위에서 조금씩 휘발유를 뿌려 익혀 먹는 특이한 요리였다. 해금강에서 채취한 동해 대합이라고도 하고 석조개라고도 했는데, 그 위에 연신 휘발유를 뿌려대니 영락없이 ‘불타는 조개'였다.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금강산 마지막 코스인 삼일포(三日浦)로 향했다. 도중에 태창이 지은 금강산 샘물 공장이 눈에 띄었다. 신라 화랑 4명이 당일치기로 놀러갔다가 절경에 취해 3일이나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 민물 호수는 관동팔경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가뭄 탓인지 수면이 많이 낮아져 물은 별로 맑지 않았다. 보트놀이나 낚시를 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제법 있었는데, 안내인의 말로는 중국인들은 제법 오고 일본인들은 조금 오는데, 중국인들은 돈을 별로 안 쓰기 때문에 일본인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호텔에 돌아오니 수학여행 온 일본 조총련 학생들과 대만 단체 관광객 등 백명쯤이 투숙해 있었다. 우리는 금강산온천에서 여독을 풀고 다음날 아침 9시에 평양으로 출발했다. 날씨 때문에 헬기가 이륙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금강산총회사측이 준비한 벤츠 3대와 미니 버스로 원산을 거쳐 평양으로 향했다. 금강산~원산 도로는 콘크리트 포장으로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고 금강산~원산 전기식 철도 역시 온정리역을 제외하고는 전구간 운행되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 유심히 살펴본 정주영 회장의 고향인 통천의 조선소는 가동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곧 금강산 관광 길이 열리고 개발이 시작되면 통천의 조선소도, 장전의 항구도, 그리고 원산의 공장들도 활기를 되찾을 것이다. 금강산 유람선은 강원도 속초(동해)~장전을 운항할 예정이다. 강원도는 분단된 남북이 같은 이름을 쓰는 유일한 행정 구역이다. 그래서 정주영 회장이 발심(發心)한 ‘강원도의 힘’이 좋은 결실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자가 계획한 금강산 프로젝트는 물론이지만 현대의 그것도 이미 한 기업의 사업이 아닌 겨레의 염원을 담은 민족 사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리ㆍ김 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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