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먼동 트는 ‘비극의 섬’ 동 티모르
  • 최영재 기자 ()
  • 승인 1998.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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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 퇴진으로 ‘탈식민지’ 전기…인도네시아 · 포르투갈 협상에 달려

인구는 80만명 가량이고 크기는 제주도의 5배 정도이다. 이 조그만 섬 동(東)티모르가 90년대 이후 국제 사회의 조명을 받은 것은 순전히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불행 때문이었다. 대량 학살과 인권 탄압으로 이어진 인도네시아의 식민 통치가 저항 운동을 불러, 96년에 독립운동 지도자 두 사람이 노벨 평화상까지 탔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동 티모르를 무력 침공한 수하르토가 쫓겨났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고 있는 인도네시아가 인권 탄압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마냥 모른  체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6월 인도네시아의 하비비 대통령은 동 티모르를 인도네시아 영토에는 포함하되 ‘특별 지위’를 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 독립운동을 이끌고 있는 카를로스 시메네스 벨로 주교를 만나 동 티모르 주둔 병력을 일부 철수하고 투옥한 정치범도 일부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유엔도 동 티모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하비비 대통령의 발표가 나오자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잠쉬드 마커 유엔 특사를 세 당사자인 포르투갈·인도네시아·동 티모르로 보내 중재에 나섰다. 또 그 자신이 9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호세 라모스 오르타와 카를로스 시메네스 벨로 주교 등 독립운동 지도자를 만나기로 했다.

 드디어 8월5일, 동 티모르의 신구 지배자인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는 유엔 본부에서 동 티모르 문제를 논의하는 외무장관 회담을 열었다. 동 티모르는 74년까지 4백년 동안 포르투갈 지배를 받았고, 76년부터 인도네시아의 통치를 받았다.

 이 회담에서 두 나라는 동 티모르에 제한적인 자치를 부여하는 것을 검토하기로 합의했다. 양국 외무장관은 또 협상에 동 티모르인을 참여시키고, 동 티모르 정치범을 석방하는 문제도 다루자고 뜻을 모았다. 두 나라는 이 자치 협상을 올해 안에 타결할 것으로 알려졌다.

인권 탄압 · 내부 이견 걸림돌도 많아
 이 날 합의된 잠정 자치안은 두 나라가 조금씩 양보한 결과이다. 그동안 포르투갈은 74년에 이미 식민 정책을 포기했기 때문에, 동 티모르가 자결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입장이고, 인도네시아는 국내 문제라고 버텨 왔다. 이번엔 포르투갈은 자결권 회복이라는 기존 주장을 철회했고, 인도네시아는 이 문제를 제3자 중재에 맡기고 협상 여부에 따라 투옥된 동 티모르 지도자 자나나 구스마오를 석방할 수 있다고 물러섰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외교·국방·통화 정책을 빼고 광범위한 자치를 허락하되 현지 주둔군을 모두 철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또 동 티모르인들의 염원인 독립 찬반 투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자치 협상 합의를 두고 ‘중요한 진전’ 이라고 평가 하면서도 돌파구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만큼 자치 협상의 앞길은 험난한 셈이다.

 코피 아난 총장의 걱정은 현재 동 티모르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더라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8월8일까지 동 티모르 주둔 병력 천여명을 철수시켰다. 위란토 국방장관은 주둔군을 철수시키면서 “동 티모르는 최근 사회·정치·안보·복지 면에서 많이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더 이상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 티모르에는 아직도 만명 가량의 병력이 주둔해 있다. 더구나 인도네시아 당국은 철수한 군 병력보다 더 많은 경찰 병력을 동 티모르에 투입하고 있다.

 또 주둔군이 독립운동 단체와 민간인에게 저지르는 인권 탄압도 그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동 티모르 독립운동 단체는 인도네시아 주둔군이 동 티모르 여성을 성고문한 뒤 살해하는 사진을 공개한 적이 있다. 이 단체 관계자에 따르면, 경제난 때문에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인도네시아 주둔군들이 이런 끔찍한 사진을 돈을 받고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또 8월3일자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인도네시아 당국이 동 티모르 독립운동가들을 감시하기 위해 비밀 경찰과 스파이 조직을 운용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인권 단체들은 이 스파이들이 지금까지 동 티모르에서 벌어진 체포·고문·살해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인도네시아는 동 티모르에 대한 식민 통치 사슬을 좀처럼 풀지 않을 작정이다.

 더 큰 문제는 동 티모르 사람조차 자신들의 장래에 관해 입장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 통치를 받는 현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과 완전 독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 있는 상태이다. 또 무장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단체가 있는가 하면 외교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측도 있다. 여기에 유엔 평화유지군 감시 아래 과도 체제를 겪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견해도 있다. 더구나 아직까지 확실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없다. 호세 라모스 오르타와 벨로 주교 같은 사람이 있지만 리더십이 부족하다. 현재로서는 투옥된 자나나 구스마오가 가장 확실한 지도자이다.

 수하르토의 갑작스런 퇴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은 동 티모르 사태. 올해 말까지 포르투갈과 인도네시아가 벌이는 협상을 통해 이곳 사람들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정적 당사자인 동 티모르인들은 아직까지 이 협상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동 티모르 사태는 남의 일 같지 않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겪었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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