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산업 빅딜, 정부 시나리오 있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8.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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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원부 작성 <산업 구조 조정 방향> 문건 단독 입수 / 재계 수용 여부는 미지수

정부는 단순히 일부 업종에서 주요 재벌들의 빅딜(대규모 업종 맞교환)만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과잉 · 중복투자된 주요 산업을 총체적으로 구조 조정하려고 계획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부실 산업의 경우에는 그동안 논의되어 왔던 특정 업체 교환 외에 합병 · 매각 · 퇴출과 같은 강력한 구조 조정을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시사저널>이 단독 입수한 산업자원부(산자부)의 <산업 구조 조정 방향>문건에 따른 것이다. 산업자원부(산자부)가 최근 작성한 이 문건은 자동차 · 조선 · 철강 등 과잉 · 중복투자가 심한 10대 산업의 구조 조정 방향을 담고 있다. 이는 지난 8월 4일 박태영 산자부장관이 대통령에게 주례보고 할때 ‘10대 산업에 대한 과잉 · 중복 투자 여부를 가려내 장래의 산업별 수요와 공급을 분석한 뒤 대기업간 빅딜 등 구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겠다’로 말한 뒤 나온 것이다.

 10대 산업 구조 조정에 대한 산자부의 최종안을 담은 이 문건은 아주 구체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일부 언론에도 흘러나온 초안의 경우 10대 부실 산업의 구조 조정 방향을 담고는 있었지만, 특정 업체 교환이나 합병 · 매각 · 퇴출 같은 미묘한 안을 포함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 최종아느이 경우 산업 별로 문제가 있는 업체의 퇴출이나 매각, 공장 폐쇄까지 거론하고 있다.

문제업체의 퇴출 · 매각 · 공장 폐쇄까지
 예를 들면, 삼성자동차가 기아를 인수하지 못할 경우 퇴출을 유도해야 한다거나, 한라중공업과 삼성중공업 조선 부문은 각각 현대와 대우가 인수해야 한다는 식이다. 해당 업체들로서는 치명적인 내용이어서 앞으로 논란을 예고한다. 석유화학을 단지 별로 합병해야 한다거나, 한국중공업의 선박용 엔진과 현대중곡업의 발전 설비 부문을 맞교환 해야한다는 대목도 들어 있다. LG 전자의 컴퓨터 사업부문은 매각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물론 산자부는 이런 조처들에 대해 ‘퇴출을 유도한다’는 표현을 써, 과거와 같이 강제적인 구조 조정 조처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재벌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산자부의 이 방침이 단순히 안으로만 그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산자부는 최근 빅딜을 추진하는 재계와 직접 접촉하는 일선 부서로서, 사전 협의 과정에서 전경련과 주요 그룹들에 산자부의 안을 구조 조정 기준으로 삼게 할 수도 있다. 이점은 정부 관계자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산자부 구조 조정안에 밝은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 기업에 빅딜을 포함해 구조 조정안을 맡겨두었는데 전혀 진행되지 않아, 정부가 나름으로 방향을 정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빅딜이나 10대 산업 구조 조정안에 대한 정부의 공식 입장은, 재계와 협의는 하되 각 기업이 알아서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산자부의 이 방침은 사실상 빅딜 · 산업 구조 조정과 관련해 특정 업체의 존폐와 관련한 사전 시나리오가 존재한다는 의혹을 살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70-80년대 산업 합리화 조처때와 같이 정부가 과거로 회귀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도 있다. 과거에 정부가 강제로 추진했던 산업 합리화는 후에 특혜 의혹과 각종 소송으로 당초 의도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게다가 지금은 과거처럼 그런 안을 강제하기도 쉽지 않다. 정부는 8월 들어 10대 산업 구조 조정방침을 공식화하기 시작할 때부터, 머지 않아 재계 · 학계 · 연구소를 비롯한 관계 기관들을 참석시켜 공개 토론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재계는 현재 정부의 성화와 여론에 못이겨 2-3건의 빅딜을 추진하고 있지만, 산자부의 방침을 전폭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26쪽 딸린 기사 참조). 따라서 산자부 안이 그대로 현실화할지는 의문이다.

 당초 산업 구조 조정 논의는 몇몇 산업과 그룹의 빅딜 문제로 출발했다. 물 밑에서 지지부진하게 이루어지던 빅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8월 3일 김대통령의 발언이 전해지면서였다. 이날 김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정부와 재계간의 5대 합의 사항 중 재벌 구조를 주력 기업 중심으로 개편하는 문제가 지지부진하다”라고 말하며 빅딜성과가 눈에 드러나게 해 달라고 촉구했다. 또한 “과거 경험을 보면 재벌 개혁을 한다고 했다가 여론이 수그러지면 흐지부지하고 말아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라고 말해, 강력한 재벌 개혁 의지를 나타냈다. 그러자 각 경제 부처 장관들이 대통령의 이 말을 거들고 나섰다. 6일 이규성 재경부장관은 “5대 그룹의 빅딜을 자율에 맡겼다고 해서 정부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기다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기업 빅딜 한계 극복 · 재계 압박 노린 ‘이중 포석’

 빅딜 논의가 10대 산업 구조 조정 방침으로 확대된 것도 이 무렵이다.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은 지난 5일 기자 간담회를 통해 과잉 · 중복 투자가 극심한 부실 산업의 구조 조정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같은 날 박태영 장관도 대통령에게 이같은 방침을 보고하면서, 곧 구체적인 안을 만들겠다고 했다. 산자부 내의 해당 국별로 진행된 실태 조사 결과 10대 부실 산업의 내용이 일부 바뀌었다. 당초 포함될 것으로 알려진 시멘트 대신 LCD(액정화면)와 브라운관 산업이 추가되었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렇게 빅딜 논의가 부실 산업 구조 조정논의로 바뀌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빅딜 안이 재벌들의 과잉 · 중복 투자로 야기된 공급 과잉 문제를 푸는 데는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빅딜이 이루어져 어떤 재벌 그룹들끼리 게열사나 사업 부문을 맞교환하더라도, 공급 과잉 상황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빅딜과는 별도로 설비 · 인원을 폐쇄하거나 감출할 경우에만 해결될수 있는 문제다. 따라서 남아도는 설비와 인원을 어떻게든 정리하려면 빅딜 논의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더 적극적으로 기존 업체를 퇴출시키거나 매각하는 방안, 일부 설비를 폐쇄하는 방안 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 번째로, 빅딜조차 거부하는 재계를 압박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구조 조정안을 동원해야 했다.

 <산업 구조 조정 방향>에 따르면, 정부의 문제의식은 10개 산업(자동차 · 조선 · 철강 · 석유화학 · 발전 설비 · 철도 차량 · 항공기 · LCD · 브라운관 · 컴퓨터)의 경우 공급 과잉 상태가 심각하고, 장기적으로 이런 상황이 개선될 여지도 크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청도 차량은 국내 수요의 4배에 이르는 공급 능력을 갖고 있고, 발전 설비는 3배에 달한다. 자동차 산업은 내수가 침체해 본격적으로 공급 과잉 상태에 접어들었고, 그나마 아직까지는 호황을 누리고 있는 조선산업도 2000년대 초반부터는 공급 과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산자부가 작성한 <산업 구조 조정 방향>에 나타난, 논란이 될 만한 구조 조정 방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전체적인 안은 23-25쪽 표 참조).

 ● 자동차 : 공급 과잉 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한 자동차산업은 역시 기아 · 아시아 자동차 처리 결과에 따라 구조 조정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2개 체제로 가든 3개사 체제로 가든 국내 자동차산업은 장기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있다. 다만 삼성이 기아 인수에 실패할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삼성자동차가 현재와 같은 독자적인 생산 체제를 유지하면 경영 부실만 심해질 우려가 있으므로 퇴출을 유도해야 한다.
 ● 조선 : 현재 일본에 이어 시장 점유율이 세계2위이다. 그러나 5개 사 체제로 인해 수주 경쟁이 심해져 선가(船價)가 떨어지고 업체들의 채산성이 악화하고 있다. 따라서 산자부는 현재의 5개 사를 3개 사로 줄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에 따라 이미 부도가 난 한라중공업과, 부채 비율이 높고 적자가 심한 삼성중공업을 우선 매각 대상으로 꼽았다. 산자부안에는 이 두 업체를 각각 현대와 대우중공업이 인수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지난해 1월 부도 난 중형급 조선소 대동조선은 부지난을 겪고 있는 한진중공업에 넘겨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철강 : 일부 제품군에서 공급 과잉이 표면화하고 있으며, 전기로 제강 업체와 특수강 업체는 대부분이 부실해졌다. 따라서, 일부 부문의 설비조정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동부제강과 현대강관의 신규 냉연 강판 공장은 해외에 매각하고, 동국제강의 중후판 노후 설비는 폐쇄하자는 것이 산자부안이다. 철근을 생산하는 전기로 제강업체는 조기에 퇴출시켜야 한다.
 ● 석유화학 : 지나친 시설 확장에다가 수출 신장세 유지가 불투명해 과잉 공급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울산(SK · 대한유화)과 여천(대림산업 · 한화종합화학 · LG석유화학 · 호남석유화학), 대산(삼성종합화학 · 현대석유화학)으로 나뉘어 있는 유화 업체 8개를 세 지역 별로 합병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 산자부 안이다.
 ● 발전 설비 : 전세계적인 공급 과잉으로 가격파괴가 계속되고 있다. 국제 경쟁력이 있는 한국중공업을 전문화하기 위해 한중의 선박 엔진과 현대중공업 발전 설비 부문을 맞교환하도록 한다.
 ● 철도 차량 : 공급 능력이 국내외 수요의 3배에 이르는 대표적인 과잉 설비 산업. 현대정공과 대우중공업의 해당 부문을 합병해 세계적 철도 차량업체로 육성한다.
 ● 항공기 : 항공기산업은 국내 시장이 형성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4개 사가 난립했다. 기체(機體)업체 공동으로 단일 회사를 세워, 모든 자원을 결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산자부의 판단이다(4개 업체들은 이미 이 안을 놓고 상당 기간 협의해 왔기 때문에, 이 부문에서는 쉽게 빅딜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 LCD : 고급 기종은 경쟁력을 확보한 반면 저급 기종은 경쟁력이 미흡하다. 따라서 저급 기종을 생산하는 현대전자와 오리온전기의 해당 부문을 해외 기업과 합병하거나 매각하도록 유도한다. 같은 품목을 중복 생산하고 있는 LG전자와 LG반도체도 합쳐야 한다는 것이 산자부의 복안이다.
 ● 브라운관 : 다소 공급 과잉을 보이고 있으나 참여 업체 대부분이 국제 경쟁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3사 체제를 유지하되, 경쟁력이 떨어지는 각사의 저급품 부문만 해외 이전 또는 매각하도록 한다.
 ● 컴퓨터 : 수직 통합된 대기업들이 참여하고 있으나 이들은 저비용 생산과 수용 변화에 대한 대응 능력이 떨어져 채산성이 악화하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PC) 부문의 4개 주요 업체 가운데 전반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LG전자는 해외 매각을 추진하도록 한다. 또 중 · 대형 컴퓨터 부문은 같은 그룹의 시스템 통합(SI) 업체들과 통폐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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