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회계사들 “아, 옛날이여”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9.03.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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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감 감소 · 인력 증가 · 부실 감사 징계 강화 3중고에 허덕… ‘부인부 빈익빈’ 가속화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주홍 글씨>에서 여주인공 헤스터 프린은 가슴에 ‘A’라는 글자를 달고 다녔다. 남편이 아직 마을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목사와 간통한 죄값을 받은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에 들어선 뒤, 공인회계사드르이 처지가 바로 이렇다. ‘자본주의의 파수꾼’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감사 대상 기업과 ‘간통’해 회계분식을 묵인 · 방조한 죄값으로 ‘부실 회계’라는, 지울 수 없는 꼬리표를 달게 된 것이다.

 한국을 환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기아 · 아시아 자동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91년부터 두회사가 회계를 조작해 손실 규모를 줄인 액수가 4조5천억원이나 되었다. 이 덕에 두 회사는 ‘국민기업’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두 회사를 감사했던 회계법인은 청운과 산동. 지난해 말 증권감독원은 이들 두 업체에 무거운 제재 조처를 내렸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었지만, 청운회계법인은 그 뒤에도 대우통신의 97년 회계 감사를 부실하게 한 ‘여죄’가 밣혀져‘1개월 영업 정지’라는 사상 초유의 수모를 겪었다.

 이같은 부실 회계각 일부 회계법인 또는 일부 공인회계사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지난해 감사대상 회계법인 7천7백여 개 가운데 ‘적정’판정을 받았는데도 부도 난 업체가 10%정도나 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정부 · 금융 당국도 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시로 지침을 바꾸며 감각상각 비용 등을 변칙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불법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편법을 방조해, 총체적이 부실로 이어지는 데 한몫 단단히 거들었던 것이다.

부실 회계 ‘전과’가 부른 자업자득?
 이같은 부실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공인회계사 업계에 타격을 가했다. 기업체들의 연이은 도산으로 감사 대상 업체(자본금 60억원 이상인 업체는 의무적으로 감사를 받아야한다)가 대폭 줄어든 것이다. 게다가 국내 회계사들이 작성한 감사 보고서는 이제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불신을 받게 되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제시하는 감사 보고서에는 반드시 외국 회계법인의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고 못박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국내 회계법인이 ‘숙제’한 것을 외국 회계법인들에게 ‘검사’맡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국내 회계사들을 도저히 못 믿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감사 보고서를 믿고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투자자가 제소할 경우 숙제를 검사한 외국 회계법인에도 책임을 지우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내 회계사 업계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빈익빈 부익부 현사이 극심해진 것이다. 우선 외국의 빅5 회계법인과 제휴한 삼일 · 세동+안진 · 안건 · 산동 · 영화 회계법인은 IMF 관리 체제에서도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지난해부터 꼬리를 물고 있는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위한 실사 작업은 IMF 시대의 새로운 일감인데, 이 시장을 국내 빅5가 독식하다시피 하게 된 것이다. 대신 이들은 이름을 빌려주고 선진 회계기법을 제공한 대가로 외국 회계법인ㄷ들에 막대한 ‘수업료’를 지불하고 있다.

 그나마 나머지 회계법인과 회계사들은 IMF관리 체제를 맞아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번듯한 외국 회계법인과 제휴하지 못했다는 ‘죄’ 때문에, 금융기관 · 상장사 등을 포함한 중 · 대형 업체들의 회계 감사를 맡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공인회계사들의 봉급을 줄이는 곳이 대부분이고, 심한 경우에는 제때 봉급을 지급하지 못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한 공인회계사는 “요즘에는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를 피하게 된다. 모임에 나가면 잘 나가는 줄 알 고 당연히 밥값 · 술값을 낼 것으로 기대하는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형편이 못된다”라고 실토했다.

 최근 세동회계법인과 안진회계법인이 서둘러 합병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외국 회계법인과의 제휴 여부가 목줄을 죄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 세동은 프라이스 워터하우스(Pw)와 제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회사가 삼일회계법인과 제휴하고 있던 쿠퍼스 앤드 라이브랜드(C&L)와 합병해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PwC)로 탈바꿈하면서 국내 빅6 사이에 지각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PwC는 세동에 삼일과 합병하라고 요구했는데, 양측의 의견 차이로 합병이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자 외국 빅5와의 제휴가 결렬될 위기에 몰린 세동이 안진에 손을 내민 것이다. 양측은 현재 3월 말까지 통합 작업을 마무리짓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고, 안진의 제휴사인 아더앤더슨(AA)으로부터 공동으로 회계 서비스를 지원 받기로 했다.

 이같은 지각 변동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내 공인회계사들에게 ‘화려한 날은 갔다’는 것이다. 한국공인회계사회 류태우 기획부장은 국내 공인회계사업계의 3중고를 지적했다. 감사 대상 기업이 줄었는데, 매년 시험에 합격한 신규 인력 5백명이 업계에 진출하고 있고, 부실 감사에 대한 징계마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 회계법인과 제휴 못한 업체는 찬밥 신세
 여기에다 지난해 12월 국회에 제출된 ‘주식회사 외부 감사법 개정안’이 회계사들을 주눅 들게 하고 있다. 이 개정안은 올해 상반기 중에 통과될 예정인데, 요지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는 현재 3년으로 되어 있는 감사 계약 기간을 1년으로 단축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회계 감사를 잘못했을 경우 감사인을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도록 외부 감사인 선임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 법안이 그대로 통과될 경우, 공인회계사 업계는 추가로 타격을 입울 수 밖에 없다. 올해부터 감사 보수(報酬)가 완전 자율화하는데, 감사 계약기간까지 1년으로 단축되면 회계법인들은 매년 치열한 수주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회계법인들의 수입이 늘어날 가망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외부 감사인 선임위원회의 위상이 강화되면 빅5를 제외한 나머지 회계법인과 회계사들은 더욱 설 자리가 줄어들 전망이다. 감사인 선임 위원회에는 금융기관 대표가 포함되게 되어 있고, 이들이 감사인 선임을 주도하도록 되어 있다. 상식으로 보건대, 이들은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금융기관과 계약 관계를 맺고 있는 회계법인을 선호할 공사이 크다. 현재 금융기관에 대한 감사는, 소속 공인회계사가 백명 이상이고 외국 회계법인과 제휴한 대형 회계법인만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외국의 빅5와 제휴한 국내 빅5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나머지 중소 업체에 소속된 회계사들은 찬밥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내 개업 회계사들의 분포를 보면, 빅5와 제휴한 대형 회계법인에 40%가 속해 있고, 60%는 나머지 26개 국내 회계법인에 소속되어 있거나 개인 사무실을 열고 있다. 신한회계법인 최종만 이사는 “갈수록 상황이 열악해지고 비전을 찾기도 힘들게 되자, 미국공인회계사(AICPA)시험을 준비하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직할 것을 고려하는 젊은 회계사 늘고 있다”귀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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