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가 애국자 심사
  • 오민수 기자 ()
  • 승인 2006.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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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독립유공자 40여명··· 보훈처, 공적 자료·심사기준 공개 안해 의혹


 

 정부가 1962년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분들의 고귀한 위훈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 시키기 위해” 실시해온 독립 유공자에 대한 포상제도가, 정작 수혜자안 독립유공자나 그 후손들로부터 원성을사는 대상으로 변질됐다.

 92년 12월 현재까지 포상받은 독립 유공자 6천77명중에는 ?독립운동을 한 흔적이 전혀 없는 가짜 ?광복이후 누런 높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실제 공적보다 높게 평가된 독립유공자 ?친일행적이 뚜렷하게 드러난 일부 친일파 들이 포함되어 있다. 국민하교 1학년생도 대답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새삼 부끄러워지는 세상이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했지만 포상신청서를 내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 유학생 항일운동 조직에 가담했던 민주당 홍영기 의원(74)이 그렇다. 학생운동 조직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른 홍의원은 “애초 상을 받으려고 독립운동한 것도 아닌데다가 몇몇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랍시고 더럽히고 싶디 않아서”포상 신청을 하지 않았다.

 전 광복회장 이강훈(91)은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었는지 먼저 간 선배 열사들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독립유공자 중에 민족반역자가 있다는 것은 이제 세상이 다 아는 얘기다. 괜히 이름을 들먹거려 원수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묻지 말라”고 말한다.

 불신의 뿌리는 포상제도 실시 초기인60년 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0년대에는 세차례에 걸쳐 62년  2백4명, 63년 2백62명, 68년 81명이 각각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는데 당시 독립유공자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백지 사건’에 대한 소문이 끊임없이 너돌았다. 백지 사건이란 독립유공자 2명 이상의 증언만 있으면 포상을 받을 수 있던 관행을 일컫는 말인데,  이 때문에 공적이 불분명한 인물이나 일부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변신하는 게 가능했다. 심지어 포상과 관련해 “돈 거래가 있는게 아니냐” 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식민사관 장본인이 자격 심사위원

 60년대에 시작된 가짜 독립유공자 논란은 80년도에 들어서면서 표면으로 떠올랐다. 5공화국 출범 직전, 국보위는 독립유공자 중에 가짜가 많다는 진정서를 접수하고 문제가 된 1백여명을 대상으로 조사에 나섰다. 국보위는 가짜 독립유공자에게 수여한 훈포장을 박탈하면 전직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된다는 점 때문에 구체적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때의 조사에서 약 40여명이 가짜로 드러났다고 한다.

 이처럼 독립유공자 포상에 친일파가 포함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가 있다. 바로 독립유공자를 뽑는 자격심사위원회에 명백하게 친일 행위를 한 유명 인물들이 끼여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친일파가 애국자를 가려내” 웃지 못할 형국이 벌어졌던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평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재야 사학자 고 임종국씨가 살아 있을 때 심사위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채 지적한 적이 있었고, 최근에는 그의 뜻을 잇는 젊은 연구가들에 의해 완전한 이름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62년 문교부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조아위원회 명단 7명 속에 ***와 ***가 들어 있다. 신석호는 30∼37년 총독부*****를 거쳐 37년부터 ***으로서 조선역사를 왜곡하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이병도는 25∼27년 총동부 수사관보로, 그 이후는 촉탁으로 조선사 편수회에 참가했었다. 모두 이 땅에 식민지사관을 뿌리내린 장본인이다.

 63년에는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심사를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가 맡았다. 이때 심사위원 22명 중에는 高○* 신석호 *** *** 4명이 끼여 있다. 언론인 고○욱은 39년 7우러12일 결성한 ******* 상무이사 및 같은 해 8월5일 결성한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 상무이사를 했었다. 같은 언론인인 유광열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편집국장으로서 37년 9월부터 일본군의 종군기를 썻으며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과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역임했다. 그는 일제 말에 친일 논설을 많이 썻다.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이갑성은, 임정요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상해에서 이와모토라는 창씨명으로 행세하며 밀정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다. 그는 나중에 광복회 초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광복회 관계자는 기자에게 “그 전에는 다 그런 것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68년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에서 심사를 맡았는데, 이때의 심사위원 21명 중에 친일행적이 있는 사람은 고○욱 유광열 이병도 신석호 白** 李** *○仁 金聖* 등 8명이었다. 백낙준은 42년 4월29일 창간한 《기독교신문》 편집위원으로서 기독교 황민화에 앞장선 혐의를 받고 있다.이선근은 32년7월25일 발족한 만주국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만주제국협화회 전국연합협의회’ 협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홍○인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회부장과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를 지냈다. 한편 최근 친일행적이 밝혀진 김성균은 광복 직전 10년간 총독구 경무국 도서과에서 반일 · 반체제 출판물 검열 담당이었다.

 68년 이후 독립유공자 심사는 10년 만인 77년에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주관으로 열렸다. 이때에도 심시위원 11명안에 친일행적이 있는 유광열 ***이 참여 했다.

 이중 이은상은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친일신문인 〈****〉에 적을 둔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은상은 *항일 *친일  속하는 셈인데, 그는 자신이 심사위원회에 참여했던 77년에 바로 그 ‘선항일’을 경력삼아 건국훈장을 받기도 했다. 80년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에는 심사 위원 11명중 신석호가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이들 중에는 더러 친일과 항일의 경력을 함께 지닌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반민족문제 연구소 감봉우 소장은 “선친일 후항일의 경우는 대오각성이라는 면에서 죄가 상쇄되지만, 선항일 후친일의 경우는 명백한 ‘변절’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하지만 전자이건 후자이건 독깁유공자로 선정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한다.

 다음은 고 임종국씨가 《순국》지 89년 5 · 6월호에서, 그리고 나중에 친일파연구가 정운현씨(중앙일보 조사부 기자)가 거론한 친일파 독립유공자 중에서 친일행적이 분명하게 드러나 유명 친일 인사들이다.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82년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은,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인정된 기간인 41년 12월20일 친일잡지《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 죄담회’에 연사로 참석해“황국신민으로서 우리의 어깨에 지워진 공정무사한 대사명”을 외쳤다. 그는 또 〈매일신보〉 시사논설에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설명하기도 했다. 언론항쟁 경력을 인정받아 62년 국민장을 받은 ***은 요즘의 동장에 해당하는 서울 ****와 *** ******* 간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언론분야에서의 항일 공적으로 62년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金○*는 동생 김○수와 함께 일제말 왕성한 사회활동과 언론을 통해 친일을 했다. 그는 40년 10월27일 미나미 총독이 결성한 총력연맹에 동생과 함께 이사로 참여했으며 〈매일신보〉〈경성일보〉 등에 학병에 참여하라고 권유하는 글을 실었다. 대동단에서 활동한 공적으로 82년 건국표창을 받은 全 *(가명 전국환)은 포상자 발표 후에 친일행적이 드러나 시비가 뒤따랐던 인물이다. 그의 공적에는 대동단 단장으로 의친왕을 탈출시키려다 체포되어 8년형을 인도받고 복역중 병으로 가출오개서 병사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심사 후에 그의 또 다른 치일행적이 그러났다. 그는 친일단체인 일진회 평의장을 지냈으며 일진회 회장 이용구 추천을 받아 부평군수를 지냈다. 전 협은 선친일 후항일의 예이다.

“훈포장 반납,전원 재심사해야”

 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은 전 협과 반대로 * *은 선항일 후친일을 했는데, 매우 적극적인 친일파였다. 그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거쳐 40년 9월부터 44년까지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주필을 지냈다. 그밖에 37년 1월 친일 평의원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니냈으며, 40년 11월 18일부터 전국을 돌며 친일강연을 했다. 서 춘에게 대통령 표창을 준 63년도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사 위원회 명단에는, 서 춘과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던 고○욱과 유광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서 춘의 친일 행적을 눈감아 준 셈이다. 이 모두가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를 심사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원로 독립유공자들로부터 “모두 훈포장을 반납하고 전원 재심사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법한 상황이다. 최소한 친일행적이 있는 데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법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현재 상훈법 제8조 ‘치탈’이 그런 조항이다. 첫째, 서훈공적이 허위라고 판명된 때 둘째,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자로서 형을 받았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때 셋째, 사형 ·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받은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죄를 범한 자는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과 이에 관련하여 수여한 물건과 금전을 치탈 (박탈)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보훈처 관계자는 “과거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사례가 있지만 국가가 준 것을 도로 빼앗는 것은 모양이 우습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포상받은 독립유공자 전체가 일대 혼란을 겪게 된다”고 말한다.

 보훈처는 아직까지 공적 기초자료와 심사 기준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아래기사 참조), 이 때문에 보훈처로 원로 독립유공자들로부터 “하다못해 장학재단 대상 학생을 선발할 때도 심사기준과 성적표가 따라붙는데. 국가가 선정하는 독립유공자 심사기준과 공적자료를 보훈처가 공개하지 않는 데는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또 3 · 1절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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