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ㆍ안보는 통일과 동의어”
  • 변창섭 기자 ()
  • 승인 2006.05.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북방외교 종결로 남북관계 개선 주력할 듯


 鄭鍾旭 교수(서울대ㆍ국제정치)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내정된 직후 金泳三 차기대통령과 면담을 했다. 그 자리에서 나온 얘기는 외교안보 분야의 최우선 과제가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어 시사적이다. 정수석은 “김 차기대통령이 임기중 남북간 관계에 획기적 계기를 만들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외교ㆍ안보ㆍ통일은 분리해 생각할 수 없으며 삼위일체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밝힌 뒤 ”김 차기대통령의 뜻도 그러하므로 같은 시각에서 남북문제에 접근하겠다“고 말했다.

 정수석의 말이나 김대통령의 ‘뜻’은 자명하다. 6공에서 북방외교를 도맡은 외교안보수석실의 최우선 과제를 앞으로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에 두겠다는 것이다. 특히 김대통령은 96년 총선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성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생각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때문에 외교 전문가들은 정수석이 닉슨 행정부 시절 중국과의 수교협상을 위해 ‘밀사’ 노릇을 한 헨리 키신저처럼 ‘통일밀사’역을 맡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내다본다.

 

“임기내 남북 정상회담 한다”

 정수석이 이끄는 외교안보수석실의 역할 변화는 불가피할 것 같다. 우선 盧泰愚 전 대통령 시절과는 달리 김대통령이 손을 댈 만한 북방외교의 영역이 거의 없다. 북방외교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이란 과제만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해 외교ㆍ국제안보ㆍ국방행정ㆍ통일등 네 분야로 나뉜 외교안보수석실 업무가 앞으로는 통일분야를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李瑞恒 교수(외교안보연구원ㆍ국제정치)는 “북방외교를 마무리한 만큼 앞으로 외교안보수석실은 통일외교의 여건을 마련하고 국제적으로 반통일 요인을 제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외교안보수석실에는 수석비서를 중심으로 네 분야에 각가 책임비서관이 있고, 그 밑에 관련 부처에서 파견나온 공무원과 별정직 공무원을 포함해 20여명의 참모진이 있다. 이 가운데 통일비서관 자리는 얼마전 민병석 전 비서관이 체코대사로 발령된 후 공석이므로 후임자 발령과 함께 외교안보수석실에 대한 업무개편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비서실에는 5공 시절까지도 외교안보수석이란 자리가 없었다. 3공, 4공 때만해도 이른바 ‘안보담당특별보좌역’이란 제도가 있었지만 유명무실했다. 5공 들어서는 행정수석 밑에 국방비서관이, 정무수석 밑에 외교비서관이 있었으나 해당 부처와의 업무연락을 맡는 정도였다. 학자 출신인 金宗輝씨가 지난 88년 3월 청와대에 들어갈 당시의 직책은 안보보좌관으로, 국방 문제에 관해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정책 브레인이었다. 당시 북방외교나 남북관계 업무는 朴哲彦 정책보좌관이 도맡아 안보보좌관의 역할이란 게 사실상 보잘것없었다.

 안보보좌관이 힘을 얻기 시작한 때는 6공 출범후 얼마 안돼 국방비서관과 외교비서관이 안보보좌관의 지휘를 받도록 개편된 뒤부터다. 이와 함께 안보보좌관이란 직책도 외교안보보좌관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으로 활력을 얻게 된 시점은 박보좌관이 정무장관에 임명돼 청와대를 떠나면서 그가 맡았던 업무가 외교안보보좌관실로 넘어간 때부터였다. 그 뒤 지난 88년 노대통령이 ‘7ㆍ7선언’을 통해 북방외교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면서 상당한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다른 부처와 마찰 많은 자리

 다른 비서관과 마찬가지로 외교안보수석도 대통령의 개인 참모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신임도에 따라 그의 기능과 활동 범위가 정해진다. 아무리 유능한 참모라도 대통령이 신임하지 않으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는다. 김수석이 차관급인 외교안보보좌관에서 장관급인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격상한 것도 노대통령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기 때문이다.

 김수석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북방외교를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노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학자 출신인 데다,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성격도 해당 부처와 마찰을 적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물론 그의 업무영역이 외무부ㆍ국방부ㆍ통일원 등 3개 부처에 미치기 때문에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유엔 가입 문제와 관련해 외무부는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들어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김수석은 정원식 전 총리를 비롯한 정부특사를 중국 등 관련국에 보내 사전 정지작업을 벌였다. 한ㆍ중수교 문제도 외무부는 이를 다음 정부로 미루자는 입장이었다. 오랫동안 김수석을 옆에서 지켜본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그가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외무부의 관료주의적 발상과 지나친 신중함 때문에 유엔 가입이나 한ㆍ중수교는 한없이 늦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석은 용산 미군기지 이전이나 미 8군의 작전권 이양 문제를 놓고도 국방부측과 충돌했다. 국방부나 미군 당국은 처음부터 기지 이전이나 작전권 이양에 반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시 이북 출신인 ㅎ 비서실장도 반대의견을 펴 김수석이 크게 애를 먹었다고 한다. 심지어 김수석을 겨냥해 “청와대 안에 빨갱이가 있는 게 아니냐”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결국 두가지 주요 사안이 원만히 해결된 것은 노대통령이 김수석의 건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청와대 인사들의 평가다.

 김수석은 통일원의 업무와 관련해서도 안기부로부터 견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와 자주 접촉했던 한 인사는 “대북관계 업무의 속성상 안기부와 겹칠 수밖에 없는 통일원은 6공 초만 해도 통일관련 업무 영역이 5%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김수석이 부임하고 6공 후반에 들어 통일원 업무영역은 20% 선까지 늘었다. 이 때문에 김수석은 안기부 등 관련 기관으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은 것은 물론 뒷조사까지 다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관련 부처의 견제나 마찰로부터 김수석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김수석도 언젠가 사석에서 “북방외교를 성공시킨 가장 중요한 비결은 대통령의 지원이었고 나머지는 내 밑의 유능한 참모와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였다”라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김수석이 겪은 부처간 갈등이나 마찰은 신임 정종욱 수석도 예외없이 겪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최우선 과제가 통일외교에 있고 이를 위해 관련 부처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하는 만큼 그 과정에서 해당 부처와 마찰이 불가피할 것 같다. 다행히 朴寬用 비서실장이 과거 남북국회회담 대표와 국회통일특위 위원장을 지낸 경력이 있어 정수석으로서는 ‘원군’을 얻은 셈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부처간 마찰 해소와 보다 합리적인 운용을 위해 이번 기회에 외교안보수석실을 비서실에서 분리해 기능과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교안보수석실의 외교안보비서관(국제안보 담당)을 지낸 金顯東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남북통일 업무를 비롯한 국가의 전략업무를 효율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하려면 외교안보수석실이 비서실과는 별개로 법적 뒷받침을 받는 기구로 전환할 필료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외교안보수석실을 새로운 독립 기관으로 만들 필요는 없고, 현재 유명무실한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외교안보수석실을 편입시키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은 개인 참모 아닌 ‘공인’

 미국은 지난 47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회의’에 관한 법령을 만들고 그에 따라 국가안보보좌관 제도를 신설했다. 미국의 안보보좌관은 한국처럼 대통령의 개인 참모가 아니라, 활동영역을 법으로 명시한 ‘공인’이다. 미국도 초창기에는 안보보좌관의 역할을 놓고 잡음이 일었다. 컬럼비아대에서 국제정치를 맡고 있는 로저 힐스먼 교수는 ≪국방ㆍ외교 정책 입안 과정≫이란 저서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그의 안보보좌관인 맥조지 번디에게 두가지 지침을 주었다고 썼다. 하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보보좌관이 특정 정책의 주창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주무 부처를 무시하고 언론과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원칙은 닉슨 행정부에 들어 키신저라는 인물이 안보보좌관을 맡고 난 후로 완전히 깨진다. 하버드대에서 25년간 국제정치를 강의한 키신저는 외교에는 문외한인 로저스 국무장관을 제치고 비밀리에 미ㆍ중 수교협상을 벌였다. 72년 닉슨이 키신저를 배석시켜 모택동과 회담을 갖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비칠 때 로저스 장관은 북경의 한 호텔 방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카터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도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과 자주 의견 충돌을 빚었다. 결국 밴스 장관은 이란내 미국인 인질구출 사건을 계기로 브레진스키와 의견이 맞지 않아 사표를 던졌다.

 키신저나 브레진스키는 안보보좌관이란 직책 외에도 외교협상ㆍ정책조언ㆍ국가안보분석이란 3중 업무를 도맡아 막강한 위세를 누렸다. 김수석은 노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북방 밀사’역을 해냈다는 점에서 얼핏 키신저를 연상시킨다. 신임 정수석이 ‘통일 밀사’로서 또다른 한국의 키신저 모습을 보여줄지 두고보 일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