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 ‘政經言 혼탁’ 몰고오는가
  • 김상익 차장대우 ()
  • 승인 1992.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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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정치 세력화로 재계 사분오열 가능성…정대표의 ‘정경분리’ 절실

 鄭周永 대표의 국민당이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31석을 차지하자 재계는 뜻밖의 결과에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나쁠 것 없다”는 입장을 보이려 애쓰고 있다. 일단 14대 국회가 개원되면 제3당으로서 국민당이 일방적으로 현대를 편들거나 특정기업에 불이익을 주는 행동을 취할 수 없을 것이며, 정주영 대표가 기업의 어려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업활동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개표가 거의 끝난 25일 아침 7시 정주영 대표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기 자신은 현대를 지원할 만큼 그릇이 작은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몇몇 기업과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서도 “과거는 다 잊어버리겠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기간 동안 현대와의 갈등관계를 노출한 대우그룹측도 일단 “국민당이 7~8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면 현대의 보호막처럼 행동할 수 있겠지만 30석 이상을 얻었으므로 그렇게 하진 않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국민당과 현대그룹에 보내는 의심의 눈길을 완전히 거두어들인 것은 아니다. 정주영 대표가 공식적으로는 현대그룹의 경영에서 손을 뗐으며 현대그룹 역시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국민당=현대’라는 인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대우그룹의 한 관계자는 국민당이 현대를 일방적으로 편들 경우 “왕회장의 왕당파에 대응하는 재계의 연합전선이 형성될 수도 있다”는 말로 경계심을 나타냈다.

 이번 선거의 특징 중 하나로 재계가 정치판에 휩쓸려들어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주영 대표는 아예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고, 대기업 중 일부는 정치자금을 대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후보를 지원하거나 국민당 바람 재우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만큼 재계는 당분간 선거 후유증을 피할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당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면서 재계는 곤혹스런 입장에 처했다. 선거일을 불과 1주일 앞둔 3월17일 경제5단체 회장들은 “현대그룹 계열사의 많은 인력과 장비·시설 등이 특정 정당의 총선활동에 이용되고 있다고 하는바, 기업과 정치가 혼동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크게 우려한다는 성명서를 우여곡절 끝에 발표했다.

 정주영씨는 이 사실을 미리 전해 들었으며 현재그룹은 즉각 반박성명을 준비해 각 일간지에 발표하는 한편 17일부터 23일까지 대대적인 기업홍보 광고를 내보냈다. 광고내용은 “1백20억달러-우리의 금년 외화획득 목표입니다”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운다” 등 현대 계열사 직원이 선거운동에 나서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비판에 대응하는 것들이었다. 선거가 끝난 뒤 경제5단체는 성명서를 발표할 때와는 달리 개별적으로 의례적인 논평을 발표하거나 침묵을 지켰다.

기업간 갈등 등 재계 ‘선거 상처’ 깊어
 현대 계열사의 전면광고가 각 일간지를 뒤엎고 있는 가운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라는 대우그룹의 2면짜리 초대형 광고가 터져나왔다. 이어 대우그룹 창립 25주년 기념사가 전면광고로 신문지면을 메웠다. 어느신문에는 두 회사의 광고가 양면에 나란히 실려 마치 두 재벌의 힘겨루기처럼 보이기도 했다(67쪽 사진). 이에 대해 대우그룹측은 “창립 25주년 광고들은 지난해 말부터 계획된 것이며, 마침 그때 현대측이 대대적인 광고를 내보내는 중이어서 광고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오해를 샀다”고 설명했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월20일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그룹 창립 25주년(22일)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주영 대표가 자서전 등에서 자신을 정격유착의 표본인 것처럼 비판한 데 대해 “지금까지 가장 많은 수의 계약을 따내는 등 불공정한 거래를 해온 것은 바로 현대”라고 말했다. 그는 정대표의 정계진출은 불행한 일이며 자신은 기업의 정치참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정주영 대표는 “김우중 회장은 권력과 결탁해 사업을 했기 때문에 사업 유지를 위해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김우중 회장은 또 일본의 마쓰시타정경숙 같은 정치 지도자 양성기관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해 정대표의 국민당에 대항하는 정치세력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냐 하는 추측을 낳았다.

 14데 총선을 겪으면서 기업간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고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단체들의 모양이 우습게 되는 등 재계는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상처는 쉽사리 아물 것 같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정대표는 과거를 잊자고 말했지만 자동차·조선·건설 등 대우와 현대는 서로 겹치는 업종이 많은데다 정·김 두 사람이 한차례 설전까지 주고받은 터여서 두고두고 부딪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또한 정대표가 그동안 강도 높게 비판해온 6공의 최고 통치권자인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관계인 선경·동방유량 등도 국민당에 의해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벌써 “선경의 제2이동통신 사업 진출은 물 건너간 것 아니냐”하는 성급한 관측이 나올 정도다.

 재계 주도세력의 세대교체가 지연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동안 2세 회장들을 중심으로 재계의 세대교체론이 거론돼왔으나 국민당의 부상에 따라 정대표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 원로들의 위상이 강화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현대와 국민당간의 정경분리 원칙이 지켜진다면, 즉 정대표가 현대에서 손을 떼고 정치에 전념할 경우 원로들의 은퇴 밑 세대교체가 빨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의 □□□ 박사는 “정주영씨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국민당이 한국경제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는 “오늘날 한국경제가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은 정부가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면서 우리 경제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경쟁의 활성화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동안 정부의 지나친 규제와 간섭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과 기업간의 경쟁을 가로막아왔으며 이것이 한국경제의 경쟁력 약화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각종 규제와 성역이 존재하기 때문에 기업은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한건’을 올리려 노력할 뿐 경쟁을 통해 발전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어느 기업이 새로이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고자 할 때 기존 업체가 공급과잉이 되니 막아달라고 요청하면 그것이 통하는 것이 그동안의 관례였으며, 정부는 이같은 규제를 통해 기업을 통제했고 기업은 규제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했는데 그같은 장벽을 허물 때 기업의 경쟁력이 커진다는 얘기다. 따라서 정대표에 의해 각종 규제의 문제점이 공론화되고 그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뒤따르는 과정에서 경제개혁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기업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국민당이 창당 3개월만에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업경영에서 축적한 기동력과 효율성 때문이며, 기업경영 방식의 도입은 앞으로 정치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이는 60년대 군인들이 정권을 잡을 때 “한국에서 근대화된 조직은 군대뿐이다”라는 말로 군부의 정치개입을 정당화한 논리와 유사하다는 지적이다.

“기업자유주의 득세할 것”
 기업이 정치 세력화됨으로써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관료집단이 기업을 지배하는 지금까지의 구조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관료집단 위에 기업이 올라섬으로써 기업자유주의가 득세할 것이라는 얘기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부의 규모가 크고 경제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막강한 현실 속에서 일부 기업의 정치세력화가 기업간의 갈등을 심화시켜 재계의 사분오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제2이동통신·LNG 운반선·경부고속전철·대형 항만건설 등 굵직한 사업이 코앞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 과연 정치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된 대기업들이 정경분리를 실천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여소야대라는 정치상황에서 정치권의 분열이 예상되는데 이에 따라 재계도 갈갈이 찢기는 ‘정경혼탁’이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국민당의 급부상이 앞으로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의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를 놓고 재계 안팎의 견해는 서로 엇갈리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그룹이라는 거대자본과 언론(<문화일보> <한국경제신문>), 거기에 정치적 힘까지 갖춘 막강한 세력이 나타남으로써 자칫 政經言의 일체가 빚을 수 있는 ‘불행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우려의 밑바탕에는 ‘현대=정주영=국민당’이라는 등식이 깔려 있다. 정주영 대표가 현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는다면 우려되는 상황이 닥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현대 그룹은 그가 일생을 걸고 이룩한 ‘모든 것’이기에 속단키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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