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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동 티모르 수호 천사!"

호주ㆍ아세안, 평화유지군 주도권 다툼 치열‥ '세계 경찰' 미국, 애매한 태도로 일관

최영재 기자 ㅣ 승인 1999.09.23(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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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가 결국 국제 사회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동 티모르에 유엔평화유지군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9월12일 하비비 대통령은 "동 티모르 투표 결과가 발표된 이후 많은 사람이 목숨과 재산을 잃었다. 우리는 이 비극과 고통을 당장 중지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외무장관 알리 알라타스는 9월13일 뉴욕에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평화유지군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 티모르에 주둔하고 있는 인도네시아군의 철군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유엔의 투표 결과가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벌어진 참극이다. 9월11일 동 티모르의 수도 딜리를 지나친 한 유엔 직원은 이곳을 '지구 상의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포르투갈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서 있던 딜리가 연기가 가득찬 폐허로 변했다고 증언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딜리 공항에서 마코다 호텔이 있는 도심까지가 심하게 파괴되고, 간간이 눈에 띄는 주민도 굶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달리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지만 딜리 외곽에서는 유혈 사태가 그치지 않고 있다.

"인도네시아군이 난민 공격" 독립파 게릴라 주장
  동 티모르의 서쪽 영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반독립파 민병대에 의해 대부분 강제로 주거지를 옮겼다(25쪽 지도 참조). 강제 이주를 모면한 주민은 독립파 무장 게릴라 팔렌틸이 보호하는 구역으로 피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팔렌틸은 치안을 확보하고 동 티모르 주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인도네시아군이 오히려 난민과 독립파 게릴라를 공격하고 있다고 전한다. 위성 사진에 따르면, 동 티모르 주민이 살던 마을과 집은 대부분 파괴되고 불탔다. 이렇게 흩어진 난민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동 티모르에서 도망친 난민은 이 모든 학살극과 파괴 행위 들이 인도네시아 군부와 반독립파 민병대가 치밀하게 공조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여러 경로로 확인되고 있다. <시사저널> 취재진도 8월27일부터 9월5일 사이 동 티모르에 머무르면서, 반독립파 민병대가 인도네시아군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반독립파 민병대와 인도네시아 군ㆍ경은 서로 담배도 나누어 피우는 사이였다. 그들은 마치 동료처럼 보였다.

  동 티모르 사태로 세계 4위의 인구 대국인 인도네시아는 국제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았다고나 할까. 동 티모르 사태 전까지만 해도 인도네시아는 독재자 수하르트를 몰아낸 뒤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전세계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유엔 선거감시단까지 들어가서 이룩한 독립 결정을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뒤엎으려 한 사실이 드러나 전세계로부터 비난과 압력이 빗발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현재 외교적으로 막다를 골목에 몰려 있다. 지난 9월11일 유엔 안보리에 모인 각국 대사들은 6시간 동안 인도네시아를 비난했다. 이들은 동 티모르에서 일어나는 학살극을 최근 코소보나 르완다에서 일어난 참극과 견주었다.

  9월12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회담에 참가한 각국 지도자들도 일제히 인도네시아를 비난했다. 인도네시아와 인접한 싱가포르 같은 동남아 국가들까지 인도네시아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인도네시아의 지도자 가운데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이는 하비비 대통령이다. 그는 국외에서는 동 티모르에 대한 국제 사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 국내에서는 동 티모르의 독립을 막지 못했다는 원망을 받고 있다. 더욱이 그는 동 티모르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는 군부를 통제하지 못해 사태를 키웠다. 그래서 집권 골카르당도 노골적으로 하비비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형편이다. 하비비의 정치 라이벌과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세력들은 최근 그를 '인도네시아판 고르바초프 또는 국가분열의 아버지'로 지목하고 있다. 동 티모르가 떨어져나갈 경우 아체 주(州)나 이리안자야 주(州)의 분리 독립 운동이 더욱 거세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비비의 정치적 위상이 약해지면서 총성 없는 쿠데타로 권력이 군부에 넘어갔다는 소문도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더구나 하비비는 측근들이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발리 은행 부패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더욱 곤경에 처했다. 인도네시아는 국제적으로 결론이 난 동 티모르에 집착해 경제까지 피해를 보고 있다. 경제 제재가 있을 것이라는 보도와 함께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는 8월25일께 달러당 6500백~7000대를 맴돌다가, 두 주만에 8000~9000 선까지 추락했고 9월12일 현재 10000 루피아 선에서 머무르고 있다.

인도네시아, 호주 주도 평화유지군 극렬 반대
  인도네시아가 마지 못해 받기로 한 유엔평화유지군은 동 티모르와 인접한 호주군이 주축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는 베트남전 이래 최대 규모인 4천5백명 가량의 병력을 다윈 항에 대기시키고 있다(왼쪽 지도 참조). 이같은 규모는 사태를 푸는 데 필요한 병력 7천명 가운데 절반을 호주가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호주 군대는 명령만 떨어지면 24시간 안에 현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호주 국방부 관리들은 선발 부대 5백명이 호주 북부 다윈 항에서 불과 2시간 걸리는 항공기편으로 배치되거나, 시속 40노트로 항해하는 해군 함정 편으로 10시간 만에 동 티모르에 도착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호주와 함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등 아세안(ASEAN) 회원국이 주도적으로 평화유지군에 참가할 전망이다. 아세안이 회원국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는 32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아시아의 분쟁을 아시아 나라들이 주도해 해결한다는 것은 아세안의 위상과 관련해 중요한 선례가 될 것 같다. 주목해야 할 사안은, 호주와 아세안이 평화유지군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유럽은 호주가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에 이의를 달지 않고 있으나, 인도네시아가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있다. 또 에이펙(APEC) 정상 회담에 참가한 말레이시아는 그동안 호주가 동 티모르에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아세안이 주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지상군 투입 안할듯
  동 티모르 문제와 관련해 가장 불확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미국 정부 고위 관리들이 최근 발언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국의 태도가 얼마나 이중적인가를 알 수 있다. 동 티모르에서 대량 학살이 진행되던 9월7일 미국 국무부 제임스 루빈 대변인은 "동티모르는 코소보와 다르다"라며 미국이 개입할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월리엄 코언 국방장관도 최근 "미국은 세계 경찰 역할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라고 말했다. 미국 국방부가 9월9일 인도네시아와 군사 협력 관계를 끊겠다고 위협한 것은 최근 국제 사회에서 일고 있는 여론 때문에 마지 못해 취한 조처라고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 미국이 엄청난 자원 부국인 인도네시아와 정치· 경제 관계를 끊는 순서를 밟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위협만 했지 현실적인 조처는 아직까지 나온 것이 없다. 클린턴 행정부는 여전히 자카르타에 대한 재정 지원을 끊지 않고 있다. 샌디 버거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은 9월12일 미국은 동 티모르에 파견될 유엔평화유지군에서 제한적이고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병력을 실어 나를 항공기와 물자· 통신· 정보 분야만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내색은 않지만 인도네시아 정부가 동의하지 않으면 지상군을 투입할 뜻은 없는 것으로보인다.

  미국의 애매한 태도는 75년 인도네시아가 동 티모르를 침공하며 20만명이 넘는 동 티모르 사람을 학살한 것을 묵인한 것과 바로 연결된다. 당시 미국은 인도네시아군의 만행을 국가 안보를위한 행동으로 인정했다. 미국이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인도네시아라는 국가가 무한한 자원과 영토· 인구를 가진 대국이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하는 전략 요충지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사실 인도네시아가 동 티모르에서 저지른 만행에 일정 정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은 오랫동안 수많은 인도네시아 고급 장교를 훈련시켰고, 인도네시아에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와 장비들을 팔아왔기 때문이다. 미국이 현재까지도 동 티모르에서 벌어지는 대량 학살에 가능한 한 직접 대응을 삼가고 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다. 불과 한 달 전 클린턴 대통령이 유고 전쟁을 끝내면서, 전세계의 모든 소수민족들은 코소보 스타일의 대량 학살을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공언한 것을 되새기면 그야말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동 티모르에서 대량 학살극이 일어난 1차적인 책임은 물론 반독립파 민병대와 이를 방조한 인도네시아 정부에 있다. 하지만 국제 사회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유엔은 동 티모르에서 주민 투표를 이끌어냈지만, 이후 치안을 확보할 무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주민들은 미래를 보장하겠다는 유엔의 약속을 믿고 투표를 했지만 유엔은 투표한 사람들의 안전을 전혀 책임지지 못했다.

  동 티모르에 모인 사람들이 한결같이 투표 결과 발표 이후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나리라고 예상했지만, 유엔은 전혀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각국이 파견한 유엔시민경찰이 있었지만 이들도 비무장이어서 발표 이후 탈출하느라 바빴다.

  그동안 학살당한 동 티모르 사람들의 목숨은 아무도 돌이킬 수 없다. 유엔 관리들은 9월13일, 반독립파 민병대의 학살을 피해 산속으로 피신한 동 티모르 난민들이 아사 직전에 있다고 밝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 티모르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崔寧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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