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명령 내린 용서받지 못할 자들
  • 이철현, 최영재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1999.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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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고문 수사 지휘 체계도 공개 베일 속 ‘남영동 고문팀’ 전모 드러나 박처원 · 윤재호 · 백남은 · 김수현 · 이근안 커넥션 확인 ‘윗선’ 밝힐 증언 · 정황 증거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움직인 자들은 누구인가. 누가 그를 발탁하고 지휘했으며, 누가 그를 숨겨주었는가. 또 이근안을 지휘한 자들에게 고문을 해서라도 간첩을 만들어 내라고 명령을 내린 자들은 누구인가. 다시는 이 땅에서 고문이 자행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면면을 밝히고 단죄해야 한다. <시사저널>의 춪ㄱ 보도와 검찰의 수사에 따르면, 이 모든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진 인물이 바로 당시 박처원 대공수사단장이다.

그는 88년 12월 24일 잠적한 이씨를 경기도 수원에서 만나 도피를 지시했다. 대공 수사 조직은 군대보다 상명하복 지휘 체계가 엄격했다. 자수를 결심했던 이씨는 박씨가 도피를 지시하자 곧바로 도망자 생할에 들어갔다. 박씨는 또 97년 12월 이씨 부인 신옥영씨를 만나 도피 자금으로 1천5백만원을 건넸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박처원은 대공 수사의 살아 있는 전설”
이근안 전 경감이 대부처럼 모시던 박씨는 순수 대공 수사 분야에서 신화적인 인물이다. 김창룡 전 육군 특무대장과 오제도 전 공안 검사와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3대 대공 수사요원으로 꼽힌다. 80년대 대공수사단 소속 경찰은 모두 박씨를 우러러보았다. 그의 명령은 마피아 대부가 내리는 지시와 같았다. 이의 제기나 불복종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남영동팀 출신 전직 경찰관은 “그는 대공 수사 분야에서 살아 있는 전설이다. 결찰 조직 안에 대공 수사의 기틀을 세우고 닦아 왔다”라고 말했다.

경찰 대공 수사 분야에서 순경으로 시작해 ‘경찰의 별’이라 불리는 경무관까지 오른 이는 박씨가 유일하다. 그는 47년 경찰에 들어가 곧바로 대공 수사 현장에 투입되었다. 위험한 특수 업무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들어 경찰 고위 간부에게 신임을 얻었다. 그 후 총경 · 경무관으로 승진하며 출세 가도를 달린 그는, 80년대 초 치안본부 5차장을 맡으면서 명실공히 대공 수사 업무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경찰 조직 안에서 베테랑 수사 인력ㅇㄹ 선발해 대공수사단을 채웠다. 고졸 출신 순경인 이근안씨를 대공 수사 핵심 요원으로 발탁한 것도 그였다.

그러다 보니 대공수사단 소속 경찰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남영동팀 소속이었던 전직 경찰관은 “가장 독종인 경찰만 모이는 곳이 대공수사단이다. 수사와 심문 능력이 뛰어난 수사관들이 대공수사를 이끌었다”라고 말했다.

“백남은 · 김수현 · 이근안은 최고의 대공팀”
박처원씨는 부하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부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감싸고 돌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89년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고문에 참여한 부하 5명 가운데 일부를 보호하려고 사건을 은폐 · 축소하려다가 구속된 적도 있다. 이 사건으로 96년 대법원에서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경찰복을 벗었다.

박씨 다음으로 주목할 인물은 백남은씨다. 박처원씨가 단장일 때 가장 신임했던 부하인 그는 다시 남영동팀 대공계장이었다. “박처원씨와 백남은씨 사이에 윤재호 대공과장(남영동팀장)이 있었지만 윤씨가 대공 출신이 아니라 일반 수사 출신이어서 박씨는 백씨를 더 신임했다.” 당시 백남은씨 밑에서 일했던 전직 남영동팀 수사관의 증언이다. 백씨는 머리 회전이 빨랐고 다재다능한 인물로 알려져 이Te. 부하 직원 하나는 “미남이고 처신을 잘해 동료뿐만 아니라 상 · 하급자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라고 말했다. 박씨도 일을 떠나 인간적으로 백씨를 좋아했다. 잠적한 이근안 전 경감을 만날 때 백씨를 대동한 것을 보면 그가 백씨를 어느 정도 신뢰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백씨가 김근태씨 고문에 참여한 것도 박단장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김근태 민청련 의장에 대한 심문은 백씨가 이끄는 수사2계가 아니라 김수현 전 경감이 이끄는 수사3계가 맡았다. 김수현 전 경감 휘하에 김영두 · 최상남 전 경위가 김근태씨 심문을 진행했으나 성과가 없자 박단장이 백씨를 투입한 것이다.

이근안 전 경감은 85년 초기 경위 계급으로 백씨 휘하에 있었다. “당시 백남은 · 김수현 · 이근안은 최고 팀이었다. 눈부신 성과를 계속 올렸고 누가 보아도 뛰어난 대공 수사관들이었다.” 당시 백씨 아래서 이근안씨와 함께 근무했던 전직 경찰관은 이들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재호 과장도 백남은 · 김수현 · 이근안 씨를 가장 신임했다고 한다. 일반 수사관 출신이었던 윤씨는 대공 수사에서 ‘잔뻐가 굵은’이들의 경륜을 인정한 것이다.

김근태씨 고문 사건이 불거진 뒤 경찰을 그만둔 백남은 · 김수현 씨는 <시사저널>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박처원 단장은 김근태 민청련 의장 수사에 이근안 경감도 투입했다. 김근태씨를 고문한 85년 5월 이근안씨는 남영동팀 소속이 아니라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이었다. 그는 85년 상반기에 경위에서 경감으로 승진했다. 경찰은 승진하면 몇 년 동안 지방에서 근무해야 한다. 이근안씨는 남영동팀에서 몇 개월 대기하고 있다가 수원에 있는 경기도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박씨가 부르자 즉시 남영동으로 올라왔다. 남영동팀 출신 전직 수사관ㅇㄴ “분명히 수원(경기도경 소재지)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던 이근안 씨가 남영동에 나타나 일을 맡고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윤재호의 남영동팀, 수사 요원 백여 명
경기도경 소속인 이근안 경감이 남영동팀에서 일하는 것은 개인 신상에 좋지 않았다. 전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부하 직원이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을 경기도경 고위 간부들이 좋게 볼 리 만무했다. 당시 이근안씨 동료의 증언에 따르면, 이씨는 서둘러 김근태 사건을 마무리하고 경기도경에서 맡은 사건(납북 어부 김성학씨 수사)에 매달리기를 바랐다고 한다. d씨 동료는, 사정이 그래서 수사를 진행하면서 무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갖가지 고문이 자행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간첩처럼 국가 안보를 위협한 범죄자를 일컫는 정보 사범에 대한 고문 수사가 비일비재했지만, 김근태씨 사건처럼 짧은 시간에 갖가지 고문 수단이 총 동원된 것은 이례적이었다고 덧붙였다. 혹독한 고문이 자행된 데는 이 같은 조직의 특수 사정도 작용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근안씨는 실직을 올리기 위해 윗선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독자적으로 판단해 김근태씨를 고문했을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남영동팀의 당시 수사 지휘 체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80년 전두환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국가안전기획부나 보안사령부와 비교해 미약했던 경찰 내 대공 수사 조직은 크게 확대 개편되었다. 80년대 초 경찰에 대공수사단이 구려지고 박처원 전 치안감이 단장에 올랐다. 5공화국시절이 조직은 덩지가 계속 커져 84년쯤 4개 과로 나뉘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수사 1 · 2과는 경찰청에 들어가 행정과 지원 업무를 맡았다. 수사 3과는 간첩이나 방북 사건처럼 순수 대공 업무로 분류된 분야를 수사했다. 속칭 남영동팀이라 불리던 수사 3과는 윤재호 총경이 이끌었다. 수사 인원은 백여 명이었다. 그 아래 계 단위 조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계마다 20여 명씩 소속되어 있었다.

학생 · 노동 · 시민 운동단체에 대한 수사는 4과인 홍제동팀이 맡았다. 당시 경찰은 이 분야를 순수 대공과 분리해 공안 사범 업무라고 불렀다. 80년대 중반부터 전국대학생연합(전대협)을 비롯해 학생운동 조직이 왕성하게 활동했고 갖가지 노동단체가 잇달아 결성되어 조직 기반을 넓혀 가고 있었다. 공안 사범이 지나치게 많아졌고, 이 업무를 맡아 보면 순수 대공 업무가 마비될 것을 우려해 학생과 노동 조직에 대한 수사를 맡는 홍제도팀을 따로 꾸린 것이다. 공안 수사 강화, 혹은 조직이 정권 차원에서 기획되었다는 반증이다.

당시 홍제동팀장은 검찰이 지난 11월 12일 소환한 유정방 전 총경이었다. 윤재호 남영동팀장이 91년 폐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유씨를 소환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남영동팀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근태씨 고문 사건에 대한 윗선을 수사하기 위해 지휘 체계 내에서 같은 직급의 인물을 부르다 보니 그가 소환된 것이다.

전 남영동팀원 “윗사람들, 고문 지시”
서열로 보아 남영동팀을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은 윤재호 전 총경이다. 그의 공식 직함은 대공수사 3과장이지만 수사 실무에 참여할 때 그의 직함은 판단관이나 분석관으로 불렸다. 일선 수사관들이 범인을 심문한 내용을 정리해 1일 보고를 올리면 판단관이나 분석관은 심문 내용을 분석해 수사 방향을 결정한다. 심문 과정에서 특정 사실이 확인되면 판단관은 수사팀에 추가 수사나 증거 수집을 명령한다. 이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심문 방향을 그에 맞추어 바꾸라고 지시하기도 한다.

판단관 지시에 따라 v의자의 자백을 받아내는 심문 조는 주심무관 1명 · 부심문관 2명 · 피의자 감시원 1명으로 꾸려졌다. 주심문관은 사안에 따라 경감이나 경위가 맡고, 부심문관은 바로 밑의 계급이 맡아서 심문을 보조한다. 수사 진행이 더디면 박처원 단장이나 윤재호 총경이 빨리 결과를 내놓으라고 재촉했다. 위에서 다그치면 심문 조는 고문을 해서라도 수사를 빨리 마무리하려고 했다. 남영동팀 소속 전직 경찰은 “심지어 윗사람이 내려와 ;말로 해서 되겠느냐‘라고 말하며 노골적으로 고문을 지시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고문은 경찰 내부에서 제도적으로 조장되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문해 그럴듯한 수사 결과를 보고하면 갖가지 표창을 받고 진급 혜택을 누린다. 하지만 자백을 받지 못하거나 심문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 이근안의 동료였다는 이는 “자백을 받지 못하고 시간만 소비하면 위에서 ‘형편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막말로 찍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진급은 포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경무관 진급을 바라보는 윤총경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근태 사건에 매달렸다고 한다. 성과를 내야만 진급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심문과 고문에 능해 일취월장했던 인물이 이근안 경감이다. 70년 순경으로 공채된 뒤 72년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분실장의 눈에 띄어 대공 수사에 뛰어들었다. 이씨는 남영동팀에서 주심문관으로 활동하면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80년대 중반 경위 계급의 남영동팀 동료들과 비교해 10년이나 늦게 경찰에 들어왔는데도 경감으로 먼저 승진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는 윗선이 일일이 지시하기 전에 눈치껏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아냈다고 한다.

남영동팀 소속 전직 수사관은 “그와 같은 조직내 분위기에서 실적을 내기 위해서는 고문이 아니라 더한 짓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피의자로부터 얻어낸 자백은 과장급 이상 수뇌부가 모이는 아침 회의에 올려져 분석된다. 이 회의를 거친 사건은 얼개를 갖추어 가고, 추가 수사나 수사 종료가 결정되기도 한다. 남영동팀 전직 수사과은 “그물은 우리(심문조와 수사팀)가 치지만 그물을 끌어올리는 것은 윗선(총경급 이상)이 했다”라고 말한다.

박배근 전 치안본부장은 고문 개입 안한 듯
박처원 전 치안감에게까지 수사 범위를 확대한 서울지검은 이제 그 윗선에 대한 수사를 벌이기 위해 박씨를 소환하기로 했다. 윗선을 거론되는 것은 박배근 전 치안본부장이나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단이다. 하지만 박배근 전 본부장은 고문 수사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은 듯하다. 당시 남영동팀 소속 수사관은 “대공 수사에 관해서는 박본부장이 박처원 대공수사단장에게 의논은 할 수 있어도 지시나 명령을 내릴 처지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박처원씨의 재량권은 컸다.

따라서 검찰 수사의 초점은 앞으로 국가안전 기획부 대공수사단에 맞추어질 가능성이 크다. 기밀로 분류된 대통령령인 ‘정보사범 처리 규정’(29쪽 상자 기사 참조)에 따르면, 경찰은 간첩처럼 국가 안보를 현저히 해치는 정보 사범을 수사한 내용은 안기부에 1일 보고를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수사 내용을 분석한 안기부는 수사 방향을 지시할 수 있었다.

80년대 당시 전두환 정권이 정권 안보를 이용해 동원했던 조직이 정보기관과 경찰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조직을 용공이나 좌익 단체로 모는 일은 경찰이 손발이 되어 움직였다. 경찰 고위 간부들은 윗선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지시를 받거나 윗선의 처질ㄹ 감 잡고 부하들을 다그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적을 내는 수사관은 승승장구했고 이에 따르지 않는 수사관은 곧바로 전출되었다.

청와대나 안기부 고위 간부가 지시를 내렸다면 박처원 전 치안감이 명령을 받은 이가 될 것이다. 박씨가 대공수사 분야에서 차지한 비중은 그만큼 컸다. 그의 핵심 참모였던 백남은 전 경정이나 김수현 전 경감은 수시로 모임을 갖고 위선의 뜻에 부합하게 수사 방향을 잡았으리라 판단된다. 따라서 청와대나 안기부 고위 간부로까지 수사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 끈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공소 시효는 지난 사건이지만 고문처럼 반인간적인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전후 나치 전범을 색출할 때 보여준 독일식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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