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 “이젠 엔진 달 차례”
  • 오민수 기자 ()
  • 승인 2006.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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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공추련 현실적 개혁운동 주효, 민중운동의 ‘침체’ 공백 메우며 급성장


한국사회학회와 한국정치학회는 지난해 5월 23일과 24일 이틀간 ‘한국의 정치변동과 시민사회??라는 제목으로 함께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마지막 종합토론회에서 전병재 교수(연세대?사회학)는 자리를 가득 메운 청중을 향해 ??왜 시민사회가 이토록 관심을 끄는지 모르겠다. 왜 민중이 아니고 시민이냐??라는 물음을 던졌다. 80년대 내내 한국 사회과학계에 득세했던 민중론에 밀려 기본적인 발언권조차 누리지 못했던 시민사회론이 복권하는 데 대해 당혹해한 것이다. 또한 그 말은 90년대에 들어 달라진 ??운동??의 성격과 위상을 상징한 화두였다. 혹자는 이 현상을 두고 한국 사회에서 시민이 이제야 ??시민권??을 얻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왜 민중이 아니고 시민이냐.

학계의 시민사회 열풍은 바로 실천운동의 변화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왜 민중이 아니고 시민이냐라는 학문적인 물음은, 왜 민중운동이 아니고 시민운동이냐라는 문제로 확대된다. 그것은 운동권에게는 매우 낭패스러운 사회 변화이다. 이를테면 지난해 3·24 총선에서 진보정당의 대표임을 자처한 민중당이 유효투표의 2%에도 못미치는 저조한 득표율에 그쳐 해체되었지만, 민중당 후보자들과 성향이 크게 다르지 않는 진보 인사들이 보수 야당인 민주당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때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 정치인으로서 화려한 변신이 가능했다. 학계와 실천운동 진영이 이러한 현실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사회변화 바람 덕 봤다??

 우리 사회의 민중운동 또는 노동운동은 ‘뒤늦은 성장과 때이른 침체??라고 표현할 정도로 짧은 세월 동안 영욕을 누렸다. 반면 시민운동은 민중운동이 침체의 늪에 빠져드는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해왔다. 시민운동은 때로 신사회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환경?반핵?인권?소비자?여성 운동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시민운동은 주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의 활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공선협)도 빼놓을 수 없는 단체이다. 과연 민중운동으로는 현실의 변화를 견뎌내지 못하며, 그래서 과거 민중운동이 누렸던 지위를 이제는 시민운동이 대신하는 것인가.

경실련 활동가들은 “지금 경실련은 지나치게 과대포장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경실련에게, 이 단체가 갖춘 역량보다 훨씬 큰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요즘 경실련 관계자들 사이에선 이른바 ??엔진론??이 쟁점이다. 지금까지 경실련은 자체 동력 없이 사회 변화의 바람을 등에 받으며 순항해왔다는 판단이다. 즉 민중운동 진영과 시민운동 진영은 지향하는 바가 각기 다른데, 사회 변화의 바람은 시민운동 쪽에 순풍이었고 민중운동 쪽에는 역풍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람만 그치면 항해는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바람이 그칠 때를 대비해 엔진을 준비해야 한다. 이러한 자체 판단은 경실련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조직개편 작업을 통한 재도약을 모색케 하고 있다.

경실련은 오는 4월중 경실련 대학생회를 발족할 예정이며 그동안 뚜렷한 활동이 없었던 경실련 노동자협의회를 강화하기로 했다. 또한 올해 안에 지방 조직을 전국 30개 도시로 확대하고 서울에만도 10개 구에 지부 조직을 결성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또한 3월에 격주간지 《시민의 신문》을 창간해서 올해 안에 주간지로 전환할 생각이다. 8월에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 사는 교포 청년들을 초청해 일본과 한국에서 ‘세계 한민족 청년대회??를 개최함으로써 통일운동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경실련내 환경개발센터를 중심으로 지난해 10월 결성한 환경사회단체협의회는 환경운동에서도 두각을 보인다. 노동?학생?통일?환경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는 것이다.

경실련이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의욕적인 활동을 펴자 기존 민중운동 진영 일부에서는 “경실련이 제국주의식으로 다 하는 것 아니냐??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올해 4월쯤 공선협을 확대해 발족할 것으로 알려진 ??정의사회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이하 정사협)도 바로 경실련의 외곽 조직이라는 관측이 있다. △의식개혁 운동 △부정부패 추방 운동 △깨끗한 정치 실현 운동에 주안점을 둘 이 단체에는 공선협에 가입한 5백여개 단체 중에 경실련?흥사단?기독교청년회?한국노총 등 60여 단체가 참여할 예정인데, 그중에서도 경실련의 비중이 가장 크다. 경실련이 외곽 조직을 통해 시민운동의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관측이 나올 법한 상황이다.

‘백화점식 사업??에 내부 비판도

그러나 ‘경실련 제국주의론??은 아무래도 민중운동과 겹쳐지는 지점에서 더 확연해진다. 경실련은 시민운동의 공간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민중운동과 부딪치고, 민중운동에 대해 태도 변화를 주민하기까지 한다.

경실련 노동자협의회의 노선은 뚜렷하다. 그들은 그것을 노동운동의 신노선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에 따르면, 사회주의적 변혁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한국 노동 운동은 오직 ‘참여 속의 개혁??을 해야 할 뿐이다. △국민 경제에 책임지고 △사회적 공동선 추구에 앞장서며 △민주복지사회 실현을 앞당기고 △노사대등에 기초하여 노사협조를 추구하는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전노협 등 재야 노동운동계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사항이다. 경실련 노동자협의회는 올해 상반기 안에 서울 인천 안양 안산 수원 등 수도권 5개 지역에 지방 조직을 완성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이미 경실련에는 얼마전 전노협과 진보정당으로부터 30여명이 들어왔다. 경실련 실무자끼리 “경실련에는 NL출신이 반, PD출신이 반??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한국노동당창립준비위 사무총장 전 성씨와 진보정당추진위 사무총장 박용준씨, 그리고 노동운동의 신노선을 주창하며 ??진보 진영의 고백?? 바람을 일으켰던 신지호씨도 경실련 실무자로 활동한다. 이들은 지하 이념 정당에서 활약한 급진 세력이었다.

기획실장 전 성씨는 “자기 책임 아래 현실과 씨름했던 사람만이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내가 경실련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그 현실 때문이다. 하지만 재야운동은 지금 현실과 추상적으로 씨름하고 있는데 그렇게 옛날식으로 계속해 봐야 소금기둥이다. 이제 재야도 말끔하게 자기 정리를 하고 사회변화에 맞춰 변신해야 한다. 그랬을 때 경실련이 재야와 사안 별로 연대해 사회운동의 새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민중운동 진영이 변해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기존 재야 노동운동권이 보내는 눈길은 결코 곱지 않다. ??혹독한 시절에 고생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그렇지 않아도 노동운동이 어려운 마당에 염치없이 나서서 더욱 힘들게 만든다??고 경실련을 비난하는 것이다.

경실련 대학생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서울대 연대 고대 이화여대 등 전국 20여개 대학에 경실련 대학생회 조직이 있다. 경실련 대학생회는 “더이상 학생운동을 특정 정파 운동에 맡겨서는 안된다??는 판단으로 4월쯤 발족한다. 경실련 대학생회는 △합법?평화 운동을 지향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의식개혁 및 새로운 윤리형성 운동을 전개하고 △시민운동과 연대하는 운동을 펴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주로 환경운동과 통일운동, 그리고 생활문화 혁신운동 등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한다.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전대협 등 기존 학생운동 조직과 다른 노선이다. 경실련 대학생회 회장 김영덕군(한양대 87학번)은 ??기존 학생운동 조직과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힘이 길러지고 여론이 좋아진다면 총학생회에 진출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처럼 조직을 확대 개편해서 모든 분야에 걸쳐 운동을 펴나가는 데 대해, 경실련 내부에서도 “내실을 다지지 않고 사업을 백화점식으로 꾸려나가는 것 아니냐??하는 비판이 있다. 이에 대해 서경석 사무총장은 ??그런 면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거꾸로 생각하면 사회가 경실련에 대해 모든 분야에 대해 신경 쓰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경실련의 무게가 늘어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 3년여간 경실련의 성장은 눈부신 것이었다.

경실련 연구진은 고급두뇌 집단

서경석 사무총장은 초기에는 경실련이 양쪽의 공격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하나는 정부 쪽의 ??가면 쓴 운동권??이라는 시각이었고 또 하나는 ??변혁운동의 김을 빼는 개량주의 집단??이라는 민중운동 쪽의 공격이었다.?? 초기에 경실련이 보였던 입지가 그랬다. 서경석 사무총장은, 경실련이 대안을 제시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공정한 시문운동단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실련의 성장 배경을 놓고 언론의 입맛에 맞는 운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즉 ??투쟁은 민중이하고, 경실련은 재빨리 대안을 만들어 열매를 따먹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경실련도 이런 비판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이다.

사실 경실련의 장점은 대중을 동원해 거리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방식이 아니라, 정부를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명쾌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텔레비전 시사토론에서 정부측 토론자를 궁지에 몰아넣는 단골 토론자들은 상당수가 경실련 연구위원들이다. 경실련에는 각 분야에서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대학교수들이 포진하고 있으며, 석·박사 2백50여명이 분야별로 활동하고 있다. 흔히 경실련 연구진은, 한국에서 정부와 민자당 다음 가는 두뇌집단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언제까지 정책 대안만 내놓는 데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실련은 최근 시민운동 공간을 확대하고 그 중심에 우뚝 서기 위해 조직 확장을 통한 재도약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경실련이 지금까지 사회변화의 흐름을 타고 발전해왔다면, 이제는 사회변화를 주도하겠다는 의도이다. 이와 관련해 경실련 안에서는 요즘 세가지 논의가 비공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세가지 논의는 시민운동의 미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첫째,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순수 연구집단으로 축소해야 한다는 입장. 둘째,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순수 시민운동 단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입장. 셋째, 야당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정치현실 속에서 국민적 요청이 있다면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논의는 대략 둘째 입장으로 모아지고 있다. 어느 입장이든 일단 ‘엔진??을 달고 난 다음의 문제다. 더 이상 시민운동이 예전과 같은 프리미엄을 누릴 수 없는 시대가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 단체인 공추련도 비슷한 상황인식을 하고 있다. 환경문제를 대하는 정부와 기업의 자세가 소극에서 적극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사건이 터지면 쫒아가서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는 운동은 더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즉 그동안 공추련이 도맡아서 해온 일을 정부와 기업이 하겠다고 나서면 공추련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변신은 절박한 위기의식의 결과??

이러한 상황인식에서 공추련은 4월쯤 조직을 해체하고 ‘전국환경단체연합??으로 거듭난다. 부산 대구 마산 대전 광주 등 전국 11개 공추련 연대 단체를 통합해서 전국적인 단일조직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민간 환경 연구소를 만들어 연구력과 분석력을 갖출 계획이다. 이는 ??그동안 심증만으로 밀어붙이던 운동에서 벗어나 물증을 확보해서 싸울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공추련은 앞으로 환경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는데 힘을 쏟을 생각이다. 환경문제에 관한 한 한국의 가장 중요한 민간 단체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다. 공추련 박상철 사무국장은 ??경실련과 마찬가지로 공추련도 사회변화에 힘입어 성장한 운동단체이다. 공추련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우리 단체의 변신은 절박한 위기의식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적응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응이다??라고 말한다.

경실련이나 공추련이나 요즘 모두 자체 동력을 마련하기에 분주하다. 그들은 ‘때 이른 침체??를 면치 못한 민중운동으로부터 절박한 교훈을 얻은 셈이다. 민중운동이 80년대를 감당했다면, 시민운동은 90년대를 감당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시민운동은 급속히 성장했다. 93년은 시민운동이 시대의 중심에 서느냐 아니면 민중운동의 쇠퇴를 닮느냐 하는 시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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