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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갈되는 석유, 장기 대책 이 없다

남미에 ‘자원 국유화’ 바람이 거세지만 정부는 지켜보고만 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은남 기자 ㅣ ken@sisapress.com | 승인 2006.05.12(Fri)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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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장 큰 관심사는 페루다. 페루 대선 결과를 긴장 속에 지켜보고 있다.” 남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자원 국유화 도미노 현상을 놓고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미노의 첫 패를 뽑아든 것은, 남미 석유 생산량 1위인 베네수엘라였다. 1999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반미·자주 노선을 노골적으로 천명해 온 이 나라 차베스 대통령은 집권 이후 꾸준히 가스 및 석유 산업 국유화 정책을 추진해 왔다. 1990년대 베네수엘라 정부가 다국적 석유 회사들과 집중적으로 체결했던 계약을 무효화하고 이를 합작 투자 형태로 전환하는 방식을 썼다. 

이를 따르지 않는 회사에는 추방령이 떨어졌다. 지난 4월1일 베네수엘라는 이탈리아 ‘에니’와 프랑스 ‘토탈’이 운영하던 유전 두 곳의 지분을 전면 몰수했다. 이들 회사는 합작회사 설립을 위한 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버텨오던 중이었다.

페루에서 ‘좌파’ 승리하면 확보 물량 급감

그로부터 한 달 뒤인 5월1일에는 볼리비아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해 12월 자원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된 에고 모랄레스 대통령은 노동절인 이날 “이제 외국 회사의 약탈은 끝났다. 천연자원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권을 회복한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라고 선언하며, ‘석유·가스 자원 국유화법’에 서명했다. 

새 법에 따르면 볼리비아에서 가스·석유전을 운영하는 외국 회사들은 볼리비아 국영 석유회사(YPFB)에 소유권을 양도해야 한다. 이들 가스·석유전에서 나온 가스·석유 생산량의 82%가 볼리비아 정부 차지다. 이를 따르지 않는 외국 회사에는 6개월 이내에 추방령이 떨어진다.

이런 상황이 잇달아 벌어지자 한국 정부도 산업자원부·외교통상부를 중심으로  ‘남미 자원 국유화 대응 대책반’을 구성했다. 그러나 지난 5월4일 첫 회의를 연 대책반은 현지에 인력을 긴급 파견한다든가 하는 조처 없이 당분간 사태를 지켜보기로 결론을 내렸다.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다음달 대통령 결선 투표를 앞둔 페루 때문이었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남미 지역은 국내 석유 수급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만 문제가 된다면 한국석유공사와 SK·대우 등 민간 기업이 이 지역에서 석유 개발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 기업은 남미에서 베네수엘라·볼리비아·페루·아르헨티나·브라질 다섯 나라의 13개 사업에 진출하고 있다(표 참조). 이는 한국의 전 세계 석유 개발 사업의 투자 금액 대비 21%, 확보 생산량으로는 16%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도 투자가 특히 집중되어 있는 나라가 페루이다. 남미 전체 투자액 기준으로 85%가 페루에 몰려 있다. 이에 비하면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 쪽은 진출 실적이 미미한 편이다. 그런데 지난달 치러진 페루 대선 1차 투표에서 자원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건 좌파 성향의 오얀타 우말라 후보가 1위(31%)를 차지함으로써 한국 기업의 긴장이 부쩍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페루에서 좌파 후보가 승리하고, 다른 남미 국가로 자원 국유화 바람이 더 확산될 경우 한국이 확보한 물량은 급감하게 된다. 산업자원부는 자원 국유화 확산으로 현재 진출해 있는 사업의 절반을 잃는다고 가정했을 때 확보 매장량의 14%, 생산량의 8%가 감소하리라고 전망했다.  

이 때문에 남미에 진출해 있는 SK주식회사 현지 관계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정부 또한 외교적으로 민감한 상황에서 괜히 나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최근 치러진 페루 여론조사에서는 1차 투표에서 2위(24.3%)를 차지했던 중도 좌파 성향인 알란 가르시아 후보가 결선 투표에서 좀더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르시아는 우말라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이다.

그러나 정부의 이같은 자세는 지나치게 안일하고 소극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곽재성 교수(경희대 국제대학원)는 “자원 확보가 절실한 한국 상황에 비추어, 정부나 기업이나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다국적 기업들, 지분 줄어도 수익 계속 챙길 듯

남미에서 최근 진행되는 자원 국유화 흐름은 과거의 국유화와는 궤를 달리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970년대에도 베네수엘라 등은 자원 국유화 조처를 단행했다. 그러다 석유 생산량이 감소하면 다시 외국 회사에 유전을 개방하는 식으로 사실상 국유화 기조를 허물어뜨렸다. 

최근의 재국유화 방식도 이때와는 다르다. 한국석유공사 유정만 생산운영팀장은 “국유화라고 무조건 지분을 몽땅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순차적으로 지분이 줄어드는 것이므로 큰 타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석유공사는 베네수엘라 자원 국유화 조처에 따라 현지 오나도 광구 소유 지분이 14.1%에서 5.64%로 축소될 처지에 있다.

   
 
ⓒ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이 5월11일 아제르바이잔 순방 중 상가찰 오일 터미널을 둘러보고 있다. 카스피해 원유를 수송하는 송유관이 이곳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지분이 줄어든다고 외국계 석유 기업들이 당장 철수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앞서의 에니 및 토탈을 제외한 모든 외국 기업이 합작회사 설립에 동의했다. 차베스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더라도 석유 잠재력이 막대한 베네수엘라에서의 사업은 여전히 상당한 수익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고유가가 지속되는 한 베네수엘라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로열티를 16.7%에서 33%로, 법인세를 34%에서 50%로 올려준다 해도 다국적 기업의 순이익은 9.3%(배럴당 40달러 기준)~16%(배럴당 60달러 기준)가량 증가할 것이라고 한 전문 기관은 예측했다(캠벨, 2006). 한 예로 엑슨모빌이 머뭇거리는 동안 스페인 렙솔YPF는 재빠르게 베네수엘라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여 유전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국적 기업과 공존이 가능한 것은, 남미 지역에 들어서고 있는 이들 좌파 정권이 이른바 실용 좌파의 성격을 띠는 데 기인한다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김원호 선임연구원은 분석했다(딸린 기사 참조). 

전문가들은 중남미 지역에 최근 출현한 좌파 지도자들을 ‘차베스형’과 ‘룰라형’으로 구분한다. 이들은 브라질 룰라 대통령, 칠레 바첼렛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룰라형 지도자들의 경우 ‘무늬만 좌파’일 뿐 재정자금과 경제 운영에서 신자유주의 모델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차베스·모랄레스·우말라 등 차베스형 지도자들 또한 전통적 의미의 좌파는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다. 외국 자본의 수탈에 분노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국유화를 내세웠으되, 실제로는 사유 재산을 부정하지 않고 자본주의 틀 안에서 경제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볼리비아 모랄레스 대통령만 해도 선거운동 때는 전면적인 국유화를 내걸었으나 당선 뒤에는 단계적 국유화(합작 회사)로 방향을 틀었다.

이는 이들 나라가 석유·가스 자원 빼고는 현재 딱히 내세울 대외 경쟁력이라는 것이 없는 처지에서 기인한다고 김재두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분석했다. 지금 같은 고유가 상황에서는 이들 자원을 ‘꽃놀이패’ 삼아 미국을 협박하는 것이 통한다. 그러나 경제 기반이 여전히 취약한 상태에서 유가 폭락 사태라도 맞았다가는 내부 권력 약화는 물론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도 휘청댈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나라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건설·전력 업체 남미에 동반 진출해야”

위기가 기회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들 나라들은 공히 고유가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는 현 상황에서 경제·사회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럴 때 한국도 석유 회사뿐 아니라 건설·전력 업체 등이 동반 진출해 ‘제2의 중동 붐’을 노리는 전략을 구사해 봄직하다고 곽재성 교수는 지적했다. 특히 가스전 국유화로 인해 브라질 등 인근 남미 나라와 마찰을 빚고 있는 볼리비아의 경우 이르면 2~3년 내 주요 수출 시장을 남미에서 아시아·태평양권 국가로 전환할 것이 예상되는 만큼 지금부터 이에 대비하면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남미 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중동·아프리카를 누비며 적극적인 자원 외교를 펼치고 있는 후진타오 중국 주석은 2004년 11월 브라질·아르헨티나 등을 방문해 1천억 달러에 달하는 에너지 계약에 서명했다. 같은 해 차베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자 중국은 베네수엘라 유전에 3억5천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최근 볼리비아가 자원 국유화 결정을 내린 뒤에도 중국은 이미 이 나라에 진출해 있던 다국적 기업이 철수할지 모를 상황에 대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에 비한다면 한국 정부는 장기적인 안목이 크게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남미 밖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자원 국유화는 기실 남미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러시아는 푸틴 정부 출범 이후 에너지 자원에 대한 국가 통제권을 확실하게 강화하고 있다. 2003년에는 자국 내 주요 유전을 전략 광구로 분류하는 법 개정을 통해 전략 광구에 대해서는 외국인이 51% 이상 지분을 보유할 수 없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푸틴 정부는 국영 석유·가스 회사를 통해 과거 옐친 및 고르바초프 정부 시절에 급성장한 민간 에너지 회사를 매수·합병(M&A)하는 절차를 밟았다. 러시아 최대 민간 석유 회사였던 유코스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 조사 및 경영주 구속은 그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 파산 선고를 받은 유코스는 국영 석유 회사인 로즈네프트에 매수·합병되었다.

국유화 방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에너지 자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은 산유국의 공통된 흐름이다. 중동 지역 산유국 또한 주요 유전에 대한 석유 개발 부문은 외국 회사에 개방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자원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신흥 에너지 소비대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과 인도는 이에 맞서 해외 자원 시장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오일 피크’ 이르면 올해가 될 수도

반면 한국의 자원 외교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상자 기사 참조). 더 중요한 것은 절박한 현실 인식의 부족이다. 석유 생산의 정점, 이른바 ‘오일 피크’가 언제가 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르면 올해가 될 수도 있다는 비관론(콜린 캠벨)이 있는가 하면 앞으로 100년은 끄떡없을 것이라는 낙관론(OPEC)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존 유전의 수명이 다해가는 데 비해 새로 발견된 유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생산 중인 유전의 80%는 1970년대 이전에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도 전세계는 하루 8천5백만 배럴씩 석유를 꼬박꼬박 소비하고 있다. 5억 배럴 넘는 거대 유전을 세계가 1주일에 한 개씩 해치우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가면 언제 석유 위기가 닥칠지 소름이 끼친다고 해외 유전 개발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한 민간 기업 간부는 말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비굴할 정도로 산유국에 자세를 굽히고 협력을 청해도 모자랄 텐데 한국 정부는 여전히 굼뜬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재두 국방안보연구원 연구위원은 21세기 들어 이념이 지배하던 지정학적 동맹 시대가 마감되고, 국익 및 실리 위주로 동맹이 유기적으로 재편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란 핵 사태와 남미발 자원 국유화 바람을 타고 점차 구체화되는 ‘반미 에너지 동맹’은 그 신호탄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중국·러시아까지 본격 가세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바야흐로 에너지 패권 경쟁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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