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정치 연금술사'
  • 조용준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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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력 뛰어난 타협의 귀재‥‥ 야당 분열 주역·불신 조장 등 오점


  진산의 정치 이력은 수난으로 점철된 야당사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는 광복후 大同靑年團을 결성해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청년 운동은 韓民黨과 연결된 반공 독립투쟁으로 이어진다.

  그의 정당 활동은 51년 당시 民國黨 사무총장이던 越炳玉 박사의 권유로 민국당총무부장을 맡은 데서 시작되었다. 그가 제자리를 잡은 것은 54년 3대 국회에 진출하면서부터이다. 그는 民主黨의 지도자였던 조병옥의 제 1막료였다. 가장 능란한 참모이자 정치 협상의 조타수였다.

  그는 집권 투쟁에서 신파에 무릎을 끊은 뒤 구파의 신당 운동을 이끈 분당 주역이 긴했어도 張 勉 정권에 대한 반대 정당의 조정자역을 감당해 나갔다. 그는 조병옥을 계승한 尹潽善을 내세워 제2공화국과 군정, 그리고 민정이양 준비기간까지 민주당 구파세력의 야전 사령관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윤보선씨와 결별한 뒤 정치적 상극 관계로 바뀌면서 그는 야당이 겪는 불행한 파동의 한복판에서 상처를 보태갔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건 윤보선과 유진산 사이의 진흙탕 싸움인 65년의 진산 파동은 야당의 전열에 아물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진산 파동은 5·16 이후 최초의 통합야당이었던 民衆黨이 朴順天을 당수로 초대함으로써 윤보선의 이탈이란 분열을 낳게 했고, 이로써 67년 선거 직전 야당 전열을 엉성하게 얽은 新民黨이 창당되었다.

  진산이 당으로부터 축출된 진산 파동 때의 좌절은 당료파인 그에게는 씻기지 않는 오점이었다. 그런나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재기했다. 그는 집념이 강했고 정치에 능란했다. 그는 항상 상대방에게 기대감을 던져 주면서도, 정치는 여건의 변동에 따라야 한다는 정치 철학에 따라 명백한 약속을 피하고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은 일이 없어 불신을 왔다.

 

2전3기의 오뚝이

  70년 6월 유진오가 병석에 눕자 진산은 신민당 새 당수로 선출됐다. 그는 당다운 당을 만들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에게 씌워진 정치적 오점을 지워야겠다는 집념으로 읽혀졌다. 그 때문에 김영삼 김대중 등 40대의 도전과 추격은 그를 끊임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40대에 대한 그의 대응은 조급하고 신경질적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는 '제2의 진산 파동'을 겪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는 73년 5월 9대 국회 구성 이후의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수로 추대되어 '진산 3기'를 열었지만 74년 4월 지병으로 숨지면서 '진산시대'의 막을 내렸다. 그 해 8월 신민당은 김영삼을 총채로 선출해 40대 김영삼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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