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도는 통일원, 외로운 부총리
  • 한종호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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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정책 의지, 北핵문제 걸려 주춤 … 나라 안팎 ‘견제’로 한장관 입지 위축


 

 지난 3월초 한동안 통일원 내부에는 상당수의 기구가 확대·개편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안기부가 여론의 호된 비판 속에 기구 축소 작업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안기부가 사실상 독점해온 남북대화 관련 업무 및 예산도 통일원에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새 정부의 실세라는 신임 韓完相 부총리가 통일원을 ‘통일 정책의 기관차’로 만들겠다며 의욕을 보이던 터라 통일원 직원들은 ‘이제야 통일원이 제 위상을 찾기 시작하는 가 보다’라며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그같은 논의는 곧 흐지부지됐고 얼마 뒤 통일원은 별다른 성과 없이 실장급 간부 두사람을 자리바꿈하는 선에서 인사를 마쳤다. 통일원 직원들이 맥이 빠진 것은 물론이다. 반면 수세에 몰리던 안기부는 국내 정치 담당 부서를 줄이는 대신 대북 업무 진용을 확대 재정비하여 통일원 사람들을 기죽게 했다. 안기부는 서울분실을 줄여 국내보안국으로 통합하는 대신 대북 방문 및 접촉, 합작사업을 관장하는 대북전략국을 신설했다. 그리고 그동안 몇갈래로 분산해 진행되어온 남북회담 관련 업무도 부장 직속으로 단일화하여 업무 효율성을 높였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통일원의 한 실무자는 “샘이 나서 못해 먹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 사례는 새 정부에서 통일원과 안기부의 관계를, 그리고 좁아진 한부총리의 입지를 엿보게 한다.

 

통일원의 구조적 한계도 원인

 한부총리는 취임 이후 한동안 통일정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이겠다며 의욕적으로 뛰는 모습을 보였다. 통일의 3원칙으로 민족복리·공존공영·국민화합을 내걸고 ‘통일이념으로서의 민족주의’를 연구하도록 했다. 인도주의원칙에 따라 이인모씨를 조건 없이 송환했다. 이같은 정책기조의 변화와 함께 통일 관계 장관회의에 안기부장이 특보를 대신 보내는 관행을 깨고 직접 참가하는가 하면 통일 관계 전략회의를 부총리가 소집하는 등 외형적 변화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부총리의 통일원이 통일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밖에서는 개혁풍이 매섭게 휘몰아치고 있지만 통일원만은 무풍지대인 듯 조용하기만 하다. 한부총리 취임 당시의 들뜬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불과 한달 사이에 이처럼 분위기가 뒤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직접적 계기는 북한의 핵금조약 탈퇴로 형성된 국제적 공안정국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북한 핵 문제가 △유엔 등 국제 기구와 북한 △미국과 북한 △남북한 등 세가지 차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현재 핵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가 있긴 하지만 북한은 미국과의 담판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핵 문제가 ‘국제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민족적 차원 혹은 남북한 양자 관계라는 차원에서 뭔가를 해볼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통일원의 한 당국자는 “정부의 핵정책이 철저하게 안보외교 논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건의해도 먹혀들지 않는 분위기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같은 외부정세론만으로는 무언가 설명이 부족하다. 통일원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이를 “통일원의 구조적 한계와 한부총리의 취약한 입지가 중첩된 것”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통일원이 제도적으로 제 역할을 해내기 힘든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은 더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정부조직법상 통일원은 통일정책을 총괄 조정하는 기능을 갖도록 되어 있지만 사실상 통일정책의 연구·홍보 기능과 회담 지원만을 담당해왔다. 남북관계의 진전을 억누르고 있는 핵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수단과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또 다른 원인은 한부총리의 처지에서 찾을 수 있다. 한부총리는 취임 당시부터 정부 내에서 쉽사리 지지를 얻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되어 왔다. 그가 교수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한부총리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이 문제삼는 것은 그의 민족주의와 인도주의 중심 원칙이다. 한 전직 총리는 “분단의 동기가 무엇이건 한반도 문제는 이미 국제문제화되어 있다.‘민족내부화’라는 말은 정치적 수사라면 몰라도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역대 정부가 인도주의를 내세운 것은 인도적 명분을 활용하여 벽을 뚫어보자는 것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인도적 문제의 ‘조건 없는 해결’을 내걸고 이인모 송환을 단행한 한부총리의 대북정책은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한부총리에 대한 비판론은 북한이 핵금조약을 탈퇴한 이후 조금씩 표면화하고 있다. 지난 4월9일 민자당 의원세미나에서 당 외무통일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세기 의원은 이인모 송환을 거론하며 “정부가 채찍 없는 당근정책만 편다”며 한부총리의 전향적 대북정책을 신랄히 비판했다. 한부총리 자신도 이같은 반응을 의식한 듯 너무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다. 한 당국자는 “한부총리가 견제를 자초하지 않기 위해 지금은 잠시 엎드려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새 정부의 개혁팀 내부에도 그를 경원하는 분위기가 잇다. 개혁팀 내부 사정에 밝은 한교수는 “한부총리가 기존 집권층으로부터 경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가 개혁팀 내부에서도 따돌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부총리를 ‘청와대에 진입한 개혁팀’의 선두주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보다는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한사람의 자문역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한 인사도 “YS개혁팀 구성원들이 개혁적이긴 하지만 진보적이지는 않다. 문제의 핵심은 한부총리의 진보성을 누가 지지해 주느냐이다”라고 말했다. 새정권의 개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구조적·본질적 개혁보다는 문민 정부의 통치기반 강화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부총리가 통일 분야에서 전향적 구조 개혁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는 통일원 개혁론이 실종된 것도 이같은 정치적 긴장관계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개혁 구상에 참여한 한 교수는 “기본적으로 통일원에 힘을 실어주려는 ‘마인드’를 갖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한사람 힘으로 오랜 관행 바뀌겠나”

 정부에 대해 전향적 통일정책을 촉구해 온 진보 진영의 시각도 비슷하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의 한 인사는 “한부총리에게 기대는 걸지만 한사람의 힘으로 오랜 관행이 바뀔 수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제는 새 정권이 얼마만큼 진보성을 수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풍이 한부총리의 진보적 통일정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평화연구원 김남식 연구위원은 “내부개혁 없이는 전향적 대북정책을 펼 수 없다”며 ‘신한국 건설’이 새로운 통일정책으로 이어지리라 내다봤다. 민주당 이부영 최고위원은 “김영삼 대통령은 개혁 드라이브가 끝난 다음에 강력한 통일 드라이브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후견에도 한계가 있다. 현재 대북 전략을 주도하고 있는 안기부와 외무부가 쉽사리 주도권을 내놓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미국 일본 등 주변국의 견제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일본 언론은 북한이 핵금조약을 탈퇴한 뒤 ‘한국 정부의 일부 민족주의자 각료’라는 표현으로 한부총리를 겨냥하여 남북한 직접협상에 대한 ‘우려’를 표시해왔다. 정가에서는 타노프 미 정무차관이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목적도 한국 정부의 ‘독자 행동’여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민족민주운동연구소 오경훈 연구원은 “국내 정치라면 몰라도 대북 문제에 고나한 한 대통령의 신임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통일원이 지금 일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통일원 당국자는 “우리는 회담을 비롯한 남북관계 진전에 강한 욕구를 갖고 있다. 다만 지금은 그 시점이 아닐 뿐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모로 보나 한부총리가 지금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그로서는 하루 빨리 핵 문제가 해결되어 전향적 통일정책을 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통일원의 한 젊은 사무관은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통일원의 장래는 북한측의 변화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한측이 본질적 변화의 길로 접어들지 않는 한 한국정부의 대북정책 역시 지금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말이다.

 이같은 분석이 옳다면 당분간은 한부총리의 통일호 기관차가 분단의 플랫폼을 벗어나 통일을 향해 달려나가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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