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세계화’의 초상
  • 싱가포르ㆍ남유철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0년 직장 떠나 싱가포르서 社長된 지바 고조씨



 싱가포르 중심지에서 택시로 40분가량을 가면 싱가포르 사람들이 흔히 ‘인더스트리얼 에어리어(Industrial Area)'라고 부르는 대규모 공업단지가 나온다. 이 단지 내에서도 한적한 지역인 세노코가 구석에 종업원 1백명 규모의 센리전자라는 중소 업체가 잇따.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인쇄 회로기판을 만드는, 연간 매출액 7백만달러의 견실한 제조 회사이다.

 센리전자는 사장이 일본인이라는 사실만 빼면 특이할 것이 없는 ‘싱가포르 회사’이다. 중국계·말레이계·인도계 싱가포르 종업원들이 골고루 섞여 일하는 전형적인 싱가포르 제조업체이다. “우리 회사는 싱가포르에 진출한 일본 회사가 아니다. 싱가포르에서 설립된 ‘로컬(현지)’회사이다”라고 지바고조(千葉光三·54)사장은 거듭 강조한다. 지바 사장에게 센리전자가 로컬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센리전자는 법적으로 1백% 현지 법인이다. 그러나 “내가 영주권을 갖고 있지 않아 누구도 진짜 로컬이라고는 생각하지 앟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진짜 로컬’로 인정받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손해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지바 사장은 지난 89년 신분을 밝힐 수 없는 ‘다국적 동업자들’과 센리전자를 설립했다. 설립자본금은 5백만달러. 자신이 평생을 모든 45만달러를 투자한 지바 사장은 현재 19%의 지분을 갖고 있다. 그는 외국에서 창업이 가능했던 것은 ‘30년을 가꾸어 온 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소한 자리는 잡았다는 지금 돌이켜 보아도 50세에 평생을 봉직했던 회사를 떠나, 그것도 외국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회고한다. “내가 회사를 떠날 때 모든 동료들이 나의 결단과 용기를 부러워했다.”

 

“싱가포르는 외국인 투자가의 낙원”

 지바 사장은 일본의 초거대 기업 NEC(日本電氣)에서 30년을 봉직한 전형적인 ‘사무라이 샐러리맨’이었다. 그는 지난 83년 싱가포르에 부임해와 NEC의 반도체공장을 설립했고, 87년까지 일등 주재원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싱가포르 근무를 마치고 영전해 도쿄로 돌아갈 때 그는 이미 독립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당시 내게는 두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NEC에 남아 도전이 없는 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청 기업의 중역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그 둘 모두 내게는 맞지 않았다.”

 ‘일본의 관례’가 갑자기 싫어진 이 사무라이는 ‘반란’의 길을 택했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일본에 돌아가 보니 일본 기업의 문화가 너무 답답했다. 갑자기 내가 늙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사업부장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다시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올랐다.“꼭 싱가포르에 돌아올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사업을 하려고 보니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는 설명이다. 지바 사장은,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은 회사를 설립하기가 너무 쉽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외국인 투자를 최대한 끌어들이려는 싱가포르는 모든 면에서 사업하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특히 지바 사장의 고객은 동남아에 진출한 일본과 미국 등의 전자회사이기 때문에 “회사의 본부를 두기에는 싱가포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한다.

 싱가포르 영주권을 받는 것이 지바 사장에게는 마지막 남은 개인적인 욕심이다. 센린전자가 진정으로 현지화하기 위해서도 영주권은 필요하고, 자신도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류상 나는 센리전자에 고용된 사장이므로 외국인 신분으로 싱가포르에 얼마든지 머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비자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싱가포르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꿈은 싱가포르와 호주 그리고 일본에 모두 집 한채씩을 갖고 국제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지바 사장의 아내와 27세된 아들은 일본에서 살고 있다.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창업 초기에는 “차라리 아내가 없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일본의 아내는 꼭 남편을 따라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그가 아직은 속일 수 없는 ‘일본 남자’임이 드러난다.

 지난 80년대 일본 기업들은 막대한 해외진출을 단행했다. 화려한 ‘거품 경제’가 가져온 ‘돌진의 시대’였다. 일본 경제 전문가들은 90년대를 ‘진정한 국제화의 시대’라고 내다본다. 일본 기업들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또 다른 차원의 세계화를 진행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빌 에모토 편집장은 이를 ‘더욱 용감하고, 더욱 국제적인 새 일본’의 탄생이라고 표현했다. 지바 사장이 이 ‘새 일본’의 조용한 변모를 잘 보여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