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작품 찾는 ‘정서적 탈거품화’ 뚜렷
  • 이문재 · 송 준 기자 ()
  • 승인 2006.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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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 그린 소설ㆍ연극ㆍ영화ㆍ음반 이구 부쩍 늘어

“새 정부의 개혁 바람이 계기 제공”…지속성이 문제

 ‘거품’이 걷히고 있다.  삶과 인간, 세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 최근까지 들끓던‘거품 문화’를 밀쳐내고 있다.  문학 연극영화 가요 그리고 방송 프로그램에서까지도 문화를 향유하는 패턴이 전환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거품은 80년대 미국과 일본의 이상 경기 현상을 일컬을 때 자주 쓰이던 경제학적 표현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깃발이 펄럭이던 지난 3~4년간의 한국 문화 현상을 가리키는 데에도 적당해 보인다.

 80년대와 90년 전후의 한국ㄱ 문화는 ‘이념의 무거움’과 ‘참을 수 없는, 자본주의의 가벼움’으로 압축된다.  전자는 미족 민중 계급외세 통일과 같은 거대 논리였다.  그것은 이분법적이었고 동시에 억압적이었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자, 세계관의 무게 중심은 즉시 반전됐다.  탈중심과 다양성을 강조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 산업사회를 해석하는 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문화를 향유하는 대중들이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용어부터가 낯설기만 한 박래품이었다.  그러나 문화 상품을 만들고 유통시키는 쪽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새로운 ‘광고 카피’였다.  영상을 먹고 자란 신세대를 해부할 때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억압과 경박스러움에 대한 반작용

 80년대 중반 미국의 여피족과 일본의 신인류가 그러했듯이 한국의 신세대가 주도한 거품 문화 현상은, 감성의 혁명이란 구호 아래, 물질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이며 주기가 극히 짧은 과잉 소비문화를 급속하게 전파시켰다.  압구정족과 같은 배타적인 소비문화는 같은 또래의 신세대와도 구분됐고 동시에 신세대 전체는 기성세대와 공감대를 만들지 못했다.

 신세대가 문화의 소비 성향을 주도하는 데 비해, 앞만 보고 달려온 기성세대는 문화로부터 비켜나 있었다.  자기세대의 정체성을 확인해 볼 만한 문화는 거의 없었다.  최근 일고 있는 문화 향유에 있어서의 탈거품화는 위와 같은 배경을 깔고 있다.  대상(작품)은 물론이고 문화 향유의 주체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소설 0000’이란 제목을 달고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를 점령해왔던 역사 소설류를 제치고 5월 중순 현재《시사저널》집계 천국 서점 베스트셀러 소설 부문 6위, 교보문고 소설 부문 3위(1위는《서편제》)를 기록하고 있는 신경숙씨의 소설집《풍금이 있던 자리》(문학과지성사 펴냄)에 독자들이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활자 매체의 조명을 많이 받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문학 평론가 김병익씨(《출판저널》편집인)는 신경숙씨의 소설《풍금이…》와 영화<서편제>와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이청준씨의 연작소설 《서편제》(열림원 펴냄)에 관객과 독자가 몰리는 현상을 ‘정서적인 탈거품화’로 본다.  김병익씨에 따르면, 인간에겐 원초적으로 사회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개별적이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존재한다.  “80년대의 거대 논리나 최근의 부박한 문화를 벗어나 정서적인 안정과 풍요를 희망하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김씨는 말했다.

 여성의 내면세계를 섬세한 문체로 직조해 낸 신경숙씨의 단편들은 충격적인 메시지를 담지 않고 있다. 《풍금…》는 농촌에서 겪은 가족사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도시 속의 여성 심리를 존재론적 입장에서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문화 평론가 박덕규씨는 시씨의 소설이 많이 읽히는 이유를 드라마<아들과 딸>과 연결지으면서 그의 소설은“몸은 도시에 있지만 흙을 향해 있는 향수를 미묘하게 건드린다”고 말했다.

 연극 분야에서는 탈거품화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준견 연기자 전무송씨와 최종원씨가 등장하는 연극 <북어대가리>(이강백 작ㆍ김광림 연출)를 비롯, 극단 연우무대의 ‘한국현대연국의 재발견’ 시리즈의 하나인<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오영진 작ㆍ윤광진 연출)극단 신협의 <동승>(함세덕 작ㆍ예수정 연출) 극단 현대예술극장의<어느 아버지의 죽음>(윤대성 각색ㆍ정일성 연출>등 진지한 주제를 다룬 무대의 객석이 빼곡하게 차는 것이다.

 

중년 관객 많이 물리는 연극

 서로 대조적인 인생관을 가진 창고지기 두 사람의 갈등을 통해‘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북어대가리>가 성공한 까닭을, 이 연극 기획자 김병호씨(다운기획 대표는 “출연자 스태프 기획자의 삼위일체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중년층이 많은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했다.  <북어대가리>의 연출가 김광림씨는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애로 잡고, 관객들을 편안하게 극 속으로 끌어 들이려고 노력한 것이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작품이 ‘93백상예술대상 3개 부문(대상, 작품상, 연출상)을 수상한 사실도 새삼 일반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김광림씨는 독서 패턴처럼 관극 행태의 변화도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파악한다.  김씨는 “시대를 주도하는 형식이 없을 때는 본질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면서 문화는 늘 움직이는 부정형이지만, 그 뿌리는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경향은 영화의 경우에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 대표적 징후는 물론<서편제>선풍이다.  벌써 14만명이 보고 간 이 영화는 여전히 평일에도 매회 매진을 기록 중이다.

 이 영화의 무엇이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일까.  전통 문화, 토속 풍경을 소재로 한 한국적 영상이기 때문인가, 이에 대해 연세대 사회학과 강사 김찬호씨는 “단순히 우리 문화를 보고 싶으면 국악이나 탈춤 공연장을 찾을 일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문화는 있지만 삶이 없다.  사람들은<서편제>에서 우리 삶 속에 녹아든 우리 문화를 만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주인공들의 비장함이 감동 안겨준<서편제>

 뛰어난 영상미와 판소리가 어우러지고, 삶과 예술에 부과된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하는 주인공들의 비장함이 관객에게 감동을 안겨준 것이다.  이 감응도는, 한때 <나의 사랑 나의 신부>(김의석) <미스터 맘마>(강우석)에 몰렸던 관객의 반응과는 궤를 달리한다.

 영화 평론가 이세룡 씨는 “일상 소재를 희화한 일련의 영화는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에게 일종의 당의정 구실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 맛에 싫증을 느낄 때쯤 관객은 온몸이 푹 빠져드는 질박한 삶의 이야기, 분홍빛 일색이 아닌 상처를 끌어안는 삶의 이야기, 분홍빛 일색이 아닌 상처를 끌어안는 삶의 현실성을 잦기 마련이라는 지적이다.

 <서편제> 말고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금지된 사랑>(클로드 소테) <엠마와 부메의 사랑>(이스트반 자보) <K2>(프랑크 로담) <그랑 블루>(릭 베송)따위가 ‘단 맛’의 반대켠에 있는 영화들이다.

 

‘탈 기계음’외치는 대중가요

 최근 김민기의 새 음반을 필두로 불어닥친 대중 가요계의 탈 거품 바람도 거세다. 대표작 40곡을 앨범 4장에 담은 <김민기 전집>이 출반 두달 만에 18만장이 팔렸다.  ㅇ레코드점(서울 시청 근처)의 경우 최근 하루 판매향이 10~15장, ㄷ레코드점(서울 강남역 근처)의 경우 15~20장에 달한다.

 ‘김민기 붐’은 그러나 가요팬의 느닷없는 변덕도, 때 아닌 복고도 아니다.  컴퓨터와 신시사이저, 그리고 각종 전자 악기에 의존한 이른바 테크노 뮤직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노래의 본디 속성은 부르기이다.  미디어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부르기를 기계가 대신 하게 돼 마침내는 듣기가 주요 속성이 돼버렸다”고 김민기씨는 지적한다.  따라서 감상 위주의 노래가 판을 치게 되고, 첨단 악기와 갖은 기교가 총동원될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율동과 영상같은 노래 바깥의 요소가 첨가된다.  결국에는 노래의 의미(가사ㆍ메시지)마저 퇴색하고 오직 현란한  곡조와 빠른 박자의 파편들만 기계의 입을 통해 울려퍼지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10~20대들은 이 노래 속에 파묻혀 자랐다.  팝 칼럼니스트 임진모씨는 “일상가 없다.  그래서 음반 제작업자들은 노골적으로 10대를 노린다”고 말한다.  대중 가요가 획일화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노래에 의한 소외가 심해지면 사람은 다시 노래의 처음, 즉 부르기의 즐거움을 찾아 돌아 선다”고 김민기씨는 확신한다.  이같은 변화의 조짐은 지난해 3월부터 있어 왔다.  일체의 첨단 전자 악기를 배제하려는 언플러그드 뮤직 바람이 그것이다.

 김수철 신승훈 이광조 이정선 등과 ‘신촌 블루스’ ‘봄 여름 강을 겨울’ ‘동물원’ 빛과 소금‘ 강은 그룹사운드들이 이 조류에 앞장섰다.  김광석 강산에 이윤수는 공허한 사랑타령을 지양하고 삶의 현장을 노래한다.  그룹’015B‘와 김종서는 환경 오염과 파괴적 문명을 비판하는 음악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대중 문화의 탈거품, 탈10대 조짐은 MBC(4월12일) KBS(5월1일) SBS(4월26일)의 봄철 프로그램 개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드라마와 쇼, 개그와 코미디, 그리고 게임 프로그램 등 전방위에 걸쳐 10대 취향을 지양하고 여러 세대를 겨냥한 가족물들을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문화의 탈거품 현상이 왜 하필 지금 일어나는 것일까, 대중 문화 평론가 김창남씨는 새 정부의 개혁 바람이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설명한다.  “중ㆍ장년층은 톡재 정권의 ‘이데올로기 조작’에 저항하거나 동의ㆍ협력하면서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 과정에서 상화에 순응하는 성향이 생겨났다.  반면 10대는 조작이 끝나 이데올로기의 범주 안에서 허용되는 것을 마음껏 향유하기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최근의 탈거품 조류는 기성 세대의 조심스런 문화적 발언인 셈이다.”

 탈거품 현상에 대한 이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학 평론가 김혜순씨는“의식의 퇴행은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영화<서편제>나 소설<서편제> 그리고 <풍금이…>가 끼치는 문화적 순기능을 인정하면서도 “농경 문화에 기반한 이 작품들이 독자로 하여금 현대ㆍ도시와의 싸움을 잊도록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당대적 삶은 누가 고민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감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김창남씨도 같은 견해이다.  탈거품 문화가 삶의 현장을 진지하게 다룬다고는 하지만, 그곳에는 사회적ㆍ정치적 시각이 원천 봉쇄돼 있다.  사회구조적 문제들까지 개인의 능력 차원으로 치환해버릴 오류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탈거품에 대한 또 다른 우려는 그 지속성여부이다.  모처럼 수면 밖으로 나온 이 같은 진지함은 그러나 ‘허약’하다.  새로운 문화경향이 등장하면 또 그 거품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거품 현상을 시한부 문화라고 비관할 것까지는 없다는 시각도 엄존하다.  연출가 김광림씨는 “새로운 문화유행이 나타난다고 해도 진정성에 대한 갈망은 그 바람의 근저에 항상 흐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거품을 거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문화적 힘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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