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보다 투표’ 이슬람에 새바람
  • 한종호 기자 ()
  • 승인 2006.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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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개혁 내세우며 의회 진출 등 민주주의와 접합 움직임

  서기 632년 예언자 마호메트가 사망한 이래 1천3백6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왕조가 수차례 생겨났다.  그때마다 이상적 이슬람 공동체를 모델로 이슬람을 재생시켜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호메트의 회교 공동체 원리에 따라 초기의 순수 신앙과 행동 규범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운동은 초기 회교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회고 원리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원리주의를 정의한 것이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회교도란 존재하지 않을 정도이다.  현대적 의미의 원리주의의 기원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전문가들은 대개 근대적 원리주의에는 세가지 원천이 있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1750년 아라비아 반도의 압둘 와하브로부터 시작된 와하브 운동이다.  와하브는《코란》과 예언자의 언행에 절대 복종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성인 숭배 관습과 수피의 사상(신비주의)을 철저히 배격했다. 그는 사우드 부족의 후원을 받아 포교를 했는데 그 영향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원리주의자들은 지금도 와하브의 가르침에 따라 이슬람이 가장 찬란하게 꽃 피었던 첫 3백년 동안의 원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1928년 이집트의 국민학교 교사 하산 아르 반나가 창설한 무슬림형제단이다.  이를 근대 원리주의의 효시로 보는 이도 있다.  반나는 서유럽 제국이 이집트를 점령한 뒤 물질문명에 기초한 근대화로 빈부 격차가 확대되어 ‘알라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이슬람 사회가 붕괴됐다고 생각했다.

 

발생한 지역?지향점에 따라 상이하게 발전

 이슬람형제단은 52년 이집트혁명으로 등장한 나세르 정권의 아랍민족주의에 눌려 불법화됐다.  70년 나세르가 병들어 죽은 뒤 아랍민족주의가 쇠퇴하자 그 대안으로 원리주의를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특히 나세르의 뒤를 이은 사다트 대통령이 말로는 스스로 독실한 회교도라고 하면서도 서유럽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 결과 빈부 격차가 심해지자 원리주의는 날로 번성했다.  77년 1월에는 원리주의자를 중심으로 이집트에서 대규모식량 폭동이 일어났다.  79년 3월 사다트가 회교 3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자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을 배반한’사다트의 정치 행동을 격렬하게 규탄했다.  결국 사다트는 급진 원리주의 조직인 지하드(聖戰)소속 이집트 병사에게 피살됐다.  무바라크 현 대통령은 서방 및 이스라엘과의 협조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서 원리주의에 대해 가혹한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인도?파키스탄을 중심으로 41년에 창립된 이슬람협회운동이다.  이 운동을 창시한 마우두디는 샤리아(회교법)를 최고법으로 무슬림움마(공동체)가 지배하는 (神政)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이슬람협회는 지금도 인도 아프가니스탄 영국 등지에 많은 회원을 갖고 있다.

 이처럼 원리주의 운동은 발생한 지역에 따라 혹은 그 지향점에 따라 상이한 발전 경로를 거쳐왔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 이란의 회교 혁명이었다.  보수적시아파 지도자들이 이끈 이란혁명에 고무된 각국의 원리주의자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회교 국가를 수립해야겠다며 더욱 열렬하게 움직였다.  레바논의 최대 종파로서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는 남부 시아파 회교도들은 82년 이후 이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시아파원리주의 조직인‘히즈볼라’(신의 당) ‘아마르’등을 결성해 유럽 미국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폭파?유괴?비행기 납치 같은 테러 행위를 계속했다.  87년말 가자 지구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티파다(주민 봉기)는 원리주의 계열 조직 ‘하마스’의 지도를 받아 이루어졌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변 이슬람 왕국들은 이란을 중심으로 계속 확대되는 원리주의 때문에 잠을 편히 이루지 못했다.  아랍의 패권을 노린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원리주의의 파도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 이란과의 8년 전쟁을 치렀다.  이 때문에 91년 1월 걸프전 당시 후세인은 요르단과 이스라엘 점령지와 북아프라카 각국의 원리주의자들을 향해‘이교도 미국과 이슬람을 배반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해 성전을 일으키라’고 호소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처럼 70~80년대는 이란혁명에 고무된 시아파 원리주의 세력과 이들의 성장을 막아 보려는 주변국 집권 세력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일관한 시기였다.

  89년 이래 동서냉전이 해소되면서 이슬람각국에도 새 바람이 불어왔다.  88년 11월 군주제 나라 요르단에서는 22년 만에 자유 총선거가 실시됐다.  선거 결과 80개 의석 가운데 이슬람형제단이 22석, 원리주의자가 12석을 차지해 이슬람을 통한 정치 개혁을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가 그대로 반영됐다.  62년 독립한 뒤로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해방전선이 지배해온 알제리에서도 90년 6월 복수 정당제에 의한 첫 지방선거가 실시되어 원리주의 계열의 ‘이슬람구국전선(FIS)’이 55%를 차지했다.  이듬해 12월에 실시한 총선에서는 80%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에 화들짝 놀란 알제리 군부의 쿠데타로 원리주의 세력은 집권을 눈앞에 두고 물러나야 했다.  비록 좌절하고 말았지만 알제리 총선은 양립 할 수 없다고 믿어져 온 이슬람과 민주주의 두 요소를 접합한 이른바 ‘이슬람 민주주의’의 첫 실험 무대였다는 점에서 세계가 주목했다. 

  이슬람권의 변화를 반영하여 최근 미국 학계에서는 80년대 후반부터 신 이슬람이 대두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신 이슬람의 특징은 ‘총알보다는 투표’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알제리에서와 같은 이슬람 민주주의 실험이 어떻게 귀결되냐에 따라 원주의의 장래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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