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대중의 삶에 뿌리내린 노래운동
  • 조영주(음악평론가) ()
  • 승인 1989.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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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 성장과 더불어 확신… 80년대말부터는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 담아내

최근 들어 우리는 대학내에서의 시위 · 집회에서뿐만 아니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비롯한 노래운동 단체들의 일반대중을 위한 공연에서, 나아가 매스컴의 대중가요 프로그램에서도 소위 ‘운동권 노래’들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운동가요의 대중적 확산은 사회 전반에 깔려 잇는 민주화 의지를 담아내고 싶어하는 노래운동이 학생운동의 성장 · 대중화와 더불어 변화되어 온 결과이다.

7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의 양상은 비조직적 · 비지속적이었다.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구별도 희미했고 문화적인 구별은 거의 없었다. 이 시기에 불렸던 운동가요들은 ‘선구자’ ‘농민가’ ‘해방가’ ‘스텐카라친’ ‘정의가’ ‘훌라송’ 등이었다. 가사의 서술에 있어 내면화된 감정이나 의지를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낱말로써 사기를 북돋워주는 사실들을 설명 · 묘사하고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비교적 빠른 템포, 짧은 길이의 호흡, 밝고 명랑한 장조적 분위기를 주로 했다. 이러한 특성들은 당시의 운동가요가 구호적은 차원을 벗어나 있지 못했고 따라서 개인의 사사로운 감성적 공간까지 파고들지 못하는 機能謠의 성격을 띠었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당시 미국에서 유입된 포크송계열의 통기타 노래들이 그러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유신독재에 의한 학생운동 탄압은 학생운동으로 하여금 이전의 낭만적인 학생운동을 청산하게 했다. 현실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인식과 함께 ‘운동의 논리’를 발전시켜나가게 했다.

 

노래동호인 서클의 등장

이 시기에 주로 많이 불렸던 운동가요로는 70년대 초반 이후 꾸준히 ‘민중가수’로서 활동해온 김민기의 노래들이 있다. 70년대초에 발표되었던 ‘친구’ ‘아침이슬’ 등 지식인적 자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던 노래들이 이때에 수용자들의 적극적인 재해석으로 새롭게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받으면서 불렀다. 그는 또한 이전의 포크계열의 노래들과는 다른 민요적 감수성을 지닌 노래들을 만드는데, 이는 그가 제3자적인 관조의 태도로부터 민중적 삶을 지향하게 되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반영한다. 변화가 비록 한계를 가진 것이라 하더라도, 음악에 대한 그의 匠人정신과 기량, 민요적 어법의 창조적 계승들은 이후의 노래운동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당시 학내에 만들어졌던 노래동호인 서클들(77년 서울대 ‘메아리’, 78년 이화여대 ‘한소리’)은 김민기의 절대적인 영향하에 있었다. 하지만 80년 봄을 겪으면서 비로소 그 한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노래운동 집단으로서 변신하게 된다.

80년 봄은 유신체제의 붕괴와 함께 활성화도니 집회 · 시위 · 농성으로 인하여 70년대 후반까지 운동권 가요들이 대학내 대중들에게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중화되었던 학생운동은 80년 5월을 겪은 후 이전의 도덕적이고 양심적이던 자생적 투쟁의 한계를 인식하고 운동에 있어서의 과학적인 이론과 조직적 실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그들 개개인에 있어서는 엄청난 억압에 굴하지 않고 온몸을 던져 일어서야 한다는 결단과 용기를 요구하게 된다. 이렇듯 슬픔 · 고통 · 결단에 찬 정서는 80년대 초반의 비장감 넘치는 短調의 서정적인 행진곡풍에 나타나 있다.

이전의 밝고 명랑한 분위기의 구호적인 행진곡들과 달리 예컨대 ‘전진가’ ‘친구2’ ‘임을 위하나 행진곡’ 등의 노래들은 가사에 있어 죽음과 패배의 경험을 딛고 일어서 동료와 함께 당당하게 나아가는 힘찬 의지, 결연함을 보여준다. 음악적으로는 단음계적인 진행과 평이한 和聲진행, 좁은 폭의 선율진행, 그리고 곡의 종반쯤의 클라이막스를 특징으로 하여 話者의 내면적 감정이나 의지의 고양을 가져온다. 이러한 서정성은 단지 행진곡에서뿐만 아니라 80년대 대부분의 노래들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6월항쟁 이후 운동공간 확대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행진곡이 아닌 느리고 긴 가곡풍의 노래들이 운동가요계를 주도하게 된다(‘그날이 오면’ ‘솔아, 푸르른 솔아’ 등). 이 노래들은 이전의 강렬한 정서와 단순한 의미를 추구하는 노래들과 달리 복잡하나 정서와 의미를 띠게 된다. 이러한 정서와 의미는 보다 규모가 큰 악상, 선율진행의 자유로움, 음절 하나하나의 강조 등의 음악적 특성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긴 호흡의 노래들이 즐겨 불렸다는 것은 그간의 학생운동 역량의 축적과 사회운동 특히 87년 6월 항쟁 이후 운동의 대중화와 함께 얻은 승리감, 운동공간의 확대와도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특히 운동공간의 확대와 관련하여, 84년부터 노래운동은 대학과 사회 사이의 벽을 허물게 된다. 80년을 대학에서 보낸 대학노래서클 초창기 성원들은 졸업ㅈ후에도 노래활동을 지속하게 된다. 작품을 창작 · 보급 · 공연하는 연행단체와 비평이론작업을 하는 연구단체들을 발전시켰다. 단체들의 특성에 따라 운동대상들과 내용이 다르지만, 예컨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활동은 학생대중 · 직장인들을 비롯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한 삶을 바탕으로 한 민중적 정서와 민족적인 음악의 틀을 만들고 보급하는 일을 목표로 한다. 그들이 드러내는 전문적 기량의 부족, 음악적 언어의 새로운 창출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사회속에서 폭넓은 호응을 받고 있음은 사회 곳곳에 진정한 노래와 노래운동에 대한 욕구가 충만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욕구가 있는 현장마다 새로운 노래문화, 노래운동을 조직하게 될 것인바, 대중가수 정태춘이 사회변혁 운동가로 노래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겠다. 80년대말의 노래문화에 있어 두드러진 현상인 노동가요의 생산 · 유통은 바로 현장속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정서와 노동자들의 낙관적인 세계관을 담아내어 진보적인 노래문화를 만들고 있는듯 보인다.

 


주요 운동가요 목록

● 70년대 전반

‘선구자’ ‘해방가’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농민가’ ‘탄아 탄아’ ‘훌라송’

● 70년대 후반


‘진달래’ ‘늙은 군인의 노래’(이 노래는 방송금지된 곡이었으며, 80년 이후 이 노래속의 ‘군인’대신 부르는 사람에 따라 투사, 교사, 농민,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누나의 얼굴’ ‘아침이슬’ ‘친구’

● 80년 광주학생 이후 87년 6월 항쟁까지

‘임을 위하나 행진곡’ ‘선봉에 서서’ ‘타는 목마름으로’ ‘부활하는 산하’ ‘벗이여 해방이 온다’(김세진 · 이재호씨의 추모곡) ‘그날이 오면’

● 80년대 후반(89년 상반기)

‘노동조합가’ ‘딸들아 일어나라’ ‘잠들지 않는 남도’ ‘지리산’(빨치산 투쟁을 다룬 노래)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통일염원을 담은 노래)

 

노래운동의 변천을 보여주는 두 노래

‘정의가’

정의와 용기는 젊음의 생명

승리의 깃발은 높이 솟았다.

외쳐라 젊은이여 호국의 정기

민족을 이끌고 지켜온 용사


삼천만 겨레가 뒤를 잇는다.

아! 자유를 위하여 피흘린 이 땅

승리의 여명이 동처오른다.

● 70년대 초반 - 구호적인 기능요 성격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80년대 초반 - 서정적인 행진곡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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