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罪판결이 無罪증명”
  • 김상익 기자 ()
  • 승인 1989.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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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조영래 변호사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서울대생’이라는 것과 내란+예비+음모라는 산술을 엮어서 ‘사건’을 붙였으니 일반 국민들은 일단 ‘어마어마하게’ 놀랐을 수도 있겠으나. 실은 그 당시 박정희 권력이 갖게 됐던 ‘정권의 위기의식’이 그보다 더 절박했던 것이었음을 오늘에 와서 살피게 된다. 먼저 71년 11월이 얼마나 ‘못생긴 시대’였던가를 전후좌우로 일별해볼 필요가 있겠다.

 前-69년 3선개헌, 집권여당인 공화당 의원들의 항명파동. 70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김대중 후보와 혼전.

 後-72년 6 · 3선언과 남북대화, 10월유신과 ‘체육관 대통령 시대’의 개막.

 左-7O년 5월 김지하의 담시 5적사건. 70년 11월 13일 청계피복노동자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11년 8월 광주단지 소요사건. 71년 10월 교련반대 대학생 시위와 위수령 발동.

 右-71년 김종필 失權, 김형욱정보부장 해임, 길재호 등 공화당 4인방 몰락. 71년 8월 실미도 군인난동사건, 사법부 파동.

 이처럼 70년대초의 시대상황을 살펴보기만 해도 ‘앞뒤 가리지 못하고’‘우왕좌왕 좌우간에’ 무슨 일이든 벌여놓고 보아야 할 ‘막판 정국’의 긴박감을 호흡해 볼 수 있다. 더욱이 여기에 ‘대학생시위=사회혼란’으로 등장한 것이 위수령이었는데, 위수령만으로는 아무래도 권위가 서지 않는 듯하여 발동한 지 한달만에 화룡점정식으로 등장시킨 게 서울대생+내란+예비+음모=사건이라는 것이었다.

 趙英來, 李信範, 張琪均, 沈載權 등 4명이 화염병을 사용하는 등 격렬시위를 주도하여 정부를 전복한 뒤 각계대표를 중심으로 구성된 가칭 민주혁명위원회로 하여금 과도기를 수습하게 하고 새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내용의 이 사건은 무협지같은 혐의 자체의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시쳇말로 “고시를 패스한” 법학도가 내란예비음모로 구속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趙英來변호사의 입을 빌린다면 “도대체 나이 어린 대학생 4명이 무슨 수로 정부를 뒤집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 지금과 달리 당시 운동권 학생에겐 화염병의 성능이나 제조방법은 물론이고 그런 이름조차 생소했던 것 사실이었다.

 고시합격 뒤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던 趙변호사는 李信範씨가 연행된 뒤 잠시 피신해 있다가 제 발로 정보부를 찾아갔다. 정보부 밀실에서 ‘수사’라는 이름을 빌린 모진 고문이 열흘 남짓 계속되는 동안 따로따로 감금된 4명에게 “누구는 이렇게 말했는데 왜 안 부느냐”는 식의 ‘자백’이 강요됐다. 결국 그들의 각본대로 움직여주기로 했는데 고문을 견디기 어려웠지만 ‘법정에 서면 사실이 밝혀지겠지’하는 ‘순진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1심에서 검찰은 국가보안법 제1조위반(반국가단체 구성)과 형법상 내란예비음모 등 혐의로 이들 모두에 대해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했다. 이어서 ‘믿었던’ 재판부는 李 · 張 피고인에게는 징역 4년씩을, 趙 · 沈 피고인에게는 징역 3년씩을 선고했다. 다만 재판부는 “혁명위원회는…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 단체라 볼 수 없다”며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예비음모부분을 무죄로 판시했다. 이와관련 趙변호사는각본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애당초 국가보안법위반을 걸고 들어간 자체가 무리였다”면서 “그러나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가 ‘합법화’되기 위해선 국가보안법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2심에서 재판부는 형량을 대폭 낮춰 張 · 沈 피고인에게는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 李피고인에게는 징역 2년, 趙피고인에게는 징역 1년6월을 선고했고, 1972년12월27일 대법원 형사부가 항소심에서의 판결을 확정시킴으로써 이 사건은 종결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실상 2심에서 있었던 재판부의 갈등과정에서 마무리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金仁中주심판사가 ‘무죄판결문’을 썼지만 鄭起勝재판장이 찢어버렸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趙변호사는 당시를 회고했는데, 이미 사실로 밝혀진 바 있듯, 재판부가 ‘外風’에 못이겨 진실을 외면한 채 형량을 낮추는 데 ‘합의’를 봄으로써 스스로 권위를 실추시킨 것은 결국 有罪판결로 無罪를 증명한 셈이었다는 말.

 ‘못할 얘기지만’이라는 토를 달며 趙英來변호사는 “차라리 自由黨정권 때가 사법부의 독립이란 면에서는 나았다”고 털어놓는다. 김병로 대법원장 밑에서 법관들이 권력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하고자 노력한 점이 있었고 검사들도 소신껏 일하려 했던 편이었다는 것이다. 사법부는 朴정권 18년 동안 독재유지를 위한 볼모처럼 되었으며 특히 유신 때는 그것이 제도화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법관의 인간적 고뇌는 이해할 수 있으나, 책임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못 박는다. 법질서를 지킬 사명을 띠고 있는 한 차라리 법관 노릇을 그만둘 소신을 갖고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1964년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한 바 있는 趙변호사는 대학다니는 동안 줄곧 학생운동 주동자로 ‘찍힌’ 몸이었지만, 정작 “朴정권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된 것은 3선개헌과 全泰壹 분신사건을 본 뒤부터였다”고 털어놓는다.

 이 사건 뒤 그는 다시 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 수배돼 80년 1월까지 무려 6년 가까이 기관원들에게 쫓기며 숨어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따져 朴정권은 그를 우리 앞에 ‘人權변호사’로 다시 서게끔 하기 위해 담금질시켜 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동안 시국문제 변론을 많이 맡아 왔지만 앞으로 노동 · 민생 · 환경 등으로 영역을 확산시켜 억압구조 속에서 분출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민주적 요구를 대변 하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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