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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작은 죄 양심 불량은 큰 죄

[문화비평]

고지훈(서울대 강사 · 한국현대사) ㅣ 승인 2006.05.25(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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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지훈  
지난 5월20일, 상암구장에서 열린 프로축구(서울FC 대 광주상무)를 본 사람들은 관중석에 내걸린 해괴한 플래카드를 봤을 것이다.

‘축구장 오기 전에 근현대사부터 공부해라.’

서울까지 원정 온 광주상무의 서포터(이들의 명칭은 의미심장하게도 ‘1980’이란다)들이 걸어놓은 것이다. 공부라면 국·영·수 중심으로 하는 게 여러 모로 나을 텐데, 하필이면 ‘근현대사’일까 싶어서 이리저리 찾아보았다. 사연인즉슨 이랬다. 서울FC의 한 ‘개념 없는’ 팬이 경기를 앞두고 1980년 5월 광주를 연상시키는 발언을 축구 관련 게시판에 올렸단다. 그것도 5월18일에. ‘오는 5월20일, 다시 한번 광주진압군이 뜬다!’라고 말이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방문 팀의 연고지에 착안하여 패러디를 한 것이다. 게시판에 불이 난 것은 당연했고, 열 받은 ‘1980’이 급기야 운동장에 저런 플래카드를 내걸게 된 것이었다. 인터넷 한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이기는 해도, 이건 비극이다.

26년째를 맞는 소위 ‘광주 사태’(진압군 운운했던 애처럼 ‘개념 없는’ 사람들은 ‘뭐 아롱사태랑 비슷한 건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그저 ‘아득한 옛일’일 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젊은층에서 현대사에 대한 무관심은 일종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 언젠가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적어보라는 설문을 냈더니 한 학생이 이렇게 써냈다.

‘8·15, 6·25, 4·19, 5·16, 8·8’

딴건 알겠는데 8·8은 처음 보았다. 속으로 뜨끔(현대사 강사가 모르는 현대사의 중요 사건이라니!)하면서 그 학생에게 물어보았다.

“8·8이라꼬? 그기 머꼬?”했더니, “거 왜 있잖아요. 8·8 올림픽!”이란다.

하긴 88올림픽 겨우 몇 해 전에 출생한 그 학생으로서는 그럴만하다. 유신과 1980년 광주, 5공 청문회와 백담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88올림픽’이나 ‘80년 광주’는 단군신화의 웅녀나 조선시대의 무오사화와 별 다를 것이 없는, 그저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직도 ‘80년 광주’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 있는데도 말이다.

한데 이런 것도 글로벌하게 유행을 타는 모양이다. 영국의 철없는 ‘젊은 것들’도 우리와 비슷했는지, 홉스봄이란 한 늙은 역사학자는 자국 젊은이들의 ‘현대사에 대한 무지’ 때문에 늘그막에 고생깨나 했단다. 젊은 애들을 제대로 못 가르친, 자신을 포함한 역사학자들을 탓하면서 은퇴하고도 오랫동안 역사책 쓰시느라 말이다.

무지한 자들은 가르치면 되지만…

현대사에 대한 무지 혹은 어설픈 지식은 저 ‘개념 없는’ 축구팬의 경우처럼,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가슴을 후벼 파는 잔인한 ‘테러’(커터 칼 테러도 무섭지만, 펜을 사용한 테러도 이 못지 않다)로 돌변할 수도 있다. 무지가 저지르는 이 어이없는 테러를 막기 위해 교육이 필요한 법이다. 대체로 학생들은 순진해서 가르쳐주면 곧잘 깨우친다. 그래서 교육자들의 책임인 셈이다. 한데 골치 아픈 건 ‘알만한 나이’의 어른들이다. 이들이 저지르는 ‘테러’의 원인은 무지가 아니라 양심불량 혹은 기억상실증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배짱 좋은 짓은 못한다.

고통 받는 희생자가 아직도 존재함에도 하필이면 5월19일 필드에 나가신(26년 전이나 지금이나 ‘보스’로 군림하시니까 부킹 따위의 ‘적법 절차’는 안 밟았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나, 대추리에서 진행 중인 국가와 주민 사이의 충돌을 보면서 ‘26년 전 광주에서처럼 과잉 진압이 필요’하다고 일갈하는 어떤 꼴통 논객이나. 모두 배짱 한번 두둑들 하시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이 세치 혀와 7번 아이언을 휘두르며 저지르는 테러는 무지가 원인이 아니다. 양심의 문제다. 머리 나쁜 애들은 때려서라도 가르칠 자신이 있다. 한데 양심불량형들은 때려도 또 타일러도 잘 안 되더라. 교육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 골치 아픈 학생들을 퇴학시킬 수도 없고, 두고 보자니 선량한 다른 학생들 물들일 게 뻔하고. 골치가 아프다. 그것도 ‘무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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