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양 앓는 ‘공룡’ 농협 수술 안하면 ‘멸종’하나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6.05.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미 FTA 추진 등 농업 환경이 급변하는데도 거대 조직 농협은 개혁에 미온적이다. 이미 법으로 정해져 추진 중인 신용·경제 부문 분리에도 반대한다. 농협은 어떻게 될 것인가.
 
농업협동조합(농협)은 ‘섬’이다. ‘농협이 변해야 한국 농업이 산다’는 목소리가 드높지만 농협은 짐짓 못 들은 체하거나 귀담아듣지 않는 듯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판을 외면하고 내부 논리에 집착하며 안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자폐증’ 환자처럼 보인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그럴듯한 지적이지만 농협 개혁 작업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것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로 ‘농협 때리기’에 나선 이가 많다는 반박도 아주 틀리지는 않아 보인다.

농협은 가까이는 15년 전부터 멀게는 농협 설립 때(1961년)부터 안팎에서 개혁 요구를 받아왔다. 이제 더 이상 뿌리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국 농업 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농협 개혁에 대한 요구가 임계점을 넘어선 터라 농협이 더 이상 미적거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농협도 받아들이고 있다.

농업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만큼은 정부·학자·단체 사이에 별 차이가 없다. 농림부장관 자문기관으로 농협의 신용사업 부문과 경제사업 부문을 분리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는 농협 신·경분리위원회 공동대표인 김영철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정부가) 아무리 훌륭한 농정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농협이 변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했다. 한민수 한국농업경영중앙연합회 정책차장은 “농협이 1961년 설립 당시 강조되던 증산 위주의 사업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농협 개혁에 대한 염원이 큰 것과 달리 과거 개혁 작업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노무현 대통령까지 집권 초기 농협 개혁을 추진하다가 “대통령이 힘이 센지, 농협이 힘이 센지 모르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농협의 버티기는 유명하다. 농협중앙회 임직원 1만5천명과 회원조합 임직원 6만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자기네이익을 지키겠다고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개혁을 강제할 방안도 마땅치 않다. 농민 조합원 3백50만명이 직·간접 방식으로 선출한 대표들은 막강한 정치력을 갖고 있다. 또 농협은 자산 1백29조원의 국내 2위 ‘은행’이다. 여기다 화학·유통·금융 계열사 21개를 거느리고 있어 웬만한 재벌 뺨치는 경제력까지 보유하고 있다. 공룡이 된 것이다.

국내 2위 ‘은행’이자 생명보험 업계 4위

하지만 농협이 생존 기반으로 삼는 한국 농업이 뿌리째 흔들릴 만큼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주도하는 도하개발아젠다(DDA)로 인한 여파가 채 가시기 전에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었고 한·미 FTA마저 추진되고 있어 한국 농업은 개방이라는 격랑에 휘말려 표류하고 있다. 이처럼 환경이 크게 변하고 있는데도 농협이 변화를 거부하면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멸종한 공룡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국회는 농협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을 반영해 2004년12월 농협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부문을 쪼개는 농협 개혁안(신·경 분리)을 강제하는 농협법을 통과시켰다. 지난해 7월 발효된 개정 농협법의 부칙 12조는 농협 개혁의 핵심 쟁점인 신·경 분리를 추진하는 세부 일정과 절차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라 농협은 오는 6월30일까지 신·경 분리 방안을 담은 자체 개혁안을 농림부에 보고해야 한다.

농협중앙회는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에 신·경 분리 추진 방안에 관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은 지난 5월23일 연구 결과를 담은 보고서를 농협중앙회에 제출했다. 농협중앙회는 이 보고서에 기초해 내부 실무진 견해를 담은 최종 보고서를 농림부 산하 신·경분리위원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이명수 농림부 차관과 김영철 건국대 명예교수를 공동위원장으로 한 신·경분리위원회는 학계·연구기관·농민단체 출신 위원 15명으로 구성되었다. 농림부는 농협이 제출할 최종 보고서의 타당성과 실현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해 별도로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에게 ‘신·경 분리 세부 추진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맡겼고 황의식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에게는 ‘경제사업 활성화 방안’에 관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신·경분리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김동환 연구위원은 “농협이 제출할 최종 보고서를 기초로 협동조합의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은 한도 내에서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부문이 각자 독자 생존할 수 있는 방안을 올해 말까지 마련해 제출하겠다”라고 말했다. 황의식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농산물 산지 유통 구조까지 혁신적으로 바꿔 한국 농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방안과 그 과정에서 농협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담은 연구 보고서를 제출할 작정이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농협 신용사업 부문은 성장을 거듭했다. 농협 은행 부문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자산 1백29조원으로 국민은행에 이어 은행권 2위이고 영업점도 8백99개로 국민은행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지역(단위)조합 영업점까지 합치면 4천9백48개나 된다. 총여신 기준으로는 국민·우리은행에 이어 3위다. 또 공제 부문(보험)은 수입보험료 규모가 5조7천억원이나 되어 생명보험 업계 4위를 기록했다. 신용카드 부문은 가입자 기준(6백38만명)으로 5위(농협 BC카드는 1위에 올라 있다. 농협이 신한금융지주라는 강력한 경쟁자와 하나금융지주라는 ‘다크호스’를 제치고 LG카드를 인수하는 데 성공한다면 농협은 카드 시장 1위 업체로 뛰어오른다. 농협이 벤치마킹하고 있는 곳은 농업금융기관에서 출발해 금융그룹이 된 프랑스 크레디아그리콜. 농협은 이 그룹을 모델로 삼아 종합금융그룹으로 성장하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고 있다.

 
승승장구하는 신용사업 부문과 달리, 경제사업 부문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해마다 1천6백억원이 넘는 적자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해 적자 폭은 1천7백억원으로까지 커졌다. 농민단체는 한결같이 “농협중앙회가 경제사업을 활성화해 농민의 수익을 높이는 일은 등한시하고 신용사업이라는 돈벌이에만 골몰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달리 송종윤 농협중앙회 농업경제기획실 팀장은 “농협의 경제사업은 이윤 극대화보다는 회원조합에 대한 사업 지원이나 농민 실익을 높이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어 수익이 날 수 없는 구조다”라고 말했다. 황의식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농협 경제사업 부문의 매출 총이익률이 1.6%밖에 되지 않는다. 양곡 부문 지원이나 정책 사업처럼 부가가치가 높지 않은 사업에 국한되다 보니 수익이 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농협 간부 “신·경 분리는 한국 농업의 재앙”

농협중앙회는 “신·경 분리를 경제사업 활성화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라고 주장했다. 농협은 신·경 분리보다 농축산물 유통 구조를 혁신하겠다는 방침이다. 권역별(수도권·충청호남권·경북권·경남권)로 도매 사업소 네개를 신설해 지난 3월30일부터 주요 농산물을 통합 구매·공급하고 있다. 농협이 산지와 소비자 사이에서 단순히 중개하는 업무에 그치지 않고 산지에서 농산물을 매집해 자체 유통망으로 시장에 공급해 매출 이익률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황의식 연구위원은 “농협이 위험을 안고 사업을 전개하므로 수익률이 높아질 수 있다. 일단 도매 사업 강화는 방향을 맞게 잡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농협중앙회는 지금까지 ‘(신·경 분리는) 농업·농촌·농민의 장래와 직결되는 사안’ 정도로, 겉으로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반대 정서가 팽배해 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농협 간부는 “신·경 분리는 한국 농업에 재앙이 될 수 있는 무모한 짓이다. 농정 전문가라고 자처하며 이 작업을 추진하는 이들이 나중에 불상사가 일어났을 때 책임을 질 것인가”라고 말했다. 이영순 농협중앙회 노조정책실장은 “신·경 분리가 농협 개혁의 대안이 될 수 없고 추진 절차에도 하자가 있으므로 우리는 반대한다. 농협인이 반대하는 와중에 신·경 분리가 강제로 관철된다면 총파업을 포함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농협중앙회의 한 간부도 “신용사업 부문에서 번 돈으로 경제사업 부문을 지원하고 있다. 신·경이 한데 합쳐 있는 것이 경제사업 활성화라는 취지에 오히려 부합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농림부나 재정경제부는 “농협 사업의 양대 축인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부문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서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농림부는 무엇보다도 개정 농협법이 신·경 분리를 규정하고 있는 마당에 신·경 분리를 하느냐 마느냐 자체가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일축했다. 농림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법이 규정한 신·경 분리를 어떠한 절차와 방식으로 추진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할 상황이지 시행 여부를 왈가왈부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라고 말했다.

농협 개혁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신·경 분리 방안을 놓고 이미 오래 전부터 찬성하는 집단과 이에 반대하는 농협은 대치를 계속해왔다. 농협은 지금까지 개혁 요구를 물리쳐왔다. 하지만 외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며 의지를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가 전초전 성격을 띠었다면, 이번은 본게임의 양상이 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양측이 대격돌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 시간은 올해를 넘기지 않을 듯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