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는 ‘마법의 지팡이’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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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오풍·박풍 진앙지 노릇…언론, 조사 결과 침소봉대하기도

 
지난 5·31 지방선거는 전형적인 바람 선거였다. ‘강풍’으로 시작되어 ‘오풍’으로 바뀌었다가 ‘박풍’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그 바람을 일으킨 선풍기는 무엇이었을까? 정치권에서는 이번 지방선거를 ‘여론조사의 정치공학’이 극대화된 선거로 평가하고 있다. 여론조사가 ‘참고 자료’를 넘어서 ‘결정 자료’로 격상된 본격적인 선거라는 것이다. 

여론조사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은 새로운 여론조사 방식이 새로운 승자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급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 지지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 후보에 이쪽 후보를 하나씩 붙여보는 ‘시뮬레이션 방식’ 조사 덕분이었다. ‘반이회창, 비이인제 정서’에 힘입어 노무현 후보는 대안 후보로 부상할 수 있었다. 특히 광주 경선 전에 나온 여론조사 결과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뮬레이션 방식’의 승자라는 점에서 오풍은 노풍과 닮아 있다. 오세훈 후보 역시 ‘강금실 후보에게 대적하기 위해서는 맹형규 후보나 홍준표 후보로는 불안하다’는 정서를 바탕으로 반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 오풍은 진화된 여론조사 방식의 또 다른 덕을 보게 된다. 바로 ‘적극적 투표층’의 의사를 묻는 방식이다. ‘적극적 투표층’에서 오 후보가 강 후보를 이기는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가 후보 단일화 과정이나 당내 경선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노풍과 오풍은 닮아 있다. 여론조사가 이루어진 방식도 전반적으로 비슷했다. 노풍은 평일이 아닌 휴일에 조사함으로써 화이트칼라 계층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게 했다. 반면 오풍은 평일에 조사해 여성층에 인기가 좋은 오세훈 후보의 인기가 반영되게 하였다.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노무현 대 이회창’과 ‘정몽준 대 이회창’을 따로 물어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회창 후보에게 맞설 후보로 누가 더 적당한가’를 물어 ‘지지도’ 조사를 ‘선호도’ 조사로 바꾸었는데 오풍 역시 비슷하게  문항이 설계되어 유권자들의 ‘전략적 선택’을 이끌 수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2위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1위 후보를 추격할 때는 유권자의 표심이 몰리는 ‘언더독 효과’가 나타나고, 판세가 잡힌 이후에는 일종의 대세론이 굳어지는 ‘밴드웨건 효과’가 연쇄적으로 나타나는데, 노풍과 오풍은 여기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오풍은 특히 새로 도입된 ARS 여론조사의 덕을 더 보았다. TNS 정치사회조사본부 고태영 과장은 “미리 녹음된 질문에 응답하는 ARS 조사는 응답률이 현저히 낮은 편이다. 응답하는 사람들은 정치 관심층이 많다. 그래서 ARS 여론조사의 경우 정치 관심층의 여론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풍은 이 덕분에 탄력을 받았다”라고 분석했다.   

인기 끈 ARS 여론조사, 앞선 후보에 불리?

ARS 여론조사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지방선거 전 한국마케팅여론조사협회에서는 공식적으로 그 폐해를 지적했을 정도다. 협회는 ‘ARS 조사는 표본추출 과정을 지키지 않고 특정 사안에 관하여 특별한 관심이나 이해 관계를 갖고 있는 유권자의 응답만을 집계하는 경향이 있는 등 여론조사의 기본 원칙을 준수한 방법이 아니어서 객관성과 과학성이 결여된 조사 방법이다’라는 사실을 언론사 보도국장과 편집국장에게 공식 문서로 알렸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ARS 여론조사 결과는 전화 여론조사와 마찬가지로 널리 사용되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조사비용 때문이었다. 보통 전화 여론조사의 경우, 표본 1명당 8천원에서 1만원 내외의 비용이 들지만 ARS 여론조사의 경우 1천원 내외로 가능하다. 많은 언론사가 전화 여론조사보다 훨씬 저렴한 ARS 방식을 선택했고 이 조사 결과를 다른 언론사들도 큰 문제의식 없이 인용 보도했다.

인용보도 빈도에 있어서도 ARS 여론조사는 오히려 전화 여론조사를 압도했다. 이슈에 따른 여론의 수치 변화가 일반 여론조사보다 큰 폭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ARS 여론조사는 ‘국면 전환’과 ‘대세론’을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라는 평가다. 특히 보수 성향의 응답자들이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특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ARS 여론조사는 앞선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리 선거가 ‘네거티브 선거’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앞선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정서로 급부상하는 새로운 후보를 ARS 여론조사가 포착하고 이를 언론이 대서특필하면서 새로운 대세가 형성되곤 했다.

ARS 여론조사는 특히 정치권에 형성되는 반짝 장세를 반영하는 결과를 얻는데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박근혜 대표 피습 이후 지지율 반등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피습 사건의 경우, 코리아리서치가 전화 여론조사로 실시한 결과에는 박대표가 21.5%의 지지율을 기록해 21.1%의 고건 전 총리를 약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비슷한 시기에 ARS 여론조사로 실시한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박대표가 27.2%로 17.7%를 기록한 고 전 총리를 큰 폭으로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ARS 여론조사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은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던 홍준표 의원이다. 내내 앞서던 그는 1월9일 ‘더 피플’이 수행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맹형규 전 의원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자, 표본추출 방식과 문항 설계 등 조사 방식에 문제제기를 하고 재조사를 주장했다. 민주노동당도 더 피플의 울산 북구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역시 표본 추출 등의 문제를 들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여론조사 떴다방’까지 등장

물론 ARS 여론조사의 장점도 있다. 조사의 특성상 정치 관심층의 성향을 주로 반영하기 때문에 정치 관심층만 주로 투표하는, 투표율이 낮은 선거에서 적중률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문 ARS 여론조사 회사들은 투표율이 낮았던 지난 재보선에서 ARS 여론조사의 적중률이 높았던 것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고 있다.

ARS 여론조사 외에도 이번 선거에서는 다양한 여론조사 기법이 선보였다. 이번 선거에서는 특히 동일한 응답자를 계속 추적해 추이를 살피는 ‘패널조사’가 선보여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번에 실시된 패널조사는 응답자에게 패널 조사임을 밝히지 않고 실시한 점 등 몇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고전적인 의미의 패널조사로는 보기 어렵다고 평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정창교 수석전문위원은 “정치 여론조사와 관련해서는 우리의 수준이 세계적이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선거 여론조사의 최대 수혜자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꼽는다. 이전 선거에서는 선거 14일 전까지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되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6일 전부터로 금지 기간이 완화되었다. 대권 주자 여론조사의 경우, 선거 기간과 상관없지만 대부분 지방선거 여론조사에 덤으로 진행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전 선거법대로라면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박풍의 규모는 관측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여론조사 떴다방’도 등장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KBS 전주총국과 <‘전북도민일보’>가 한 대학연구소에 의뢰한 군산시장 선거 여론조사의 경우, 한 교수가 조사기관 명의를 사칭한 것으로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 경남지역에서도 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용된 여론조사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많았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후보 맞춤형 여론조사’가 시행되었다는 비난이 일었다.

선진국에서도 여론조사는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여론조사 공표 기간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나라에서 아직 논쟁 중이다. ‘적극적 투표층’의 의사를 어느 정도 예측에 반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지난 2004년 미국 대선의 경우, ‘적극적 투표층’의 성향에 대한 해석이 달라 방송사마다 예측이 엇갈렸다. 유럽 각국에서는 여론조사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여론조사위원회를 두어 여론조사의 쓰임에 대해서 규정을 두고 있기도 한데, 국내에서도 그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여론조사 결과를 침소봉대하는 언론의 과잉 해석도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여론조사는 특정 시점에서의 여론 흐름을 보는 것인데 과도하게 의미 부여를 한다는 것이다. TNS 고태영 과장은 “여론조사에 대해서라면 우리 언론은 ‘해석적 오버’가 심하다. 통계학적으로 무의미한 차이를 과잉 해석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차이를 말할 때도 최소한 ‘오차범위 안’이라는 표시 정도는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론조사의 영향력은 앞으로 어떨까? 더 커진다는 것이 정치권의 전망이다. 선거는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의 여론만 반영하지만 여론조사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까지 반영하므로 투표의 대안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갈수록 커지는 ‘여론조사의 힘’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에 대한 의문에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정창교 수석전문위원은 이런 답을 내놓았다  “민심은 언제나 옳다. 다만 정치인과 언론이 민심을 잘못 읽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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