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에서 한문까지, 못 말리는 ‘언어 탐험’
  • 장영희 전문기자 (view@sisapress.com)
  • 승인 2006.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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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들의 습관]

 
박병원 재정경제부 제1차관(54)에게는 ‘어(語)’자 붙은 것을 공부하는 습관이 있다. 원래 학창 시절 취미 생활로 시작한 외국어 독파하기는 이제 그의 오래된 습관이 되어버렸다. 무엇이든 궁금한 것을 즉각 해소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성향이 그를 외국어 탐독으로 이끌었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인 1970년대 칸초네가 크게 유행했는데, ‘카사 비안카’나 ‘라 노비아’를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노랫말 뜻을 모르니 느낌이 안 왔다. 이것이 그가 이탈리아어 정복에 나선 이유다. <어린 왕자>를 읽기 위해 프랑스어를 공부했고, 유럽의 박물관을 이해하려고 라틴어 사전을 끼고 살았던 적도 있다. 2000년 유럽개발은행(EBRD) 파견 근무를 마칠 때 그는 러시아어로 고별사를 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가 섭렵한 외국어는 영어는 물론이요,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등 줄잡아 열 개나 된다. 이 가운데 영어 외에는 실제로 써먹을 데가 없지만, 그는 단어 뜻을 알아가는 과정 그 자체에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외국어 삼매경이 공직 생활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도구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난해 1월부터는 한자로 된 문자언어, 한문 공부에 푹 빠졌다. 정확히는 선현들이 행서를 풀어서 점과 획을 줄여 흘려 쓴, 초서로 된 편지 읽기다. 박차관은 2004년 12월 한 상가에서 우연히 유홍준 문화재청 청장을 만나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의 표현을 빌리면 ‘고수끼리는 고수를 알아본’ 유청장이 한 모임으로 그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 모임이 ‘한국고간찰(古簡札)연구회’인데, 유청장이 공동 대표를 맡고 있었다. 박차관은 대학 시절 2년간 그것도 한문학과 금석학의 대가인 청명(靑溟) 임창순 선생에게 사사한 적이 있다.

고간찰연구회는 청명 선생이 초서로 쓰인 사료를 판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초서 간찰(편지)의 강독 및 연구를 위해 만든 모임이다. 1999년 발족되기 직전 청명 선생이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를 따르는 후학을 중심으로 꾸준히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열리고 있다. 이 모임이 ‘막일파초회’라는 애칭을 가지게 된 것은 마지막 일요일에 초서를 깬다(해독한다)라는 뜻에서 연유했다. 회원 대부분이 한문학, 중문학, 한국미술사 같은 생업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니, 경제부처 고위 공무원인 그는 상당히 이질적 회원인 셈甄?
하지만 열성만은 아무도 못 말린다.

스스로는 예·복습을 게을리 해 파초를 하는 데 늘 허덕이는 성적 부진 학생이라지만, 지난 1년6개월 동안 그는 이 모임에서 드문 축에 속하는 개근자다. 국가의 중요한 일이라면 모를까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오전 세 시간은 아예 어떤 일정도 들어오지 못하게 ‘블로킹’을 쳐놓았다.

고간찰을 파초할 때는 일체의 잡념이 생기지 않는다는 그에게 이 일의 의미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인쇄된 상태가 아닌 사람이 직접 쓴 글씨는 인간적이다. 사람의 냄새가 물씬하다. 정사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인사 청탁이나 뇌물 주는 내용의 편지를 보면 당시 삶의 실상을 그대로 보는 듯해 흥미진진하다. 시오노 나나미 저서에서 시저와 키케로가 주고받은 편지가 인용되는 것을 보면서 참 부러웠는데, 우리도 몇 백년 된 편지가 꽤 남아 있더라. 이런 편지를 접하면 역사가 살아 숨쉬는 듯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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