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부시 아버지의 방북 물꼬 터라”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6.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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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1994년 카터 방북 때와 비슷한 역할 요청…성공하면 남북한·미국 모두 ‘이득’

 
남북 양측이 3박4일 간의 진통 끝에 제12차 남북협력추진위원회(경협위) 합의문을 발표한 지난 6월6일, 중국 외교부가 최근 북·중 간에 맺은 중요한 합의 사실 하나를 공표했다. 북한과 중국이  ‘해상 국경지대에서 원유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으며 ‘앞으로 구체적인 개발 계획을 담은 합의문을 마련해 서명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지난해 12월24일 양측이 발표한 북한 남포 앞바다 원유 공동 개발 계획이 이제 구체적 시행단계로 접어들었음을 과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국내·외 언론 보도나 <시사저널>이 자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중국측은 이미 북한과의 원유 공동 개발을 위한 착수금으로 최소 5억 달러(홍콩 발 <연합뉴스>)에서 10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6월6일의 남북 경협위 합의문에서, 남측이 ‘겨우’ 8천만 달러 지원을 약속하면서 북한의 지하자원 개발과 열차 시험운행이라는 2중3중의 조건을 내건 것과 여러 모로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열차 시험운행과 관련해 과거와 같으면 울며 겨자 먹기로 시늉이라도 했을 북한이, 이번에는 약속 전날 과감히 취소 통보를 해오고 오히려 남측 당국에 책임이 있다고 목청을 돋우고 나선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환경 변화를 반영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북중 경협의 활성화로 인해 남쪽에 북과의 협상에서 누리던 독점적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6자회담·남북 정상회담은 부담되는 주제

6일의 남북 경협위 합의는 북중 경협과의 대비라는 점뿐 아니라, 수주일 앞으로 다가온 DJ 방북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미진한 결과를 낳았다. DJ 방북은 대북 경협 후발 주자인 중국에 추월당한 남쪽의 자존심을 회복할 ‘히든 카드’요 ‘비상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경협위 회의에서  ‘방북 전 열차 시험운행’재개에 실패함으로써 DJ 열차 방북이 무산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합의문 내용과 협상 대표단의 설명에 따르면 북한이 8월까지 열차 시험운행을 시행하는 등의 ‘조건을 조성’할 경우 남측은 8천만 달러에 이르는 경공업 원자재를 북에 제공하고 북은 지하자원을 남측에 제공하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열차 시험운행은 DJ 열차 방북 아니면 경의선의 정식 개통 등과 연동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이미 그런 연계 조건들이 물 건너간 상황에서 굳이 그것을 경협 조건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다. 8월 전에 북이 별다른 모멘트가 없는데 시험운행을 할지도 의문이고, 한다 해도 한 번의 깜짝 쇼를 위해 거액을 줘야 하느냐는 식의 여론의 역풍도 일어날 수 있다.  결론적으로는 남북 모두 이 합의를 지키기가 매우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즉 남북 경협위 합의문 중 가장 중요한 제1항의 합의 내용이 저절로 사문화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당장 문제는 이제 몇 주 앞으로 다가온 DJ 방북이다. 열차 방북도 무산됐고, 그렇다고 별도의 선물 꾸러미가 마련된 것도 아니다. 더구나 열차 시험운행 전격 취소라는 북측의 ‘무례’에 대한 해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미 DJ 스스로 이번 방북은 개인 자격이며, 따라서 특정 현안 보다는 김정일 위원장과 통일 문제 등 고차원적 대화를 나누겠다고 슬쩍 방향을 틀었지만, 방북 전 분위기로는 여러 모로 말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DJ가 방북을 포기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예측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어디까지나 현실 정치가인 DJ가 여건도 그렇고 성과도 보장이 안 되는데 모험을 감행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스스로 ‘개인 자격 방문’  등의 얘기를 통해 사전 정지 작업을 해왔고, 어쩌면 생애의 마지막 방북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1948년의 김구 선생과 같은 심경으로 방북을 단행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DJ가 이처럼 방북의 형식이나 조건에 구애하지 않고 모든 것을 비우고 무조건 가겠다고 하면  의외의 길이 열릴 수도 있다. 이 경우 몇몇 전문가는 DJ가 기존의 방북 성과로 거론돼온 북한 6자회담 복귀 문제나 남북 정상회담 문제 등 서로가 부담이 되는 주제말고, 제3의 대안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 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특별한 선물을 가져가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방북의 성과가 필요한 DJ의 상황 및 워싱턴과의 협상을 고려해 쉽사리 패를 꺼내놓을 수 없는 김위원장의 처지를 고려한 ‘제3의 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 몇몇 전문가가 제안하는 방법은 바로, DJ가 지난 94년 카터 전 대통령 방북 당시와 같은 역할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방식이다.  그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이었던 DJ가 북·미간 교착 상황을 풀기 위해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6월 카터 방북의 물꼬를 텄던 것과 같은 역할을 이번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니어 부시’ 방북하면 북·미 대화 재개?

더 구체적으로는 DJ가 이번 방북을 계기로 최근 워싱턴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시니어 부시(부시 현 대통령의 아버지 부시)’의 방북이나 힐 차관보의 방북 문제와 관련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고, 김위원장이 이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미국측 고위 인사의 방북을 환영한다는 의사를 미국측에 전해달라는 뜻을 밝히는 방식이다. 지난 94년과 같이 DJ가 북미 직접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담당하는 방안이라 할 수 있다.

 
상황적인 측면에서도 최근 상황은 지난 94년과 여러 모로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다.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당시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6자회담이 난관에 처한 상태에서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움직임에 대해 한·미 양국이 강도 높은 경고를 발하고 있는 최근 상황이나 뭔가 고단위의 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마침 최근 워싱턴에서는 북·미간 교착 국면을  풀기 위한 매머드 카드로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시니어 부시’의 방북 문제가 일각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또한 지난 5월 말 북한 외교부는  힐 차관보에 대한 초청 의사를 전격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두 사람의 방북 문제는 워싱턴 내에서 설왕설래만 오고 갈 뿐 아직 구체적인 동력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이유로 워싱턴 일각에서는 DJ가 이번 방북 길에 모종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따라서 DJ 혼자만의 힘으로 김위원장을 설득해 6자회담에 복귀시키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지난 94년처럼 북미 대화의 물꼬를 트게 하는 역할을 자임하는 것도 큰 그림에서 보면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이런 과정에서 북미 대화가 시작되고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면 DJ 방북의 의미도 되살아날 것이다. DJ와 한국 외교, 그리고 미국과 북한 3자가 모두 ‘해피’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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