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넘어선 꿈과 열정의 그라운드
  • 뒤셀도르프·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6.06.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승패는 둘째 문제, 월드컵은 그냥 즐거운 한바탕 축제이다. 독일 현지에서 채집한 ‘장외 월드컵’의 다양한 풍경들을 한데 모았다.

 
월드컵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다. 전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축제의 마당이다. 그 어떤 것도 월드컵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오늘날 월드컵에 대한 신념은 민족적·애국적·종교적·정치적 열정들이 점유하고 있던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월드컵, 그것은 그 이름만으로 심장을 뛰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렇다고 전쟁은 아니다.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벌일 필요는 없다.

전세계의 눈과 귀가 독일에 쏠렸다. 그러나 격전장 독일은 정작 차분하다. 의외다. 클린스만 감독이 이끄는 독일 대표팀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기대가 크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축구는 축구일 뿐’이라며 담담해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한국을 방문한 전직 축구 선수 폴커 기픈 씨(45)는 “한국처럼 멋지고 완벽한 월드컵을 독일에서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일이 준비한 것은 한국의 절반도 안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5월 말 한국을 방문한 토스텐 셰이퍼 씨(35)는 “월드컵 열기를 느끼려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이 아니라 서울 광화문으로 가는 편이 옳다. 새벽에 모든 시민이 뛰쳐나와 응원전을 펼칠 수 있는 열정이 독일에는 부족한 것 같다. 그렇게 할 독일인은 사실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 붉은악마가 길거리 응원 주도해주기 바라

독일에서 월드컵 열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뽑아든 카드는 2002년 월드컵 때 히트 상품이었던 ‘길거리 응원’이다. 독일은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열두 개 도시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해 분위기를 띄웠다. 월드컵 기간에 결승전을 포함해 총 여섯 경기가 열리는 수도 베를린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문 일대가 공식 거리 응원 장소로 지정되었다. 6월13일 한국-토고전이 열린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도심에 있는 마인 강 한가운데 전광판을 설치해 거리 응원장을 만들었다.

프랑크푸르트 시측은 한국의 붉은악마가 길거리 응원을 주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재독 동포들은 응원단 ‘붉은 호랑이’를 출범해 응원에 나섰다.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할아버지·할머니가 어우러진 꼭짓점 댄스다. 여기에 북한 만수대예술단이 합류해 남북이 하나 되는 응원전을 펼친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쾰른에 유학하고 있는 남경국씨는 “독일 사람들이 월드컵을 바라보는 것은 평소 감정 그대로인 것 같다. 3부 리그 경기나 월드컵이나 특별한 차이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좀처럼 냉정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던 독일 사람들도 월드컵이 개막되자 집집마다 국기를 내걸었다. 스페인·이탈리아 등 독일 내 외국인들이 열성적으로 깃발을 흔들고 있다. 또 국기를 차에 매달고 달리기 시작했다.

월드컵을 흥겨운 파티로 생각하는 브라질은 언제 어디에서든 월드컵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았다. 우승컵은 그 다음 문제였다. 브라질의 훈련 캠프가 마련된 곳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30분가량 걸리는 작은 산골 쾨니그스타이너.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브라질 국기를 내걸었고, 동네 아이들은 브라질 팀 셔츠를 입었다. 마을 광장에서는 브라질 축제가 열려 삼바 리듬이 끊이지 않았다. 마을에서 만난 슈나이더 씨(50)는 “브라질이 독일의 가장 강력한 상대이지만 우리 마을에서 연습하는 것이 너무 기분 좋다. 마을 전체가 친절한 브라질 팀에 반했다”라고 말했다. 

결전의 날이 다가오자, 악마와 결전을 벌이는 자신들의 천사를 생생하게 지켜보기 위해 순례를 떠난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브라질 팀에 수호신 같은 존재다. 브라질 팀이 가는 곳에서는 언제나 광적인 팬들을 만날 수 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온 가르시아 루이스  씨(58)는 월드컵 때마다 열병에 걸린다. 브라질 대표팀이 스위스에 소집된 5월 말부터 이들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반기는 사람도 없다. 경찰들이 나서서 제지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브라질 대표팀에서 자신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루이스 씨는 “이번 대표팀에 스타는 많지만 그렇다고 팀이 강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승하겠지만 걱정이 되어서 집에 있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루이스 씨는 자신의 방식으로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1994년 미국월드컵 등 네 번의 월드컵을 치렀다. “왜 가족과 함께 오지 않았느냐”라고 묻자 그는 “비용이 너무 비싼 데다 식구가 나처럼 월드컵에 미쳐 있으면 가정이 유지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온 기아 소 마르틴스 씨(55)도 이번이 네 번째 월드컵 순례다. 식당 주방장으로 일하는 그는 브라질 팀의 티셔츠 하나만 입고 독일로 날아왔다. 직장에는 40일 휴가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고 한다. 그는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브라질이 우승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냥 경기를 보러 월드컵에 가는 길이 즐겁다. 4년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다”라고 말했다.

웃음 그치지 않는 브라질·일본 팀 캠프

기아 소 마르틴스와 대표팀 캠프에서 만나 동행하고 있다는 히카르도 씨(33)는 “유럽에 오는 것이 쉽지 않다. 월드컵에 오기 위해 4년 동안 내내 열심히 일해 월드컵 여행 경비를 마련했다. 월드컵을 안 보면 병이 나니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히카르도 씨는 “경비가 철저해서 선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이들 중 세 명은 5월 말에 스위스 캠프에 합류했다가 독일에 왔다. 앞으로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대표팀을 따라다닐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정작 월드컵 티켓이 없다. 티켓은 마음에 있다고 했다. 그래도 월드컵은 보아야 한다고 했다.

브라질 훈련장에는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훈련은 그야말로 공놀이였다. 게임에서 이기거나 골을 넣으면 계속 공을 찰 수 있다. 빼앗기면 술래였다. 교체되거나 윗몸일으키기 벌칙을 서야 했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애인의 가슴에 안기듯 부드러운 태클을 했다. 호비뉴는 뒷목과 발뒤꿈치로 공을 어루만졌다. 골키퍼 디다는 공을 등에 올렸다가 다리로 잡았다가를 반복했다. 크로스바 맞히기를 했는데 호나우지뉴가 세 번 연속 맞혔다. 주니뉴는 왼쪽 구석 한자리에 다섯 번 연속으로 프리킥을 꽂았다.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았다.

5백명이 넘는 기자들은 선수들의 플레이에 즐거워했다. 브라질 스포츠TV는 1백80명의 취재진을 꾸려 독일로 보냈다. 스포츠TV 루시아나 기자는 “브라질 언론은 연일 월드컵 특집판을 발행하고 있다. 호나우지뉴, 호나우두, 카카, 아드리아누 등 스타 선수의 인터뷰가 매일 쏟아져 팬들이 즐거워한다”라고 말했다. 브라질 캠프에서는 모두가 흥겹게 축제를 즐겼다.

스위스 인근 방겐에 베이스 캠프를 차린 토고는 브라질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고 있다. 훈련장은 언제나 방겐 시민들이 토고 국기를 흔들며 구름 관중을 모으고 있다. 훈련장에서 선수들은 아프리카 토속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공을 차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시민들은 특히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토고 축구협회 한 관계자는 “월드컵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특히 방겐 지역 시민들의 성원에 선수들이 힘을 내고 있다. 선수들은 호나우두처럼 사인 공세에 시달린다”라고 말했다.
베토벤의 고향 본에 자리를 잡은 일본. 최근 일본은 평가전에서 졸전을 치른 데다 팀의 기둥 나카타 히데토시와 나카무라 슈ㄴ스케가 말도 하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안 좋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걱정스러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트레이닝 캠프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 어린이들이 일본 국기를 흔들며 ‘야판’ ‘지코’를 연호했다. 일본에서 온 2백여 극성 팬이 선수들의 슛 하나하나에 환호성을 질렀다. 선수들도 손을 흔들어 팬의 성원에 답했다. 철저히 브라질 식이었다. 브라질 지도자들에게 축구를 즐기는 법을 배운 것 같았다. 보름 일정으로 독일에 왔다는 유키코 씨는 “선수들의 힘찬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된다. 어려운 조에 속한 만큼 이기지 못하더라도 일본 축구의 힘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지상 최대의 축제, 월드컵을 맞이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그러나 나라마다 제 방식으로 월드컵을 즐기고 있었다. 다만 우리 국민이 월드컵을 전쟁터로, 축구를 전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월드컵에 일곱 번이나 출전했지만 우리 선수들은 반바지를 입은 열한 명의 전사처럼 보인다. 매우 가난한 몇몇 국가에서만 축구가 전쟁으로 변해가고 있다.

한국 팀 훈련장은 경직된 분위기

한국 팀의 훈련장은 경직되어 있었다. 선수들은 머리를 숙이고 달렸다. 진지한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 즐겁지는 않았다. 한 시간 가까이 패스 연습을 했다. 경기가 코앞인데 패스 부분이 가장 필요한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선수들은 발이 무거웠다. 연방 헛발질을 해댔다. 크로스는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잡기에도 터무니없이 멀리 날아갔다.

월드컵을 즐기기에는 그동안 준비해놓은 것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한국 팀은 기술이 떨어진다. 전술과 체력으로 이를 보완해야 한다. 하지만 발을 맞춘 기간이 상대 팀에 비해 길지 않다. 지도자들은 공부를 안 했고 광고 촬영과 골프로 시간을 보냈다. 몸값이 높아진 선수들은 지도자들에게 대들고 운동을 안 했다. 협회와 기자들은 우리 실력을 알면서도 터무니없는 목표를 들먹였다. 그나마 새벽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붉은악마의 축구에 대한 열정이 한국 축구의 오늘을 만들어준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