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지각 흔 든 ‘준비된 괴물’의 기 습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6.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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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 축소로 분노와 불안에 휩싸인 영화계에 또 다른 ‘굉음’이 울렸다.거대한 몸짓으로 가아온 영화 <괴물>에 쏟아지는 관객과 평단의 기대는 대작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한가로운 한강. 돗자리에, 잔디밭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즐기는 시민 앞에 괴물이 등장한다. 한강에 출몰한 괴생물체는 삽시간에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한강에서 매점을 하는 박씨네 귀한 딸을 앗아간다. 괴물이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당국의 발표에 한강은 출입 금지 구역이 된다. 괴물과 접촉한 박강두(송강호) 역시 불가촉 대상이 되어 격리된다. 

  하지만 괴물에 먹힌 딸은 휴대전화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려오고, 한강 어딘가에 붙들려 있을 딸을 위해 박씨네는 당국의 감시를 틈타 괴물을 찾아 나선다. 박씨 가족이 싸우는 대상은 괴물뿐 아니다. 혹시 사회 구성원들을 돌보는 임무를 방기한 국가 혹은 시스템이 오히려 더 큰 괴물이 아닐까, 감독은 그렇게 묻는다. 감독이 그러거나 말거나 박씨네는 오로지 ‘새끼’를 살리고, 먹이는 데 골몰할 뿐이다.
 

  지난 7월4일 강남 메가박스의 <괴물> 시사회장. 영화가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시사회장은 장사진이었다. 20분 전. 줄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표가 동이 난 것이다. 영화사 직원들은 영화관 다섯 개를 빌리고도 밀려든 인파를 감당하지 못해 쩔쩔맸다. 표를 구하지 못한 기자들은 서서라도 보겠다며 아우성이었다.  

  덩지 큰 대작 영화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이미 관행이 되었다. 하지만 시사가 끝난 뒤 반응은 관행을 훌쩍 벗어나 있었다. 개봉은 7월27일. 언론은 기사를 써야 할 타이밍을 재지 않고, 상찬 일색인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예비 관객들은 궁금증에 몸달아하고, 영화사는 극장 100여 곳과 주요 인터넷 예매 사이트를 통해 예매를 시작했다. 

  시기가 좋다. 그리고 시기가 좋지 않다. 지난 7월1일부터 한국 영화계에는 스크린쿼터 제도가 축소되어 시행 중이다. 의무 상영 일수가 종전 1백46일에서 73일로 줄어든 상태. 6월의 한국 영화 점유율은 34%까지 곤두박질친 마당이다. 할리우드 영화들이 두 달째 줄곧 1위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서 한국 영화는 기진맥진이다. 타석에 들어설 타자에게 각별한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봉준호 감독은 불편한 기색이다. 그는 “2003년 <살인의 추억>이 개봉될 때, 조폭 코미디 일색이라는 경고음들이 있었고, 마치 9회 말 구원투수가 등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트렌드나 시류와 상관없이 영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그런 맥락 속에 배치되어 불안하다는 하소연인 셈이다. 하지만 어쩌랴. 7월13일 개봉하는 강우석 감독의 야심작 <한반도>와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한국 영화의 경쟁력을 재확인하거나, 시장 환경의 엄혹함을 환기시키거나 하는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려 있다. 

  그렇다고 <괴물>에 대한 관심이 한국 영화 사수대로서 역할에만 쏠려 있는 것은 아니다. 데뷔작에서 기이한 감수성을 선보였던 그가, 그리고 두 번째 작품에서는 놀라운 연출력을 보였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까 하는 호기심도 부풀 대로 부풀어 있다. 그가 ‘괴물과 함께’ 돌아온다는 점 때문에 흥분은 더 고조된다. 한 네티즌의 반응을 보자. ‘괴:괴물 괴물 괴물 물:물속의 괴물 물속의 괴물, 혹은 괴:괴기 괴기 괴기, 물:물괴기 물괴기 물괴기. 보고 싶다.’    

한국 영화 새 아이콘으로 떠오른 봉준호 감독

  한국 영화계에서 봉준호 감독이 갖는 존재감은 고작 장편 두 편을 만든 연출자가 확보한 것치고는 믿기 어려운 수준이다. 지난해 말 영화 전문지 <씨네21>의 설문 조사에서 봉준호 감독은 영화과 학생들로부터 ‘2000년 이후 데뷔한 감독 가운데 가장 기대되는 감독’으로 뽑혔다. ‘시나리오 작법, 촬영 이해도, 미장센 구성력 등 기본기가 탄탄하고 작가적 집념이 완벽에 가깝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최고의 스타일, <살인의 추억>에서는 최고의 연출력.’ 

  돌아보면 참 기이한 일이다. 2000년에 나온 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지방에서는 아예 관객에게 선보일 기회조차 없었다. 서울에서도 실적이 시원치 않았다. 급작스레 배급 일정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변변히 알릴 기회를 갖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영화를 본 평단의 평가도 아리송했다. 당시 관계자는 “시장에서만 외면받은 게 아니다. ‘아주 좋다’는 소수의 평자들이 있었지만, 마뜩치 않다는 반응이 다수였다”라고 말했다. 단편 <지리멸렬>부터 크게 주목되었던 그에게 단번에, 충무로에 들어오자마자 예리함을 잃고 갈팡질팡했다는 딱지가 붙었다.  

 
  <플란다스의 개>는 관객과 만날 기회를 별반 얻지 못한 채 간판이 떨어졌다. 당시 영화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변은 6개월 뒤부터 일어났다. 해외 영화제로부터 수상 소식이 날아들었고, 알음알음 비디오로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부제를 ‘애완견 연쇄 실종 사건’으로 붙여도 좋을 <플란다스의 개>는, 내지르며 웃음을 호소하지 않건만 보는 이들은 키득대다 뒤집어지곤 했다. 후일 <살인의 추억>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배우 송강호도 그런 관객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기적은 <살인의 추억>과 함께 찾아왔다. 봉 감독이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답답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소주를 털어넣으며 작업했다는 <살인의 추억>은, 막상 뚜껑이 열리자 사람들을 들끓게 했다. 누구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공소 시효가 다가오는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자체에 새삼 분노했으며, 관계자들은 실화가 창작의 무궁한 보고가 될 수 있다는 것에 흥분했고, 혹자는 장르의 관습과 기묘하게 줄다리기하는 연출 노선에 환호했다. 공교롭게도 이런 반응은 (봉감독이 친하게 지내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취와 여러 모로 겹친다. 이런 반응이 맞물려 전국 관객 5백70만명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으로 재능 알려

  <살인의 추억>은 평단의 평가로 보든, 시장에서의 성과로 보든 봉준호 감독은 통쾌한 홈런을 날렸다. 물론 ‘범작은 아니지만, 걸작도 아니라는’ 유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항간에는 ‘기이한 모범생이 만든, 기이한 코미디’인 <플란다스의 개>의 감수성을 더 그리워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3년 동안 봉준호 감독은 숙원이었던 괴물 영화에 매달렸다. 마찬가지로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제작자는 흔쾌했으나 정작 돈을 대야 할 투자자들은 뜬금없어했다. 괴물? 봉준호가 왜? 용가리되는 거 아냐? 얼추 잡아도 90억원 이상이 투입될 영화가 국내에서 주요 투자자를 잡지 못한 것이다. 제작사는 돌파구를 외국에서 찾았다. 청어람은 일본에서 판권 가격으로 최소 3백20만 달러를 보장하고, 여기에 1백50만 달러 투자까지 받는 계약을 성사시킨다. 

 
  괴물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의 제안을 듣고 오케이 사인을 낸 청어람 최용배 대표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봉준호 감독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에만 말을 뱉고, 일단 말을 했으면 꼭 지키는 스타일이다. 그걸 믿었다.” 

  최대표가 봉감독과 처음 작품 얘기를 나눈 때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이후이다. 줄곧 지켜봐왔던 최대표는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이미 드러난 송곳이었다. 데뷔작의 흥행 실적과 상관없이 그가 얘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훨씬 덩지가 크고 선이 굵은 두 번째 작품 <살인의 추억>을 먼저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최대표는 ‘다음 작품은 나와 함께’를 주문하고 작품 개발에 들어갔다. 마침 <살인의 추억>은 배우 송강호씨의 스케줄을 기다리느라 초기에 여유가 있었다. 봉감독과 최대표는 다시 만났다. 그때 최 대표는 영화 <괴물>의 구상을 처음 들었다. 구상이랄 것도 없었다. “봉감독이 네스 호의 네씨 사진을 쑥 내밀었다. ‘한강에서 이런 게 나오는 거예요.’ 그뿐이었다.” 최대표는 그 제안에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그 후 <살인의 추억>이 터졌다. 덕분에 대작을 연달아 연출해야 하는 버거운 환경에 내몰렸다. 최근 봉감독은 자신을 ‘과열된 엔진’과 같은 상태라고 표현하기에 이른다. 본인이 싫어하는 별명이지만, 봉감독은 ‘봉테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각 분야의 스태프들이 있는데도, 그들보다 더 꼼꼼하게 일을 챙긴다고 해서 얻은 별명이다. 그의 프리 프러덕션은 꼼꼼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심지어 콘티까지 본인이 직접 그린다(그는 대학 재학 시절 교지에 4단 만화를 그린 ‘만화 작가’ 출신이다). 그 콘티 북을 완성된 영화와 비교해 보면, 달라진 구석이 별로 없다고 한다. 구상 단계부터 편집까지, 거의 그의 머릿 속에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괴물>처럼 용량이 큰 영화를 그리하다보니, 점점 머릿 속이 가속 페달을 밟아댄 엔진처럼 달아오를 수 밖에. 

대중 향해 벌이는 감독의 치밀한 게임?

  그가 내놓은 <괴물>은, 전작들과 조금씩 닮아 있다. 우선 범인 검거보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던 1980년대를 탓했던 <살인의 추억>을 환기시키는 대목이 많다. <괴물>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공적 시스템의 부재를, 허술하고 힘이 부치는 개인들이 머리 깨지며 메워가는 모양새를 그려낸 것이다. 주인공들은, 그런 괴물이 출현하도록 방치한 당국과 시스템을 탓하기보다는 부질없는 자책과 자기 반성에 더 가슴을 쥐어 뜯는다. 박씨네 잘난 둘째 아들(박해일)은 “엉뚱한 애 손을 잡고 뛰었다며? 이 빙신아”를 외치며 형을 돌려차고 “이 상황에서 잠이 오느냐”며 또  걷어찬다. 

  하지만 감성은 스릴러 영화의 관습을 많이 빌려 썼던 <살인의 추억>보다는, 도무지 어느 계열의 영화인지 소속을 가늠할 길 없어 당혹감을 안겨주었던 <플란다스의 개>의 삐죽삐죽한 유머를 환기시키는 대목이 많다. 스케일이 커진 만큼, 밀착감은 떨어지지만 오히려 매끈하지 않아 더 반갑다. 

  미군의 독극물 방류 때문에 한강에 돌연변이가 생겼다며 괴물이 출현한 배경을 보여주는 영화의 초반부는, 단순하다 못해 ‘뻔뻔하다.’ 괴물 때문에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미국 측의 발표와 바이러스를 박멸하기 위해 ‘에이전트 오렌지’를 공수해오고 이것을 한강변에 쏟아붓는 모습은, 월남전과 이라크전을 한꺼번에 묶어 비아냥 거릴 수 있는 좋은 수이다. 

  <괴물>은 애써 해낸 것만큼,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의 리스트도 빼곡하다. 왜 감독은 <괴물>의 괴물에 대해 약점 탐구를 하지 않았을까. 약점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용해 괴물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여주면 정말 신이 났을 터인데. 봉 감독은 시원한 카타르시스 대신 턱없이 지리멸렬하거나 갑자기 용감해진 소시민의 분투를 묘사하는 데 골몰한다. 그것은 장르 영화의 관습을 비껴가려는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기보다는, 하고픈 말에 집중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영화 곳곳에 논쟁거리들도 빼곡하다. 말할거리와 볼거리를 솜씨 좋게 섞어놓은 모양새는, 흡사 대중을 향해 게임을 걸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혹자는 한반도의 직설 화법과 비교해 <괴물>이 은유로 가득 차 있다고 하지만, 이 영화가 설파하는 메시지의 밀도는 결코 얕지 않다. ‘<괴물>은 메시지가 너무 많은, 경향 문학’이라는 말에 봉감독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쾌락이 보장된 경향 문학이라면,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적어도 한국 영화계가 이렇게 귀엽고, 뻔뻔한 대작 영화를 가져본 적은 없는 듯하다.  7월27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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