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보다 더 무서운 인간 내면의 어둠
  •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06.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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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 <매드니스>
 

어느 여름날, 미시령 근방에 있는 콘도미니엄으로 여행을 갔다. 떠날 때부터 비가 오락가락했고,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차도 인적도 드문 고갯길에 접어들자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앞에 가는 차의 비상등이 번쩍거리는가 싶더니, 곧 안개 말고는 보이지 않았다. 안개등을 켜고도 겨우 앞에 놓인 도로만 보이는 정도였다. 안개 속에 완전히 갇혀 버린 느낌,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미로 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려도 바로 앞의 나무 정도가 보였다. 이 안개를 벗어나면, 캐슬 록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순간 떠오른 영화가 공포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의 소설을 각색한 존 카펜터의 <매드니스>(In the Mouth of Madness, 1995) 였다.

영화<매드니스>에서 안개가 자욱한 길을 차로 달리고 있으면,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는 남자가 보인다. 멀리 자전거가 뒤처지고, 다시 한참을 달리면 또 자전거가 보인다. 이건 현실일까, 꿈일까? 아니면 꿈과 현실이 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면, 스티븐 킹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장소 ‘캐슬 록’이 나타난다. 유년의 공포와 소도시의 악몽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스티븐 킹의 근원 혹은 고향 같은 곳. 그 곳은 스티븐 킹의 소설 속 장소인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어디에나 출몰하는 악령이나 괴물들의 발원지다.

스티븐 킹을 떠오르게 하는 작가 셔터 케인이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In the Mouth of Madness>의 원고만을 남겨놓고 사라진다. 출판사에서는 사립탐정 트렌트를 고용하여 케인의 행방을 찾는다. 머리를 식히려고 잠시 모습을 감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트렌트는 케인의 소설 여기저기에서 심상치 않은 단서를 발견한다. 트렌트는 케인을 찾아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마을인 ‘홉스의 끝’으로 향하고, 케인의 소설이 출간된 날부터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소설의 사건들이 그대로 일어나면서, 현실의 완강한 틀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매드니스>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익숙한 주제가 되었다. 꿈과 현실, 혹은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와 침범을 다루는 영화나 소설은 식상할 지경이다. 현실의 허약함이나 모호함 같은 건 이제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인식의 공유와 별개로 현실은 더욱 더 완강하고 위악적으로 변해간다는 점이다. 개인의 영역에서 마약이나 명상 혹은 금단의 지식으로 초월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집단의 영역은 더욱 더 철옹성이 되었다. 변화도, 개혁도, 혁명도, 이제는 다 지나간 허상이 된 건 아닐까? 그게 다 꿈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게 지독한 꿈일까?

공포영화를 보는 것은, 악몽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여전히 지독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외면하고픈 괴물들을 만나려는 것이다. 분명히 내 살을 베고 있고, 심장을 파헤치고 있음에도,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웨스 크레이븐은 <뉴 나이트메어> 에서 말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공포영화는, 아주 오래 전 태고적부터 내려온 이야기들이라고.

단지 외양만 바꾼 채로, 우리들 마음 속 어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래서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그냥 연쇄 살인마나 괴물이 아니라, H.P. 러브크래프트나 조지 로메로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이 세계 전체를 멸망시켜버릴 정도의 사악한 이형체(異形?)를 만나고 싶다고.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개를 헤치고 나가면 캐슬 록이 나오고, 아마도 그 너머에는 ‘시체들의 땅’이 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 곳에서는, 파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무엇인가가 창조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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