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께 태어나 20세기 초까지 살다간 벨기에 출신 삽화가이자 판화가인 롭스(1833~1898)와 노르웨이 태생의 대표적 표현주의 작가인 뭉크(1863~1944)의 2인전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이 두 작가의 작품 세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럽 화단의 한 측면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세기말 혹은 서구 모더니즘 미술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에 활동했던 이들의 작품(판화로 국한되어 있지만)이 왜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을까 궁금했다.
한국에서 서양화를 학습하기 시작하고, 이후 서양화가들이 집중적으로 배출되던 시기는 1920년대 중반을 지나 1930년대에 이른다. 물론 이들 대다수가 일본 유학 경험으로 서구 미술을 수용하고 이해했다. 당시 도쿄 유학생들은 동시간대 서구문예사조에 관해 상당히 정통했다. 일본은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곧바로 받아들였고 이는 고스란히 조선인유학생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들은 고갱과 세잔, 피카소와 뭉크의 화집을 보고 랭보와 보들레르의 시를 암송하는가 하면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여성=팜므파탈’ 이미지로 사회 풍자
롭스와 뭉크는 또한 당시 유럽 사회의 병적인 부분, 퇴폐적이고 암울한 분위기를 그림으로 드러낸 작가들이다. 이들은 서구 사회의 모더니티가 드리운 그늘에 대해 절망한 사람들이다. 서구 모던 사회가 번성해가는 한편 그 치부를 드러내던 시기를 살다 간 이들의 눈에 비친 사회상, 도시 풍경 그리고 현대인들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희생물이자 그 탐욕과 욕망의 노예로 여겨졌다.
이때 이들이 할 수 있는 이미지 작업은 다름 아닌 예리한 풍자로써 그 상처를 표출하는 한편 어둡고 암울한 내면의 상처를 이미지화하는 표현주의적·상징적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전자가 롭스라면 후자는 뭉크다. 그리고 이들이 처한 당시 상황과 1930년대 조선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일까? 근대기 우리 화가들이 이들의 그림에 공감하고 세기말 유럽의 미술들과 표현주의, 상징주의에 매료된 측면도 있다.
또 하나 롭스와 뭉크는 인물로써 자신들의 주제 의식을 전개했는데 그 인물이란 주로 여성이다. 그런데 이들이 파악하고 형상화한 여성 이미지는 대부분 어둡고 부정적이다.
그런데 왜 당시 남성 작가들은 여성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을까?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그에 따른 사회의 변모는 여성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아울러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진행된 여성의 성 상품화와 매춘 관련 산업의 번성은 남성들에게 성적 유혹과 그에 따른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남성 작가들에게 도시라는 개방된 공간에서 접하는 여성과 창녀들은 저항하기 힘든 유혹의 대상인 동시에 매독과 죽음을 안겨주는 무서운 존재이기도 했다(당시 유명 작가들의 상당수가 매독으로 죽었다). 이런 여성에 대한 세기말의 인식들이 중세 시대 악마·악녀의 이미지와 겹치면서 ‘팜므파탈’ 이미지가 나오게 된 것 같다.
롭스의 작품에는 당시 남성들이 지녔던 모순적인 여성상이 드러나 있다(사랑스러운 욕망의 대상이면서 두려운 존재). 반면 뭉크의 작품에서 여성 이미지는 롭스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회화만큼이나 뛰어난 그의 판화(석판화와 목판)는 그 자체로 놀라운 선의 매력과 형태의 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불행한 개인사와 정신 질환에 시달리면서 남녀 간의 사랑과 여성을 향한 애욕을 드러내고 있는 뭉크의 판화들은, 눈에 보이는 외부 세계를 묘사하는 대신 인간의 내면과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20세기 미술의 중요한 사명임을 알려주는 선구적인 작업들이다.
일제 강점기 치하의 미술인들은 당시의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파악했을까. 그들은 기형적이고 왜곡된 도시화 속에서 인간과 여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했을까. 롭스와 뭉크, 이 두 서구 작가의 전시에서 우리는 우리 근대 미술인들의 상상력의 바탕을 엿볼 수 있다. 덕수궁미술관에서 롭스와 뭉크의 그림이 전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