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괴물’이 영화 잡아먹네
  • 신기주 (프리미어 코리아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8.2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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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메이저 배급사, 극장·배급 수직 계열화…다양한 작품 나오기 힘들어

 
<괴물>을 제작한 최용배 대표는 원래 영화 감독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영화 인생은 감독으로 풀리지 않았다. 그는 극장 배급 담당자로서 경험을 쌓는다. 시네마서비스에서는 배급 이사로 일했다. 강우석 감독이 시네마서비스를 진두지휘하던 1999년에서 2001년 무렵 최용배 대표가 이끄는 배급팀은 국내 최강이었다. 라이벌이자 골리앗 대기업 영화사인 CJ엔터테인먼트 배급팀을 압도했다. 그 무렵 시네마서비스도 대한민국 1등 영화 투자 배급사였다.

그러나 최대표는 배급보다는 제작을 하고 싶었다. 그는 시네마서비스를 떠나 청어람이라는 영화사를 차렸다. 하지만 청어람에서도 최용배 대표는 배급을 포기하지 않았다. <효자동 이발사>나 <사과>를 제작하는 한편 김기덕 감독의 <빈집>을 배급했다. 그러나 최대표는 끝내 제작이냐 배급이냐의 기로에 선다. <괴물>은 1백60억원짜리였다. CJ엔터테인먼트나 쇼박스, 롯데시네마 같은 대기업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쇼박스와 손을 잡는다. 대신 <괴물>을 배급할 권리를 포기한다. 동시에 10년 가까이 몸담았던 배급 일을 접는다.

최용배 대표의 행보는 한국 영화 배급 시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요약해준다. 최대표는 이렇게 정의한다. “배급이 시장 전체의 변화를 주도하고 여러 편의 영화를 조율하는 일이라면, 제작은 영화 몇 편을 조율하는 것이고, 연출은 영화 한 편을 조율하는 것이다.” 배급은 표면적으로 영화 한 편을 어떤 극장에 몇 개 스크린에 걸지 결정하는 업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떤 영화를 만들지, 어떤 영화는 크게 키우고, 어떤 영화는 작게 갈지, 시장 전체를 조율하는 업무다. 한국 영화계가 지난 10년 동안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침내 배급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충무로 토착 자본 기업인 시네마서비스는 수년 동안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의 배급사였다. 충무로가 영화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시네마서비스는 3위 혹은 4위 배급사다. 시네마서비스 지분의 절반 가까이가 CJ엔터테인먼트의 소유다. 시네마서비스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가운데서도 미라맥스를 대안으로 삼고 있다. 미라맥스는 메이저가 아니다. 작지만 강한 회사다. 4년 만에 시네마서비스는 대한민국 1등 대신 작지만 강한 회사를 추구하게 됐다. 그건 오리온그룹을 모태로 한 쇼박스나 롯데시네마가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이미 예견됐던 일이었다. 최용배 대표가 배급을 중단하게 된 건 숙명이었다는 얘기다.

배급에 눈뜬 덕에 한국 영화 급성장

1990년대 초반 3천만명 선이었던 한국 영화 전체 관객은 2002년 무렵에는 연간 1억명을 돌파했다. 최용배 대표의 청어람처럼 중견 배급사들이 등장하게 된 건 시장이 커진 까닭이었다. 새로운 배급사들이 등장할 빈 공간이 있어 보였다. 그렇게 나타난 배급사들이 코리아픽쳐스와 쇼이스트, A-LINE, 코어스튜디오 그리고 청어람 같은 회사들이었다. 바야흐로 배급사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이 시기에 한국 영화는 다양성의 전성기를 경험했다. 코리아픽쳐스가 <친구>에, 쇼이스트가 <올드보이>에, 청어람이 <효자동 이발사>에 투자 배급했다.

하지만 이런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대기업 배급사들은 멀티플렉스의 주인이었다. 멀티플렉스가 차지하는 전국 극장 스크린의 숫자는 60%가 넘었다. 배급은 스크린을 가진 극장과의 협상이다. 스크린을 확보하려면 영화가 크거나 세야 한다. 하지만 스크린을 가진 극장과 배급사가 긴밀한 사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CJ엔터테인먼트와 CGV, 쇼박스와 메가박스는 한 식구였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태극기 휘날리며>나 <태풍>처럼 100억원이 넘는 영화를 계속 만들어내면서 물건 확보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결국 중견 배급사들도 무리를 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처럼 블록버스터에 투자했다. 물건이라도 크거나 세야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코리아픽쳐스가 투자한 <형사>와 <청연>은 모두 무너졌다. 쇼이스트 역시 예전 같지 않다. A-LINE은 사라졌다. 청어람마저 <괴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급 사업을 포기했다.

강한섭 서울예대 영화과 교수는 오랫동안 “한국 영화 시장이 독과점으로 가고 있다”라고 주장해왔다. 그는 말한다. 대기업들의 시장 독점은 영화 시장의 거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거품이 꺼지는 순간 한국 영화 시장은 무너질 것이다.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지금 반복되고 있는 독점 경쟁은 단 하나의 독점 괴물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지금까지 수년 동안 전개된 한국 영화 시장의 변화는 분명 독과점의 병증을 보이고 있다. 최용배 대표도 ‘문제는 대기업 배급사가 대규모 멀티플렉스까지 함께 소유하고 있는 수직 계열화’라고 지적한다. 이런 수직 계열화 문제는 몇 년 전부터 한국 영화계의 화두였다. 그러나 아무도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돈의 힘이 명분의 목소리를 덮었다. 중견 배급사들은 지금 멸종 직전이다.

한국 영화계, 시장 주도권 이미 잃어

<괴물>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괴물>이 스크린을 싹쓸이한 게 맞느냐 아니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논란은 결국 김기덕 감독으로 상징되는 저예산 영화와 블록버스터 영화의 대결 구도로 변질됐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 영화 시장이 지금 독과점으로 흐르고 있느냐’에 있다.

1천만 영화가 등장하면서 이런 염려는 증폭되고 있다. 지금 한국 영화 전체 관객은 1억5천만명에 달한다. 하지만 이 관객은 소수 영화에 편중돼 있다. 시장의 팽창은 곧 시장의 부실로 이어지고 있다. 시장의 실패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는 얘기다. 배급 시장이 독과점으로 변질되고, 메이저 배급사들이 극장과 배급의 수직 계열화를 통해 ‘크게 걸어서 크게 먹는’ 전략에 의존하면 시장은 실패하게 된다. 영화 시장에서 시장의 실패란 수지타산의 문제가 아니다. 천편일률적이고 창의적이지 못한 영화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할리우드가 10년 먼저 그 길을 앞서 걷고 있다.

지난 2003년과 2004년 한국 영화 시장은 꽤 다양한 영화들로 채워졌다. <올드보이>와 <장화, 홍련> 같은 영화부터 조폭 코미디까지 다채로웠다. 그건 창작자들이 애썼던 까닭도 있지만 배급의 활로가 다양해서였다. 그러나 2004년 말 <실미도>를 기점으로 시작된 1천만 시대는 영화 시장을 과열시키고 있다. 그 과열의 과정에서 중견 배급사들이 사라지고 독과점이 표면화됐다. 개봉 스크린 수의 균형이 무너졌고 개봉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1천만 영화보다 100만 영화나 20만 영화가 더 나오기 힘들어지고 있다.

지난 7월1일 스크린쿼터 축소가 현실화됐다. 1백46일이었던 스크린쿼터 일수는 73일로 줄었다. 스크린쿼터가 줄어들면 한국 영화의 다양성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 다양성의 위기는 시장의 실패에서 온다. 지금 한국 영화계는 이미 시장의 주도권을 잃었다. 배급의 영토를 대기업 자본에 넘겨줬기 때문이다. <그때 그 사람들>을 만든 MK픽쳐스는 홀로 배급에 도전하고 있다. 싸이더스FNH도 배급 사업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영화계는 창작의 영역으로 돌아가버렸다.

이제 시장 전체를 조율할 힘은 소수에게 넘겨졌다. 소수가 나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수가 실패할 확률이 높은 건 분명하다. 영화는 사람과 돈이 만드는 예술이다. 돈이 잘못 흐르면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좋은 영화가 나오지 않는다. 관객 1천만 시대를 맞은 한국 영화계는 또 다른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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