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회의론'이 고개 들고 있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09.0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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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다운 정치 못 편 채 ‘소걸음’…민주·열린우리당의 견제도 만만찮아

 
함께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키스도 하고 포옹도 하는 남자가 이것은 사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적인 만남이라고만 하면 여자는 어떤 기분일까. 조직도 만들고 명분도 내세우고 비전도 제시하고 기자들 불러서 기존 정치권을 비난하면서도 이것이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시민운동이라고 하는 고건 전 총리를 보는 기자들의 심정이 바로 그렇다.

지난 8월28일 있었던 ‘희망한국 국민연대 창립총회’에서도 고 전 총리는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이런 고 전 총리의 신중한 행보에 기자들은 조금씩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희망연대 창립총회 장을 찾은 한 일간지 기자는 “왜 계속 애피타이저(후식)만 나오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 메인 요리가 나오는 것인지. 기자들은 배가 고프다”라고 푸념했다.

고 전 총리는 왜 정치를 정치라고 부르기를 주저하는 것일까? 그 연원은 지난 5·31 지방선거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린우리당이 선거에 참패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그때, 고건 전 총리 진영에서는 ‘희망한국 국민연대(이하 희망연대)’의 출범을 예고했다. 이는 여권 표의 결집 효과를 가져와서 반짝 고건 장세가 형성되었다. 당시 피습 테러 이후 천정부지로 치솟던 박근혜 전 대표의 인기를 능가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고 전 총리는 곧바로 여권의 십자포화를 맞아야 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정치를 하는 비열한 정치인이라며 고 전 총리를 공격했다. 이런 비난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후 고 전 총리의 지지율은 점점 떨어졌다. 아직까지도 만년 3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때부터 고 전 총리 진영에서는 ‘정치 공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정치 혐오증이 극심한 상황에서 고 전 총리가 정치적 행보를 하면 ‘소탐대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 행보 읽히면서 인기 내리막

지방선거 이후 ‘오버 페이스’했다는 평가를 내린 고 전 총리 진영에서는 다시 주특기인 ‘소걸음 정치’로 되돌아왔다. 7월 말에서 8월 초로 예정되었던 희망연대의 창립총회는 늦춰지고 늦춰져서 8월28일에야 겨우 열렸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의 참여 여부를 놓고 다소 삐걱거리기는 했지만 창립총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창립총회 장에는 1백6명의 발기인을 비롯해 1천여 명의 참석자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정가에서는 고 전 총리에 대한 회의론이 솔솔 고개를 내밀고 있다. 희망연대의 닻을 올렸지만 고 전 총리를 둘러싼 정치 환경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세였던 민주당은 7·26 재·보선에서 조순형 의원을 당선시킨 후 고자세로 돌아섰다. 최근 민주당에서는 고 전 총리를 견제하기 위해 당무 감사를 벌였다. 민주당 관계자는 “일상적인 당무 감사라고 하지만 사실 고건 전 총리 쪽에 드러내놓고 줄을 댄 당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에서도 노골적인 ‘고건 깎아내리기’가 시작되었다. 지난 8월30일(미국 시각) 워싱턴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열린우리당 염동연 의원은 “고건씨는 에너지가 부족하다. 여권이 그를 옹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권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영입이 언급되면서 고건 전 총리의 희소가치 역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희망연대 발기인 중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견제에도 뚜렷한 반전의 계기가 없다는 점, 그리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쓸 수 없다는 점이 고 전 총리 진영의 딜레마다. 그러나 정치 전문가들은 ‘경제와 미래 포럼’에 이어 희망한국 국민연대 등 준정치 조직을 하나하나 일궈낸 것이 고 전 총리가 ‘오픈 프라이머리(국민 경선제)’에 참여했을 때 큰 힘이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희망연대 발기인에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이 참석한 것을 주목하고 있다. 정치 컨설턴트 정창교씨는 “정 전 장관의 참여는 고 전 총리의 대선 행보를 DJ가 양해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고 전 총리의 한 측근은 “정 전 장관의 참여로 DJ의 햇볕정책을 이어받는다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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