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문, 거짓말 그리고 몰락
  • 워싱턴·정문호 통신원 (eco@sisapress.com)
  • 승인 2006.10.2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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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10대 사환과 추태 벌인 ‘폴리 스캔들’로 중간선거 위태

 
미국 국회의사당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청소년 사환제’라는 것이 있다. 이 제도는 고등학교 2학년생(16세) 가운데 일정한 심사를 거쳐 선발한 후 하원에서 의원들의 심부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시행 역사가 2백년이 넘는다. 이들은 의원들에게 온 편지나 입법 자료를 전해주기도 하고, 출타 중인 의원의 전화를 받기도 한다. 한마디로 의원들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사환들이다. 자격 기준은 의원의 추천을 받은 자로 평균 성적이 4.0 만점에 3.0 이상이어야 하며, 선발된 뒤에는 의사당 부설 ‘사환학교’에 등록해야 한다. 의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지만 본업인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제도의 가장 큰 매력은 사환 인당 월 1천1백15달러의 두둑한 급여가 주어진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요인 때문에 해마다 사환 직에 응모하는 학생들이 줄을 잇지만 정작 선발 인원은 60여 명에 불과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공화당 소속 폴리 의원이 꽤 오랫동안 전·현직 사환 소년들에게 성적 내용이 담긴 e메일을 보낸 사실이 알려져 수사 당국의 조사를 받는 일이 발생했다. 게다가 폴리의 비리를 일찌감치 인지했던 동료 의원들조차 쉬쉬해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 정가가 벌집 쑤셔놓은 듯 어수선하다. 분노한 민심이 하늘을 찌를 듯 폭발하자 하원은 부랴부랴 윤리위원회를 소집해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하지만 이같은 성추문을 일찌감치 알고도 적시에 조처를 취하지 못한 데니스 해스텃 하원의장이 받은 정치적 타격은 매우 크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은 오는 11월7일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3분의 1을 물갈이하는 중간선거를 코앞에 두고 발생해 공화당은 자칫 다수당 고지를 잃을지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선거일까지 불과 보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성난 민심을 돌려놓지 못한다면 공화당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장악해온 하원은 물론이고 상원까지 야당인 민주당에 내줄 판국이다. 실제로 뉴욕 타임스를 포함해 유수한 언론들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내일 당장 선거가 치러질 경우 하원은 민주당이 장악할 것이 확실시된다. 또 상원의 경우 역전까지는 못 가도 공화당과의 의석수를 크게 좁힐 것으로 나타났다.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거칠 것 없이 국정을 이끌어왔던 배경에는 상하원 모두를 장악한 공화당이 있었다는 점에 비춰볼 때, 만일 민주당이 이번 선거를 통해 하원만 장악해도 부시의 국정 장악력은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9·11 테러’ 이후 안보 정국을 주도하며 의회 중간선거에서 짭짤한 재미를 본 공화당, 나아가 부시 행정부에 일대 타격을 안긴 장본인은 플로리다 주 출신으로 동성애자인 마크 폴리 전 공화당 의원(52)이다.
사건의 전말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ABC 방송은 지난 9월29일 폴리 전 의원이 지난 2004년 루이지애나 주 출신의 전직 사환에게 사진을 보내달라고 e메일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보도가 나가자 폴리 의원실은 문제의 사환이 추천서를 써달라기에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런데 이런 보도가 나가자마자 이번에는 또 다른 사환이 폴리에게서 받았다는 e메일을 공개했다. 거기엔 노골적인 성적 표현 등이 담겨 있었다. 결국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폴리는 사죄 성명과 함께 의원 직을 사임했다.

그런데 폴리의 의원 직 사퇴로 사건이 누그러지기는커녕 갈수록 확산되었다. 전현직 사환들이 하나 둘씩 나서 그의 성적 추태를 고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는 심지어 10년 전에 발생한 일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동료 의원들까지 가세해 폴리의 비리를 털어놓았다. 짐 콜베 의원은 사환들에 대한 폴리의 수상한 행동을 이미 5년 전 알아채고 사환 담당 책임자에게 알려준 적이 있다고 밝혔다. 또 존 심커스 의원은 지난해 폴리를 직접 만나 사환들에게 추잡한 e메일을 보내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폴리 전 의원과 사환들 사이에 오고 간 이런 추잡스러운 성적 메시지를 일부 의원들이나 의회 관계자들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심지어 폴리의 비서실장을 지낸 커크 포드햄조차 이미 3년 전에 해스텃 하원의장의 비서실장에게 폴리의 성적 비리를 알려주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해스텃 의장은 자신이 폴리의 비리를 인지한 시점은 ABC 방송의 폭로가 있고 난 뒤였다고 잡아뗐다. 하지만 톰 레이놀즈 공화당 의원은 이미 올해 초 폴리 의원의 문제를 해스텃 의장과 논의했다고 밝혀 이같은 변명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해스텃 의장은 이번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여론의 압력에 대해서도 그럴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또 포드햄으로부터 3년 전 폴리의 비리를 제보받은 스콧 파머 하원의장 비서실장도 그런 사실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한마디로 해스텃 의장과 그의 측근 모두가 한결같이 ‘난 관련 없다’라며 책임 회피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해스텃 하원의장을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의 윤리 의식이 실종된 것에 미국인들 대다수는 깊은 실망과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특히 공화당에 우호적이던 보수층마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급속히 이탈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재로서는 이들의 성난 민심은 불과 보름도 남지 않은 중간선거에서 표로 나타날 가능성이 확실해 보인다. USA 투데이와 갤럽이 이번 사건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민주당은 공화당보다 지지율에서 23%나 앞섰다.

이런 조사 결과는 ABC 방송과 워싱턴 포스트, 또 뉴욕 타임스와 CBS 방송이 각각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와도 비슷하다. 민주당은 전체 4백35석인 하원의 경우 15석만 더 얻으면 공화당으로부터 다수당 자리를 탈환하게 되며, 전체 100석인 상원도 6석만 더 얻으면 정국 주도권을 쥘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하는 일은 당연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특히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실정이 최대 이슈로 부각될 전망인 데다 폴리 전 의원의 성추문 비리까지 겹쳐 공화당이 지금처럼 상하 양원을 장악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는 것이 정치 분석가들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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