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고동’ 울리며 돌아온 DJ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6.10.30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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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 ‘햇볕 지 키기’ 혼신 행보…‘북핵 해법’ ‘정계 개편’에 영향력 행사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 10월9일 오후, ‘햇볕론자’인 열린우리당 A의원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 자체도 문제였지만, 이에 대한 여권 내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국정감사장에서 만난 한 운동권 출신 재선 의원은 “이제 우리도 포용만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라는 까칠한 반응을 보였고, 몇 시간 후 대응책을 논의하러 이 의원 방을 찾은 한 초선 의원 역시 “이제는 대북 제재 쪽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되물어왔다. 

이른바 ‘운동권’ 출신들이 이럴진대, 이날 저녁 소집된 원내 대표단 회의의 분위기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당내 보수파로 분류되는 의원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김한길 원내대표는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라면 다음날부터 언론을 장식할 여권의 반응은 ‘강경 대응’ 일색일 것이 뻔했다.

다급해진 A의원은 동교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떤 생각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상황을 전해 들은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부터 이런 답이 돌아왔다. “드디어 (햇볕 정책 지지자 가운데) 진짜와 가짜가 드러날 때가 되었다.”

짐짓 ‘강경 제재’ 쪽으로 치닫던 여권의 분위기는, 하지만 다음날부터 빠르게 ‘포용 정책 유지’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연일 ‘대북 봉쇄 반대, 평화적 해결만이 살 길’이라며 ‘이번 위기를 잘못 관리하면 한반도에 제2의 전쟁이 날 것’임을 강하게 경고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북한 핵실험이 실시된 날 인쇄되어 나온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은 북핵 위기에 대해 “미국이 대북 금융 제재(BDA 계좌 폐쇄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고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다음날은 노무현 대통령이 주관한 전직 대통령과의 청와대 오찬에 참석해 햇볕·포용 정책에 대한 공격은 부당하다는 견해를 분명히 했다.

10월11일 노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는 “햇볕 정책으로 긴장이 완화되었으면 되었지, 나빠진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포용 정책 수정을 말하느냐”라고 말했고, 같은 날 오후 전남대 강연에서도 노무현 대통령과 여권의 흔들림, 그리고 보수 세력의 대반격에 대한 DJ의 재반격이 이어졌다. 그는 “요새 해괴한 이론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만만한 것이 햇볕 정책인가?”라는 식의 좀처럼 쓰지 않는 직설 화법을 동원하는가 하면, “북한이 핵 개발을 한 것은 미국이 못 살게 굴고 살 길을 안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북한) 스스로 말하고 있다. 북의 핵실험은 (햇볕 정책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핵 정책이 실패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라면서 미국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DJ의 선도투에 힘입어 여권 내부의 햇볕 정책 지지자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 지도부에서는 김근태 의장이 ‘햇볕 정책·포용 정책 고수’를 강하게 치고 나왔고, 초·재선 의원급에서는 김현미·임종석 의원 등이 바삐 움직였다. 김현미 의원은 10월11일 “그래도 포용 정책만이 해답입니다”라는 개인 성명서를 가장 먼저 발표했고, 임종석 의원은 10월13일 ‘북핵 사태, 평화적 해결만이 살길이다’라는 열린우리당 77인의 성명을 이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20쪽 인터뷰 참조).

북핵 위기 일찌감치 예견한 듯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연일 햇볕 드라이브를 걸면서 한때 ‘포용 정책 수정’을 가시화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 민주당도 속속 방향을 틀었다.
심지어 강경 일색으로 치닫던 한나라당도 DJ의 ‘햇볕 드라이브’에는 흠칫하는 눈치였다. 호남에 간 한나라당 의원들 입에서 “DJ의 햇볕 정책과 노무현의 포용 정책은 다르다”라는 해괴한 이분법까지 나온 것이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호남 공들이기에 여념이 없던 한나라당 처지에서 보면 DJ와의 정면 대결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이처럼 북한 핵실험을 전후로 전개된 DJ의 공격적인 강연 정치, 인터뷰 정치는 노무현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 국제 여론에 이르기까지 나라 안팎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 정치학자는 “DJ가 나서지 않았다면 자칫 전쟁이 날 수도 있을 만큼 상황이 위태로웠다. 위기 국면에서 자기 중심을 확실히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에 DJ가 유감없이 보여주었다”라고 평가했다.

DJ 측근들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일찌감치 북핵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이 9월15일 창간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과의 특별 인터뷰에서 이례적으로 강하게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 우파, 북한에 대해 질책을 하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전작권 환수 문제는 미국이 한국의 얘기를 들어줘야 한다. 3년 동안 사고가 생기면 어떻게 하는가”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그때만 해도 ‘전쟁’이나 ‘북핵’이 ‘생뚱맞게’ 들려서 몇몇 언론에서는 “DJ가 왜 갑자기?”라며 의아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닷새 뒤인 9월20일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과 만난 자리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인터뷰한 것은 요즘의 정세가 걱정이 되어 결심을 하고 한 인터뷰였다”라고 말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겠다고 공개 선언한 날이 10월3일이니까 김 전 대통령은 그보다 몇 걸음 앞서 이미 한반도의 안보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DJ의 한 측근은 “외신 인터뷰를 제외한 최근의 정치 일정은 대부분 그즈음 결정된 것이다. 북한 문제가 잘 풀리지 않는 데 대해 끊임없이 걱정해온 김 전 대통령은 연말쯤 한반도에 위기가 오리라는 점을 직감하고 본인이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김 전 대통령이 유독 외신 인터뷰에 적극적인 데 대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로 살인적인 일정을 초인적인 의지로 소화해내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이 최근 행보를 통해 던진 화두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북핵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고, 다른 하나는 여권의 대통합이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DJ식 해법은 명료하다. “북핵 문제를 푸는 열쇠는 평화적 해결밖에 없다. 미국은 대북 금융 제재 등 봉쇄 정책을 철회하고, 북한은 핵을 폐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북·미 직접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분당 비극론’으로 열린우리당·민주당에 경종

북핵 문제는 김 전 대통령이 언제든지 나설 수 있다는 점에서 ‘예측 가능한’ 주제이지만, ‘여권 통합’ 문제는 다소 의외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새판 짜기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이 ‘통합’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현실 정치 개입으로 비치는 탓이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가장 경계해왔다.

하지만 그는 10월9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계기로 사실상 현실 정치에 한쪽 발을 담갔다. “열린우리당이든 민주당이든 비극은 결국 국민이 지원했던 당이 갈라서면서 시작됐다”라는 ‘분당 책임론’은 누가 보아도 “다시 통합해서 기존 지지층을 복원하라”는 지상 명령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한 여당 의원은 “정치 9단인 DJ가 후폭풍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통합의 메시지를 던진 것은 당장 북핵 위기를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도 민주평화 개혁 세력이 정권을 잡아야만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원려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이런 DJ의 메시지는 결국 정계 개편의 고리를 못 찾고 있던 반한나라당 진영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지역주의로의 복귀도 아니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단순 통합도 아닌, 이른바 햇볕 정책 지지자들의 대통합이라는 새로운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각 당의 발걸음도 부쩍 빨라졌다. 때마침 치러진 10·25 재·보선 결과가 구체적인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또다시 참패의 늪에 빠진 열린우리당은 김근태 의장의 ‘재창당 선언’을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정계 개편 논의에 돌입했다. 저마다 처한 위치와 이해 관계에 따라 재창당의 스펙트럼이 달리 나타나는데, 재건축에서부터 신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백가쟁명이다.

전남 해남·진도에서의 승리로 호남에서의 주가를 다시 한번 확인한 민주당은 그 여세를 몰아 민주당 중심의 통합을 앞세우고 있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먼저 탈당하라”거나 “제3 지대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만들자”는 식의 주장이 이를 대변한다.

 
여권의 대선 후보를 꿈꾸는 차기 주자군도 속속 ‘통합론’에 몸을 싣고 있다. 김근태·정동영 전·현직 의장이 각각 “민주당 지지층의 분열이 비극의 씨앗이라는 김 전 대통령의 지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 세력이 분열된 데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라고 말했고, 천정배 전 장관 역시 “조순형과 추미애, 나아가 한화갑 대표를 끌어안지 못한 것이 이 정권의 한계였다”라고 분열의 책임을 인정했다.

민주당에서는 한화갑 대표가 “햇볕 정책에 대한 찬반이 대선 정국의 구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고 말해 햇볕 정책 지지 세력이 뭉쳐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는가 하면, 지난 8월 미국에서 돌아온 추미애 전 의원은 “국민은 깨진 유리 조각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용광로에 뛰어들라고 한다”라는 이른바 ‘용광로론’을 앞세워 대통합에 기여할 뜻을 분명히 했다.

DJ의 ‘분당 비극론’이 그동안 갈피를 못 잡던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을 일단 ‘통합’ 쪽으로 정렬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남은 것은 김 전 대통령이 과연 통합의 구체적인 방식에까지도 입김을 미칠 것이냐이다. 범여권은 ‘통합’에는 동의하면서도 벌써부터 통합 방식을 놓고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궁극적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가느냐 아니면 헤어지느냐’라는 민감한 주제가 연결되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0월28일 고향인 전남 목포를 방문한 데 이어 11월2일에는 <김대중 도서관> 후원의 밤에 참석하는 등 외부 일정을 이어간다.

‘북핵 해법’과 ‘정계 개편’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들고,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라는 여야 정당을 움직여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자 하는’ DJ의 야망이 과연 어떤 결실을 맺을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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