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체제론, 국가연합론은 허상"
  • 정리 : 안철흥 기자 (ahn@sisapress.com)
  • 승인 2006.11.2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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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재단 이사장 안병직 교수의 백락청 교수 실명 비판 독점 공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70)가 지난봄 뉴라이트재단 대표를 맡으면서 ‘투사’를 자임했을 때, ‘사상 투쟁’의 첫 대상으로 지목한 곳이 <창작과비평>과 백낙청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이었다. 안교수는 5월 초 <시사저널>(제863호)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반도 통일은 어물어물 진행 중이다”라는 백교수의 말에 대해 “문학가의 감상이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안교수가 백교수를 타깃으로 삼은 이유는 그가 진보 학계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남북 문제와 통일론에 대한 시각차를 이슈화시키는 것이 이념 논쟁을 예각화하는 지름길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기본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 선진화와 통일 중에서 선진화가 배타적 국정 과제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 안교수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백교수는 최근 출간된 <창작과비평> 겨울호에서 “(6·15 공동선언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제 신인도가 그나마 유지되고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라고 응수했지만, 안교수의 선진화론에 대한 본격 비판은 아직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안병직 교수가 먼저 작심하고 ‘백낙청 실명 비판’에 나섰다. 그는 백교수의 분단체제론과 국가연합론을 조목조목 해부했다. ‘허구로서의 분단 체제’라는 제목을 단 2백자 원고지 1백50장 분량의 원고는 11월27일 발간되는 계간 <시대정신> 겨울호에 실릴 예정이다. 안교수의 원고를 미리 입수해서, 요약 소개한다.

백낙청 교수는 1953년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기본적으로 분단 체제에 의해 규정되는 시대로 파악하였다. 민족 모순·계급 모순·분단 모순 등의 다양한 결합체로서 분단 체제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경제 발전이나 민주화라는 국정 과제가 “분단 체제 극복이라는 민족사적이자 세계사적 과업”에 의하여 규정될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분단 체제 극복 운동으로부터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동력이 나왔고 앞으로도 나오리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제 발전이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했다거나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진행되었다거나 하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요인만으로 경제 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 경제 발전의 본질적인 요인은 값싼 양질의 노동력의 부존(賦存)과 수출 지향 공업화 정책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교수는 “분단 체제를 허물어가는 작업”으로부터 양질의 노동력이 양성될 것으로 기대하는데, 그 이론적 및 현실적 근거가 무엇인지 경제학 전공자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의 정치 혼란으로 경제성장률은 크게 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럼 백교수가) 분단 체제의 규정력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보자. 첫째, 분단 체제는 세계 체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도 사회적 모순의 가장 근원적인 규정력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기인하지 분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란 ‘자본주의’의 오기(誤記)일 것인데, 그의 말을 억지로 이해하자면, 한반도의 분단 체제는 세계 체제의 하위 체제이므로 세계 체제가 한반도에 대하여 “근원적인 규정력”을 행사한다는 말이 되겠다.

둘째, “적어도 분단이 고착된 1953년 이후 남한 민중의 구체적인 투쟁 내용이 이리저리 바뀌어왔다는 사실 자체는 분단 체제와 남북한 민중(및 이들과 연대하는 해외 동포와 외국인) 사이의 계속되는 싸움에서 ‘주요 모순의 주요 측면’상의 변화라고 보아서 안 될 이유가 없다”라는 문장인데, 필자로서는 정말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셋째,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들은 세계 체제의 모순이 분단 체제에 의해 매개되는 방식으로 ‘가장 주된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라는 문장인데, 이 문장은 문법에 맞지 않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세계 체제의 모순이 분단 체제에 의하여 매개되는 방식”은 과연 정식화될 수 있는가. 또 “세계 체제의 모순이 분단 체제에 의해 매개되는 방식으로 ‘가장 주된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가장 주된 규정력’을 발휘하는 모순이 분단 체제의 모순인가 그렇지 않으면 세계 체제의 모순인가.

(백교수의 설명과 달리) 한국은 자본주의 세계 시장에 포섭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나라의 민족적 역량을 기초로 선진 제국으로부터 기술·자본·제도 등의 성장 기동력을 흡수하여 경제 발전과 민주화에 성공하고, 북한은 국내로부터 성장 기동력이 제대로 형성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립 경제와 계획 경제를 고집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기아 상태에 빠진 것이다. 백교수가 말하는 분단 체제의 흔들림은 이러한 남북 현대사 전개의 결과이지, 분단 체제가 남북 현대사의 상이한 전개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년에 출간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을 보면 백교수의 인식에 그동안 큰 변화가 있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 첫째는 통일의 전망에 관한 것이요, 둘째는 통일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자연히 분단체제론의 내용상 변화를 가져왔다. “분단 체제의 ‘가장 주된 규정력”에 대한 인식의 수정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의 변화는 그가 진실로 그 나름으로 온몸을 바쳐 남북 관계를 직시하려는 혼신의 노력에서 나온 것으로서 현실에 매우 가까이 다가간 것이라 생각되며,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의 최근 저서에서 통일에 대한 낙관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며, 자칫 잘못하면 통일이 남북을 파국으로 빠트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장기적 과제로서 점진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경고까지 했다. 그는 “2000년 6월의 정상회담에서도 통일까지는 20∼30년, 아니 40∼50년이 걸릴 거라는 이야기가 오갔다고 전해집니다”라고 썼다. 만약 통일이 앞으로 한 세대 내지 두 세대의 앞의 일이라면 그동안 무엇 때문에 통일에 대하여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당혹스럽다. 20∼30년이면 연평균 실질 경제성장률이 6%만 되더라도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고도 남는 기간인데, 왜 진보 진영은 남북 문제를 가지고 국가를 온통 혼란 속으로 끌고 가는가.

백교수가 생각하는 통일이란 과연 어떠한 통일일까. 그의 말을 들어보면, 통일은 남북 민중의 “실질적 화해와 접근”하에 이루어지는 남북 정부 간의 국가연합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형태의 느슨한 통일이라면 남북 간에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백교수의 주장이다. 그런데 백교수의 통일론은 매우 중요한 논리적 허점을 가지고 있다. 남북 민중의 “실질적 화해와 접근”은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으며, 또 그러한 민중운동이 정말 남북 주민의 동의를 대신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백교수의 분단체제론과 통일 방안으로서의 국가연합론은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은 이미 경제 발전과 민주화에 성공하고 선진국으로의 진입을 목전에 바라보고 있는 나라이다. 이러한 나라를 분석하면서 과도기 사회에나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을 가지고 노력해본들 올바른 사회 분석이 될 턱이 없다. 백교수는 통일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10여 년이나 연구했으나, 결국 논증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백교수가 현실을 좀더 솔직하게 직시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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