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세계에 탐닉하고 사물과의 조우 속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탐색하는 그림들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유행하고 있다. 기계적인 그리기, 대중문화 이미지들과의 혼성,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영상 이미지들의 혼재, 장식적이면서 감각적인 화면 처리 등은 이 회화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런가 하면 그 위에 상상력과 판타지를 섞어서 자기만의 몽상적 영역을 구축한 작가들도 있다. 그들의 작품들은 다분히 권태로운 자기애와 자폐 성향의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구상화의 번성도 그와 궤를 같이 한다. 극사실적인 재현 혹은 재현을 둘러싼 놀이와 해체, 재구축 같은 그림 역시 동시대 미술의 주된 특성이다.
그래서 앤디 워홀과 르네 마그리트, 니키드 생팔 같은 작가들의 전시가 새삼스럽게 한국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연한 현상이기는 하지만, 분명 이 작가들이 한국에서 여전히 인기 작가이고 이들의 작품에 대한 기호가 커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르네 마그리트전>(12월20일~2007년 4월1일)이 열리고 있다. 외국 작가의 전시라면 기껏해야 피카소, 미로, 샤갈 혹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소품 정도가 늘상 전시되곤 하던 관행에 비추어봤을 때 르네 마그리트(1898~1967)라는 독특한 작가의 작품이 큰 규모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일임에 분명하다. 전시에는 유화 100여 점과 과슈·드로잉·사진 등 총 2백70여 점이 출품되었다. 작가 관련 영상 자료와 듀안 마이클이 찍은 마그리트의 흥미로운 사진까지 망라해서 마그리트 전시로서 그다지 손색이 없는 온전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마그리트는 스물여섯 살 때부터 이처럼 독특한 그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그의 그림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변함없는 하나의 세계, 오로지 그만의 세계였다. 당시의 미술 사조와 미술에 대한 보편적 이해의 틀에서 비껴간 개성적이고 새로운 구상화, 모든 재현을 해체한 그림, 미술에 대한 전복적 사유를 여전히 회화 속에서 전개해나간 작품, 마그리트의 그림이 바로 그러했다.
그의 존재와 작품이 새롭게 인식되고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1960년대는 바로 팝아트가 등장하던 시기다. 알다시피 마그리트의 그림은 모든 것이 밝고 명확하며 딱딱하고 메마르게 그려져 있다. 대상을 객관화시켜 보는 ‘건조한 시선’은 팝아트와 유사하다. 일상의 사물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환경에 놓는 방식 또한 비슷한 전략이다. 이를테면 그려진 대상 자체는 이상하지도 않고 별달리 기괴하지도 않아 보이지만 이것들이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배치될 때 예기치 못한 충격을 주며, 이 충격은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상으로 인해 더 강력해진다. 바로 이런 것이 팝아트 예술가들이 노리던 목표였다. 따라서 이미 그것을 성취했던 마그리트가 새삼 주목되었던 것이다. 팝적인 그림들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오늘날 그의 그림이 또다시 눈길을 끄는 것도 같은 이치다.
마그리트는 사물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그림을 통해 보여준 작가이다. 그는 ‘회화 그 자체를 창조의 산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유를 위한 투쟁의 장’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가장 포스트 모던한 작가이며, 구상과 추상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를 넘어선 화가이다. 그의 그림과 사유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마그리트가 지닌 의미와 동시대 미술에 끼친 그의 영향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는 “순수하고 친근한 태도로 우리를 낭떠러지 끄트머리까지 안내해서는 갑자기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사람”(다카시나 슈지)이다. 그러나 그 밑을 기꺼이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분명 놀라운 비전을 안겨주는 사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