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두 다 있는 ‘섬’
  • 윤용인(여행 웹진 노매드 대표) ()
  • 승인 2006.12.2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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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수린 군도, 원시 자연 그대로 간직…자동차·리조트 없이 텐트에서 생활
 
동화 작가 권정생 선생은 자신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산과 바다에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그들은 수세식 변소도 없고, 일류 패션 디자이너도 없고, 화장품도 없는데도 어째서 그토록 깨끗하고 아름다울까? 물 한 방울, 공기 한 줌도 그들은 더럽히지 않는다. 수천 만원씩 들여 음악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부처님께 찾아가 빌지 않아도, 예배당에 가서 헌금을 바치고 설교를 듣지 않아도 절대 죄짓지 않고 풍요롭게 산다.” 가만히 두면 제 스스로 완벽할 자연을 망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라며 만일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진다면 자연은 다시 회복할 것이라는, 다소 극단적 말도 덧붙인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결국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라는 데 우리는 상당 부분 동의한다.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도시인으로 살아감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본의 아니게 죄 하나를 더 저지르는지도 모른다.

환경을 주제로 하는 ‘에코 투어리즘’이 선진 여행의 주요 테마로 등장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인간은 파괴를 통해 개발에 힘을 쏟으면서, 개발 이전의 자연을 꿈꾸는 아이러니를 범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오염되었지만 잠시라도 떠날 곳은 순수함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 욕망의 선 한 줄을 에코 투어리즘이 붙들고 있다.

태국에는 ‘수린 군도’라는 섬이 있다.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원초적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곳이다. 그곳을 기어코 찾아내 여행지 소개라는 목적으로 알리는 여행 기자의 비애, 그 죄지음을 통렬하게 느끼게 만드는 그런 섬이다.

 
우리는 태국을 여행자의 천국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시사철 태양이 비추고, 단 한번도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자비로운 사람들이 있으며, 잘 보존된 전통 문화와 최고의 음식이 있다는 점이 그런 수식어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패키지 여행자들은 방콕을 거점으로 파타야나 푸껫으로 몰린다. 그 탓에 이미 그곳은 휴양지라기보다는 포화 상태에 다다른 관광타운이 되어버렸다. 수년전 쓰나미가 푸껫에서 일어났을 때, 그 비극의 현장에서 새어나온 또 다른 목소리는 인재(人災)라는 단어였다. 관광으로 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도시를 망치고 결국 자연의 질서를 파괴해 엄청난 재앙이 일어났다는 자성의 목소리였다.

틀린 말일까. 필자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 이유로 지금부터 소개할 ‘수린 군도’에 대해 직업적 비애감이라는 다소 과장된 표현을 쓴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어떠한 공해도 없는 청정 지역.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생채기가 나지 않은, 오랫동안 그 상태로 남겨두고 싶은 의무감마저 느끼게 하는 곳 수린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수린은 미얀마 국경 라농과 안다만 해의 씨밀란 군도 사이에 위치한 섬이다. 총 다섯 개의 섬과 두 개의 암초로 이루어진 작은 섬으로 11군데의 스노클링 포인트와 다섯 군데의 다이빙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산호와 열대어들의 천국이다.

태국 국립공원들 중에서도 가장 자연 친화적이고 아름다운 바다를 가지고 있는 이 안다만 해의 군도는 태국 공주의 엄명 덕분에 오늘까지 청정함을 지킬 수 있었다. 이곳을 방문한 태국 공주가 “수린은 자연 그대로 더 이상 손대지 말고 영원히 보존해나가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섬 안에는 리조트 단지나 편의 시설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또 1년 중 6개월 동안만 공개함으로써 더욱 자연 친화적인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 수린은 매년 11월15일 개장하여 이듬해 5월15일 문을 닫는다.

 
수린은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것이 다 있는’ 섬이다. 자동차도 없고 공장도 없으며 심지어 그 흔한 오토바이 한 대 없다. 그리고 이런 곳에는 꼭 있을 법한 분위기 좋은 별장이나 리조트도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가공된 물건도 수린은 거부한다. 순진한 태국 사람들은 공주의 엄명(?)에 절대 복종한다. 그러나 공주의 엄명은 공주 자신만의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수린을 아끼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가 공주의 입을 빌려 나왔을 뿐이다.

덕분에 우리같이 공해에 찌든 이방인들은 그 어떤 해변이나 관광지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자연의 선물을 이곳 수린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물론 그것은 1년 중 딱 절반, 그리고 남들보다는 조금 더 시간적 여유와 부지런함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돌아가는 특혜이다. 가는 길이 평범하지 않아 일반 패키지 여행사나 ‘깃발 여행’ 단체도 이곳에 범접할 수 없으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나 심부름해주는 가이드를 옆에 두고 싶은 안락 여행자들에게도 수린은 절대 품을 열지 않는다. 내리는 빗물을 그대로 받아 마셔도 아무런 탈이 없는 깨끗한 공기, 대지의 고요와 자연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곳, 그 정적을 깨는 날다람쥐와 이구아나의 바스락거림, 우리는 이런 곳을 ‘천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수린의 하이라이트는 스노클링 투어다. 이곳의 스노클링은 특별하다. 산소통을 짊어지고 스쿠버다이빙을 해야만 볼 수 있는 바다 세상을 간단한 스노클링 장비만으로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수린이다. 수심이 얕고 바닥에 산호가 풍부하며 물이 워낙 맑아 볼거리가 가득하다. 파타야나 푸껫은 물론이거니와 아름답다고 소문난 피피에서도 만나기 힘든 광경이다. 말 그대로 바다 속 천국 풍경이다. 스노클링은 한번 투어를 나가면 2~3군데 정도를 돌아보게 되므로 아무리 빨리 보아도 이틀은 족히 걸린다.

또 수린에서는 해변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거나 조개나 게를 잡고, 근처 모겐족 마을을 둘러볼 수도 있다. 수린에서는 밤 10시30분이면 섬 안의 모든 불이 꺼진다. 밤에 만나는 수린은 더욱 특별하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은하수를 보며 해변에서 그냥 잠이 들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흔한 모기조차 없다.

수린으로 가는 길목은 ‘쿠라부리’라는 작은 도시인데, 방콕과 춤폰 그리고 푸껫 등지에서 버스로 쿠라부리까지 이동할 수 있다. 쿠라부리에서 배를 타면 여행객들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입장을 하게 되는데 한 군데는 ‘총캇 비치’고 또 다른 곳은 ‘마이응암 비치’다. 여행객이 머물 수 있는 해변은 이 두 곳밖에 없다. 그 외 지역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섬 안에서는 어떤 취사 행위도 불가하므로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식당에서 해야 한다. 식사와 음료, 간식 등은 공원 안내소에서 쿠폰을 산 뒤 음식과 교환한다.

숙소는 방갈로가 있지만 발 빠른 태국 사람들의 몫이다. 수린이 문을 여는 6개월 전에 예약이 마감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행자는 텐트에서 잠을 자는 원시의 특혜를 덤으로 얻는다. 그런데 아무도 이런 불편함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오히려 축복하고 감사한다. 수린은 파타야나 푸껫처럼 타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린 섬사람이나 여행자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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