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대망론’ 현실이냐, 신기루냐
  • 이숙이 기자 (sookyiya@sisapress.com)
  • 승인 2007.01.0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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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폭발 변수’ 될 수 있으나 미래 불투명

 
“한창 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최근 행보를 놓고 정치권 인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정가에서 ‘간을 본다’는 말은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주판알을 튀기고 있다”는 뜻으로 쓰이곤 한다.

정운찬 전 총장이 박원순 변호사 등과 함께 여권의 ‘잠룡’으로 거론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다. 하지만 그동안에는 말 그대로 잠룡이었다. 그런데 2006년도 정기국회가 마무리되고, 여권이 본격적으로 정계 개편 논의에 돌입할 즈음 새삼스레 ‘정운찬 대망론’이 주목된 이유는 정 전 총장의 ‘달라진’ 행보 때문이다.

정 전 총장은 그동안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하곤 했다. 그런데 지난 12월20일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자기는 결단 있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12월26일에는 두어 발짝 성큼 더 나갔다. 재경(在京) 공주 향우회의 송년 모임에 참석해 “충청도는 나라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왔다. 공주분들에게 2007년은 특별한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미력하나마 공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고, 그걸 위해 내 모든 걸 바치겠다”라고 한 것이다.

정 전 총장의 고향은 충남 공주다. 그러니 고향 어른들 앞에서 마치 출사표를 던지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된 셈이다. 물론 정 전 총장은 이에 대해 “덕담이었을 뿐이다”라고 한 발짝 물러선다.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고향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의미라는 얘기다.

김근태계 등 지원 있어야 정계 입문할 듯

하지만 정 전 총장이 적어도 대권에 대해 ‘무관심’에서 ‘관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정 전 총장과 가까운 한 열린우리당 의원은 “최근에 정 전 총장을 만났는데 정치에 관심이 아주 많더라. 다만 정치판이 하도 아수라 같기 때문에 자기가 과연 발을 담가도 되는 건지 하는 두려움이 있고, 또 막상 뛰어든다면 승산이 있어야 할 텐데 아직까지는 답이 나오지 읺는다는 불확실성 때문에 이래저래 고민하는 눈치였다”라며 정 전 총장측의 분위기를 전했다.

여권에서는 정운찬 카드의 강점을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 충청도 출신이라는 점, 둘째 경제 전문가라는 점, 셋째 인지도가 높다는 점이다. 충청도 출신이라는 점은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던, 그러나 이번에는 제대로 된 충청권 주자를 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한 충청권의 욕구를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요소로 여겨지고, 경제 전문가라는 점은 2007년 대선의 핵심 화두가 경제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현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의 대항마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며, 인지도가 높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늦게 출발한다고 해도 대중에게 쉽게 각인될 수 있다는 점에서 플러스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객관적 요소 외에 정 전 총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만만치 않은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라고 주장한다. 한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은 “기자 시절 정 전 총장에게 경제 문제를 물어보면 어려운 정책을 정치적 맥락을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곤 했다. 그래서 정 전 총장이 인기 있는 취재원이었다”라고 말했고, 서울대의 한 교수는 “정 전 총장은 학자답지 않게 대중적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정 전 총장이 서울대 총장 선거 때 가장 막판에 뛰어들어 당선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정치력 때문이었다는 얘기다. 정 전 총장은 1995년 스승인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서울시장 선거에 나섰을 때 자원봉사단을 이끌고 직접 선거전을 진두지휘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정 전 총장의 대권 도전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유권자들 사이에 ‘학자 출신 정치인’에 대한 적잖은 불신이 있는 데다, 무엇보다 대권 경선에 뛰어들기에는 정 전 총장의 정치적 기반이 너무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가에서는 몇 가지 조건이 무르익지 않는 한 정 전 총장이 정치권에 발을 내딛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본다.

그 전제 조건 가운데 하나가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나 정동영 전 의장의 대권 포기이다. 열린우리당의 양대 계파를 장악하고 있는 두 사람이 대권을 포기하고 동시에 정운찬 카드를 밀어주거나, 최소한 김근태 의장계만이라도 확실하게 정운찬 카드를 미는 쪽으로 내부 정리가 되어야만 정 전 총장이 비로소 움직일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통합신당파의 한 의원은 “GT(김근태)와 DY(정동영)가 둘 다 대선 후보를 접으면 원심력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의원들이 이탈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만 정 전 총장의 경기고· 서울대 1년 선배인 김근태 의장의 경우에는 자기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다른 사람이 되느니 정 전 총장이라도 미는 쪽으로 방향을 틀 가능성도 있잖겠는가”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정 전 총장이 제2의 정몽준의 길을 갈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아무리 오픈 프라이머리라고 해도 일단 경선에 참여했다가 여권의 대선 후보로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아예 여권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 세력화를 꾀하다가 선거 막바지에 후보 단일화를 이루는, ‘어게인 2002’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어게인 2002는 한 번 써먹은 카드라는 점에서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폭발력이 약하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정운찬, 이명박과 연대한다?

정치는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정 전 총장이 방향을 1백80° 틀어서 한나라당에 몸을 싣게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거론된다. 그러나 이때는 정 전 총장이 대권 주자가 아닌 러닝메이트(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달려 있다. 요즘 여야가 주관하는 각종 대선 관련 세미나에 단골손님으로 초대받고 있는 국민대 김형준 교수(정치학)는 심지어 ‘노무현·김대중·박근혜 연대’와 ‘이명박·정운찬 연대’로 차기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도 상정해볼 것을 주문했다.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 대통합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역주의의 대표적 가해자와 피해자 격인 김대중 전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와 손잡고 대통합의 카드로 박 전 대표를 내세우고, 샐러리맨의 신화→청계천 신화에 이어 내륙 운하 등으로 경제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이명박 전 시장이 경제 이론가이자, 자신에게 취약한 충청권 표심을 보완해줄 러닝메이트로 정운찬 전 총장을 선택할 경우, 차기 대선은 ‘통합드림팀’ 대 ‘경제드림팀’의 맞대결이라는 흥미진진한 이벤트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무튼 고건 전 총리의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더욱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던 여권은 ‘정운찬’이라는 깜짝 카드가 부상하면서 새삼 활기를 띠고 있다. 한나라당이 벌써부터 경계심을 내비치는 것도 정운찬 카드의 파괴력이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이다. 정운찬 카드가 정치권의 희망 카드로 끝날지 아니면 차기 대선의 폭발 변수가 될지, 또 여권에 유리할지 야권에 유리할지는 아직 속단하기 이르다. 다만 여권의 정계 개편이 지지부진해질수록 정운찬 전 총장에게는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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